박상우- 애메랄드 궁전의 추억. 작가의 말 지금은 사랑의 이름으로 사랑이 분리 수거되는 시대.나는 세상 도처에서 빈 페트병처럼 혹은 일회용 인스턴트 식품 용기처럼 가볍게 사용되고 부 담없이 버려지는 무수한 사랑을 목도한다. 감정적 잔흔(殘痕)까지 말끔하게 처리되는 분리 수거 시대의 사랑은 얼마 나 편의적인가.하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버려지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랑 의 의미일 테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사용자들의 마비된 심성에는 자기 정화 시설이 없고,그러므로 거기서 양산되는 감정은 아무리 짙은 립스틱 빛깔을 띠고 있어도 내적인 강렬함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인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그것은 과거에서 잉태되고 현재에서 숙성하고 미 래에 이르러 비로소 광채를 얻게 되는 사랑의 공간을 상징하는 말이다. 내가 그것을 처음 목격한 것은 어느날 밤,화려한 껍데기들이 넘쳐나는 편 의점 쓰레기통 속에서였다. 놀랍게도 에메랄드 궁전이 거기,세기말의 쓰레기통 속에서 한없이 추레한 외관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날 이후,나는 사랑이 아니라 사랑의 의미를 복원하는 작업을 꿈꾸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조화롭게 연결해야만 비로소 잃었던 광휘를 되찾게 될 에메랄드 궁전,그것이 우리들의 삶에 씨줄과 날줄로 아로새겨진 진정 한 사랑의 공간이라는 확신이 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미래를 통해 과거를 되새기고,과거를 통해 현재를 담금질하는 과 정은 얼마나 지난할 것인가. 1997년 7월1일 아침,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서기 2000년 5월1일 아침으로 시간 이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머무르다 에메랄드 궁전 흔적이 남아 있는 1970년 대로 다시 시간 여행을 하게 될 것이다. 요컨대 과거와 미래로 시간이동을 하며 소설을 읽는 현재시점을 부각시키 려는 게 나의 의도이거나 전략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아무렇든 이 여름,에메랄드 궁전을 복원시키기 위해 나는 또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염두에 둔 고원지대에서 몇 달을 보내며 집중적으로 연재소설을 쓰게 되 겠지만,그것이 나 혼자만의 작업이 아니라는 마음가짐으로 나는 무더운 여름을 관통해 나갈 것이다. 독자 여러분이 한낮의 뙤약볕을 잊게 하는 서늘한 그늘이 되고,지친 심신 을 각성시켜 주는 새벽의 냉기가 돼 줄 거라는 믿음.그리하여 독자들보다 먼저 에메랄드 궁전을 향해 떠나지만,거기서 다시 만나게 될 거라는 믿 음으로 나는 설레는 기다림의 나날을 보내게 될 것이다. 사랑의 의미가 복원되는 거기,에메랄드 궁전에서 다시 만나게 될 때까지 . 박상우 내가 전망을 중시하기 시작한 것은 내 인생의 전망을 스스로 포기하고 난 직후부터였다. 반 년 이상 일간신문에 연재하던 장편소설을 갑작스럽게 중단하고,그것과 동시에 절필을 선언하고 나서 부랴부랴 이곳으로 이사를 온 것이었다. 그리고 8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오직 전망 하나를 낙으로 삼으며 전망 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었다. 오피스텔 15층,전망 없는 전망대,그리고 절필 소설가. 구름 한 점 없이 푸른 5월의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대로 1999년 8월에 지구가 멸망할 거라고 떠들어대 던 인간들의 광란에도 불구하고 이 세계는 어느덧 서기 2000년 5월로 접 어든 것이었다. 지구의 종말을 안타까워하거나 그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오직 그것을 기다리며 살아온 것처럼 광기로 날뛰던 인간들도 지금은 저 잠잠한 풍경 속에서 한없이 부드러운 달빛에 휩싸여 종말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고 있을 터였다. 사랑을 하고,결혼을 하고,아이를 낳고,이혼을 하고,돈을 벌고,돈을 쓰고 ,그러다가 힘에 부치면 홀로 눈물 지으며 자살을 꿈꾸기도 할 터였다. 오호라,무명초를 닮은 인생이여! 산뜻한 백색 유람선이 한강 선착장을 출발할 때 거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몰입해 있던 풍경의 세계에서 퍼뜩 깨어나며 나는 무척이나 쓸쓸한 표정 으로 베란다에 앉아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보기 좋은 풍경에는 어김없이 마취 성분이 깃들어 있는 법이거늘 속수무 책의 정서를 지닌 이십대도 아니면서 턱없는 감상에 빠져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의자에서 일어나며 나는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 그런 뒤에 거실로 들어가 침대 옆의 작은 탁자 위에 올려 놓은 무선전화 기를 뽑아들었다. “거기가 소설가 이본오 선생님 댁인가요?”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젊 은 여자의 목소리가 귓문으로 밀려 들었다. “그런데… 누구시죠?” 아무래도 잘못 걸려온 전화인 것 같다는 예감이 들어 나는 다소 경직된 목소리로 물었다. '소설가 이본오 선생님'이라고 여자가 또박또박 말했기 때문에 잘못 걸려 온 전화일 가능성은 더욱 농후했다. 아직도 내가 절필했다는 걸 모르고 원고 청탁을 하는 경우,아니면 절필 자체를 기사 거리로 만들고 싶어하는 잡지사의 인터뷰 요청 같은 것.“본 인이신가요?” 나도 그녀가 누구냐고 물었건만,그녀는 그것을 무시한 채 전화를 받고 있는 내가 누구인질 먼저 확인하고 싶어했다. 내가 누구이거나 말거나,당신 이본오 맞아? 냉랭한 목소리 때문인가,그녀 의 물음이 내게는 그런 식으로 해독되었다. “말씀하세요.제가 이본오입니다. ”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내려다보며 나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안녕하세요,하고 거의 엉겁결인 것처럼 여자가 인삿말을 건넸다. 그러고는 호흡을 가다듬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저는 ABS방송국의 특집제작국에 근무하는 이예린 프로듀서예요.찾아뵙 고 용건을 말씀 드리는 게 예의일 텐데….선생님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 몰라 이렇게 전화부터 먼저 드렸어요.제가 잠시 시간을 빼앗아도 괜찮을 까요?”“별 상관 없습니다. 말씀 하세요.” 아무리 예절 바르게 덤벼도 결과는 마찬가질세,하는 생각 을 하며 나는 탁자위에 놓인 담배와 라이터를 집어들었다. “간단히 말씀 드릴게요.이번에 제가 맡게 된 특집 다큐멘터리에 선생님 을 출연시키고 싶어서 전화 드린 거예요.보나마나 거절하실 거라고 생각 하면서 전화를 드린거니까 뭐라고 말씀하셔도 저는 별로 놀라지 않을 거 예요.단단히 각오가 돼 있거든요.”“이것 보세요,이…” 건성으로 들어 넘긴 그녀의 이름이 퍼뜩 되살아나지 않아 나는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 에 끼운 채 엄지 손가락으로 이마를 눌렀다. “이예린요.”“아,그래요,이예린 씨!저에게 전화를 건 용건이 무엇인지 는 알겠는데,길게 말할 필요도 없이 저하곤 아무 상관도 없는 얘기 같네 요.무엇을 다루는 특집 다큐멘터리인지는 모르겠지만,어쨋거나 전 방송같 은 것엔 전혀 출연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는 거예요.이제 됐죠?” 그녀가 마치 내 앞에 서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나는 말을 하고 나서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단단히 각오를 했다면서도 그녀는 결연한 나의 태도에 당황한 듯 잠시 침 묵을 지켰다. 하지만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는 엉뚱한 말로 나에게 일격을 가했다 . “절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그런 뜻인가요?”“무관하진 않죠.하지만 절 필을 하지 않았다 해도 대답은 마찬가지였을 거예요.한마디로 말해,노! 왜냐하면 그런 건 내 분야가 아니기 때문이죠.다른 건 몰라도 내 자신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으니까요.” 애써 태연을 가 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뱉은 말 속에서는 딱딱한 뼈가 느껴졌다. 하지만 오래 끌어봤자 짜증스러워지는 일밖에 없을 텐데,그런 상대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할 이유가 무엇이랴.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나의 인성에는 이제 물렁뼈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았다. "제가 만들어야 할 다큐멘터리는 선생님과 무관하지 않아요.무관하지 않기 때문에 전화를 드린 거고,전화를 드렸으니까 용건을 끝까지 말씀 드리고 싶어요.선생님이 작년에 중단하신 신문 연재소설,그 제목이'첫사 랑'이죠?”“그게 어쨌다는 거요?” 여자가 좀체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그녀가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것 같아 나는 몹시 불쾌한 심정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제가 만들어야 할 다큐멘터리도 그것을 다루는 거예요.”“첫사랑을 소 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그런 말이오?”어이가 없다는 목소리로 나 는 되물었다. “그것 한편을 독립시켜서 제작하는 게 아니라 1900년대를 되짚어보는 전 체 10부작 다큐멘터리를 기획했는데,그중 마지막 항목으로 그것이 채택되 었다는 거예요.서기 2000년을 맞이한 특집 기획물인데… 보다 상세한 내 용은 나중에 만나서 말씀 드릴게요.이것이 제 주관적인 판단이라는 약점 은 있지만,어쨌거나 전 선생님이 중단하신'첫사랑'이라는 연재소설을 읽 고 나서 뭔가 그 부분에 대해 할 말이 많으신 분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랬기 때문에 연재를 중단하고 절필 선언까지 한게 아닌가,하는 생각도 나름대로 했구요.”“판단과 주관이야 이예린씨 몫이니까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어요.뿐만 아니라 그것에 대해 내가 설명해야 할 의무도 전혀 없구요.이예린씨가 어떤 판단을 하고 어떤 주관으로 나를 생각했건 간에 ,분명하고 확고한 것은 오직 한 가지뿐이예요.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방 송출연 같은 건 절대로 하지 않는다,그런 것이죠.”딱 부러지게 말을 하 고 나자 갑자기 며칠 전에 끓여먹은 무우국 생각이 났다. 채를 썰기 직전,식칼로 먼저 탁,탁,탁,무우를 토막낼 때의 삼빡하던 절단 감이 되살아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해 더이상 그녀와 채썰기 같은 대화를 나누기가 싫어진 것이었 다. 무우를 토막 내는 것 정도는 건성으로 할 수 있지만,채썰기 같은 건 결코 장난삼아 할 수 있는게 아니라는 것… 마흔 셋이 되도록 독신으로 살아 온 내가 어찌 그런 것을 모를까. 나의 결연한 태도에 질려 버렸는지 그녀 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중압감을 느끼게 하는 침묵이 그녀와 나를 어색하게 옥죄고 있었지만,내 가 먼저 입을 열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나는 버팀목처럼 묵묵히 서 있 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제는 그녀가 마무리를 해야 할 차례라는 걸 일깨워주기 위해서였는데,정작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은 나의 기대감을 보기좋게 무시해 버린 것이었다. 호락호락 물러서지는 않겠다는 부드러운 경고의 말.“날씨가 너무 화창하 죠?다시 전화 드릴게요.” 오기욱이 15층으로 올라온 것은 정오 무렵이었다. 조간신문을 보고,청소를 하고,샤워를 하고, 오랜만에 베토벤의 '황제 '를 듣고 있을 때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듯 부석부석한 얼굴로 나를 찾 아온 것이었다. 같은 오피스텔의 7층으로 그가 이사를 온 것은 지난 연말,그러니까 서 른 일곱에 감행한 늦은 결혼을 단 5개월만에 파경으로 끝장낸 직후였다. 10년 넘게 유지해 온 친분,나의 절필과 이사,그의 파혼과 정신적 혼란-아 마도 그런 것들이 뒤섞여 유유상종을 더욱 부채질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 그것이 소설이었건 결혼이었건,어쨌거나 각자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한 부분씩을 끝장냈다는 동병상련의 유대감 같은 걸 그와 나는 느끼고 있었 던 것이다. “어젯밤엔 대체 어떻게 된 거유?” 소파에 몸을 던지자마자 그는 담배부 터 피워물었다.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견디기 힘들어서 그냥 집으로 왔지 뭐.그 래,넌 즐거웠냐?” 헐렁한 반팔 남방에 낡은 청바지,다리를 꼬고 앉아 맨 발을 흔들어대는 그를 내려다보며 나는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 “젠장,가면 간다고 말을 해 줘야지,그렇게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면 난 어 쩌란 거요? 형이 먼저 갔기 때문에 내가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타락했다 면 기분 좋겠수?”“나 때문에 타락을 했다구? 그럼 오히려 나에게 감사 를 해야겠군.그런 곳에 타락하러 가지 않으면 개과천선하기 위해 가겠냐 ? 내가 견디기 힘들었던 건 다만 내 자신일 뿐이었어.난 익숙하지 않는 건 잘 못 견디잖아.새로움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기질,몰라서 하는 말이야?” 애초부터 그런 곳에 나를 데려간 게 잘못이었다,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를 내려다보았다. “암튼 난 어젯밤에 완전히 망가져 버렸으니까 이젠 그 얘긴 그만합시다 . 얘길 오래 끌면 오늘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게 될 거요.”“흠,아주 대 단했었나 보지?”“그래요,대단했었죠.나중에 룸에 들어가서 상대방 여자 의 가면까지 찢어 버리고 따귀까지 얻어 맞았으니… 말 다한 거 아뇨?” 생각하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내가 항상 말하잖아.넌 성공했다 싶을 때 항상 방심하면서 술에 먼저 거꾸러지는 게 탈이라고 말야.팔부 능선까지 힘겹게 기어올랐다가 한순간 에 발을 헛디뎌 정신없이 밑으로 굴려내리는 형국이란 말야.아니야?”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어젯밤엔 그러길 잘했어요.그때 술에 취해서 상대 방의 가면을 찢었기에 망정이지….으이그,가면을 쓴 채로 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생겼다면 정말 후회막급이었을 거예요.따귀를 때리고 나서 그 여자가 내게 뭐라고 했는 줄 알아요? 임마,얼굴에 가면을 쓰는 자리라면 이 정도는 응당 각오를 하고 왔어야 할 것 아냐! 그러는 거예요.어느 정 도인지 알겠어요?”“아니 모르겠어.어느 정도였는데?” 고개를 가로저으 며 나는 장난스럽게 빙그레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무리 깎아주려고 해도 마흔 일곱이나 여덟 밑으로는 절대 안돼요.빌 어먹을,재수에 옴붙었지,하필!” 하필이면 십년 정도나 연상의 여자가 걸 릴 게 뭐냐,하는 말을 그는 생략하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재수를 한탄하듯 그는 소파의 등받이에다 팔을 걸고 멍한 눈길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자세를 고쳐앉으며 엉뚱한 질문을 내게 건 넸다. “형,밥 먹었수?”“내가 언제 아침 먹는 거 봤냐? 커피 한잔 마셨어.” “그럼 잘됐네.우리 일층으로 내려가 우동이나 먹읍시다. 재수가 꼬였는데 속이라도 풀어야지,제길!” 나는 우동을 먹으러 가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자 커피숍 맞은편의 우동집에는 제법 사람이 많이 앉아 있었다. 은행.레스토랑.커피숍.미용실.클리닉 따위가 있었지만 언제나 영업이 가 장 잘 되는 곳은 우동집뿐인 것 같았다. 하지만 언제나와 마찬가지로,스무 개 정도의 식탁에는 거의 다 한 사람씩 앉아 있었다. 오기욱과 나처럼 함께 식사를 하러 오는 사람들이 드물었던 것이다. “어젯밤 경험,소설에 보탬이 될 것 같애?” 우동을 주문하고 나서 나는 다소 침울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오기욱에게 물었다. 지난 밤,그가 가면무도회에 간 이유가 사실은 즐기기 위한 게 아니라 소 설 집필에 필요한 취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얼굴을 가린 대상에 대해 인간은 평소보다 훨씬 강렬한 성적 본능을 느낄 뿐만 아니라 가면이 제공하는 익명성에 대한 안도감 때문에 쉽사리 동물 적인 태도를 노출할 수 있다는 사실…. 그것이 그의 소설에 제공된 일종 의 주제의식이라고 볼 수 있을 터였다. 요컨대 철학과 출신의 소설가답게 그는 가면무도회를 배경으로 인간의 내 면에 잠재된 동물적 본성이 어떤 과정을 통해 어떻게 광기에 이르게 되는 지를 소설로 드러내려 한 것이었다. “보탬은 무슨…. 그 소설,무기한 연기하겠다고 아까 잡지사에다 전화했 어요.절필은 아니더라도 나는 당분간은 좀 쉬었으면 좋겠어요.이래저래 많이 지쳤나봐.” 오기욱과 나는 우동을 먹고 맞은편의 커피숍으로 자리를 옮겼다. 밝은 햇살이 밀려드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자 화단에 피어난 철쭉과 연 산홍이 보란 듯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동안 그와 나는 말없이 화단을 내다보았다. 나도 기분이 그리 유쾌한 편은 아니었지만,오늘따라 그는 무척이나 우울 한 심사가 되어 있는 것 같았다. 외로운 건가? 오기욱이 15층의 내 거처로 직접 올라온 것만 보아도 심상 (尋常)한 상태가 아니란건 얼마든지 짐작할 수 있었다. 같은 건물에 산다고는 해도,그와 나는 서로의 사생활을 무시하면서까지 친분을 우선시하는 사이는 결코 아니었다. 뭐랄까,서로에게 정신적으로 부담스런 존재가 되지 않으려는 깔끔한 이기 주의같은 것이 그와 나 사이에 묵계적으로 형성돼 있었던 것이다. “형은 혹시 아이를 갖고 싶다고 생각 해 본 적 없어요?” 문득 창에서 시선을 거두며 그가 나른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이?”“그래요,아이.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아주 간절하 게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니체 식으로 말해 나의 아이를 낳게 하 고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 말예요.”“글쎄,뜻밖의 얘기로군 그 런 생각을 전혀 안해본건 아니지만,한번도 결론을 내려 본적은 없었어.아 이 문제를 독립시켜서 생각하기도 어렵고,천상 결혼과 결부된 문제니까 나로서는 결론에 도달하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지.근데,아이를 낳게하고 싶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는 얘기는 다시 결혼할 여자를 찾고 싶다는 의미 인가?” 이혼한지 일년도 지나지 않아 또다시 결혼 상대를 찾겠다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의아스런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오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정리한 이후,그는 자신의 이혼에 대해 아주 간단 명료하게 사유를 밝혔었다. 결혼의 파탄이 결혼의 허위나 기만보다 낫다고,그때에도 그는 니체를 인 용했던 것이다. “성공에 대한 의지는 실패를 경험해 본 사람쪽이 훨씬 강해요.실패를 해 봤기 때문에 더욱 성공하고 싶어지는 거죠.그리고 반드시 그런 이유는 아 니라 해도…누군가,적당한 대상이 아니라 필연성을 느끼게 하는 대상을 만났으면 좋겠어요.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을 지니고 세상의 이치를 날카롭 게 꿰뚫고 있는 여자…이제 그런 여자는 씨가 말라 버린건가,내 눈에는 세상 여자들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비슷해 보여요.개성이라는 이름의 몰개 성으로 여자들이 한심스럽게 평준화되거나 속물스러워진 것 같다구요.” 나른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래,얼음처럼 차가운 지성을 지니고 세상의 이치를 날카롭게 꿰뚫고 있는 여자를 만나면 만사 제쳐두고 너에게 신고부터 하마.그때를 대비해 서 포상금이나 넉넉히 준비해 둬라.” 농스럽게 말하고 나서 나는 남겨진 커피를 마저 마셨다. “근데,형은 정말 하영씨와 결혼하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거요?”“갑자기 하영이 얘기는 왜 꺼내?” 빈 커피잔을 손에 들고 나는 그를 보았다. “가끔은 형의 속내를 정말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요즘 세상 에 그렇게 정성스런 여자를 만나기도 어려운데 고집스럽게 마음의 거리를 유지하려는 이유가 도대체 뭔지를 모르겠다구요.내가 대상에게 함몰해 버리는 타입이라서 그런지 모르겠지만,때때로 형이 아주 냉정한 사람이라 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는 거죠 .”“너,오후에 뭐할 거냐?” 커피잔을 탁자에 내려놓고 나는 그만 일어나자는 표정으로 그에게 물었다. “흠,전형적인 응전 방식이로군.”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에 그는 오후에 뭘 할지는 자신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어는 쪽에서건 인생을 걸 만한 일이 생기면 서로 연락하자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그는 선뜻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사는 남자들에게 인생을 걸 만한 일이란,다소 한심스럽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전적으로 여성을 염두에 둔 단순하기 짝이 없는 기대감을 의 미하는 말이었다. 단적으로 말하자면,이성을 향해 24시간 입을 벌리고 있는 짝 없는 인간들 의 정신적 허기 같은 것. …나른한 오후네요.전화 주실래요? 오기욱과 헤 어져 15층으로 올라오자 자동응답기에 윤하영의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을 듣고 나서 나는 잠시 애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나른하니까 전화를 걸어달라? 용건을 그런 식으로 해독하자 웬지 전화를 걸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지 않았다. 심심찮게 만나서 저녁식사도 함께 하고,술도 마시고,가끔은 잠도 같이 자 는 사이이니 전화 한 통화를 놓고 신경전을 벌여야 하는 사이는 물론 아 니었다. 하지만 어는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내가 나른함까지 해소시켜 주는 크리 너 같은 존재가 될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인간에게는 어는 누구도 해결해 줄 수 없는 처리 불능의 영역이 있게 마 련이고,그런 걸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오직 시간뿐이라는 것 정도는 마땅 히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피곤하고 짜증스런 존재'란 바로 그런 걸 모르고 살 아가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일 테니까.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참으로 오랜만에 나는 영혼의 박막(薄膜)이 떨리 는 걸 느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진정한 교통로가 열리는 순간,그리고 사람이 사람에 게 다가갈 수 있는 진정한 가능성을 일깨우는 순간… 자연스러움과 부자 연스러움을 본능적으로 감지하고,그것을 위장없이 발설할 줄 아는 그녀의 태도에 놀라 나는 잠시 감동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다가 문득,그녀에게 이런 제안을 했다. “그럼 우리 여길 빠져나가 자연스런 장소로 갈까요?” 그날밤,그녀와 나 는 그곳에서 빠져나와 한강 유람선 선착장으로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맥주를 마시며 자연스러움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지에 대해 꽤나 다채로운 얘기를 주고받았다. 자연스러움을 예찬할 수 있는 재료들을 서로 다르게 지니고 있었기 때문 에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그녀와 나의 공감대는 무궁무진하게 확장돼 나 갔다. 영화로 들어갔다가 소설로 옮겨가고,패션 디자인으로 너머갔다가 이윽고 인생으로까지 교감의 영역을 넓혀나간 것이었다. “선생님과 저,오늘 처음 만난 게 아니라 아주 오래 전부터 만나온 사람 들 같아요.참 이상하죠?” 발그레하게 취기가 오른 얼굴로 그녀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그녀의 말에 동의하고 나서 나는 결혼에 대한 그녀의 생각을 물었다. 그러자 결혼하고 싶은 남자를 만나지도 못했고,반드시 결혼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별로 들지 않아서 그것에 대해서는 별달리 신경을 쓰지 않고 살 아간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부모님들도 이혼을 했기 때문에 결혼을 재촉하는 사람도 없고,그래서 하 루하루를 흐르는 강물처럼 지극히 자연스럽게 살아가고 있을 뿐이라는 것 이었다. 그리고 나,마흔이 되도록 독신으로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그녀는 물었다 . “나도 하영씨처럼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그냥 살다보니까 이렇게 된 거 죠.그렇게 되려고 해서가 아니라 저절로 그렇게 되어지는 경우가 있잖아 요.더군다나 이제 난 마흔이 되었으니 이런 문제를 운명으로 받아들여도 별로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아요.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는 거죠 뭐.” 거 짓말이 아니라 설명할 방도를 찾을 길이 없어서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하지만 아무리 되새겨봐도 그것이 온당한 대답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 인생의 어느 순간이 특별하지 않고,인생의 어느 순간을 그러려니 하고 방 치할 수 있단 말인가.나는 끝없이 사랑을 꿈꾸고 갈망하는 자,그러면서도 마음에 묻어둔 사랑 때문에 또다른 사랑을 성취하지 못하는 인간이었다 . 사랑에 초연해지고 거미줄처럼 영혼을 덮어 오는 외로움을 물리칠 수 있 었다면,그렇다면 지금 하영을 만나 또다른 기대감으로 영혼의 빗장을 열 려 하는 나를 무슨 수로 변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영과 세번째 만나던 날,나는 그녀의 아파트에서 잤다. 관계를 형식화하는 마지막 통과의례로 섹스의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인데, 예상했던 대로 그날 이후부터 그녀와 나의 만남에는 일정한 패턴이 생겨 나기 시작했다. 한심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처럼 만나서 식사하고 술 마시고,취기가 유발 하는 일시적 욕망에 도취해 서로의 육체를 탐하는 되풀이 혹은 되돌이… 중간중간 자잘한 변화가 있었다 해도 결과는 언제나 마찬가지였던 것이 다. 하지만 인생이 무에 그리 대단한 것이라고 날마다 감동적이고 가슴 벅찬 드라마를 양산할 수 있으랴.남녀 관계라는 게 그렇고 그런 과정을 통해 어차피 감정적 마모를 겪게 된다는 걸 나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걸 알기 때문에 감정적인 소모를 피하며 세상을 살고 싶어한 것이고 ,그런 걸 겪어봤기 때문에 또한 사랑을 쉬운 문제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끝을 알면서도 과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건 얼마나 허망한 일인가. 하영과 함께 있는 동안에도 나는 근원을 알 수 없는 끈덕진 그리움에 시달렸다 . 그녀 앞에 앉아 있는 게 아니라 황량한 벌판이나 사막 한가운데 내가 홀 로 앉아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시간의 흐름이 소멸된 지대에 내가 던져져 있는게 아닌가,문득 주변을 두 리번거리며 나를 사로잡고 있는 환상의 실체를 포획하려는 눈빛이 되기도 했다. 심지어는 그녀와 섹스를 나누는 동안에도 갑작스럽게 가슴 밑바닥에서 서 늘한 허무의 안개가 피어올라 정염의 열기가 무참하게 스러져 버릴 때도 있었다. 문제는 대상인 하영이 아니라 나,전적으로 내 자신의 내부에 은거하고 있었다. 그런 걸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그녀를 만나는 과정에서 가능 한 한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도 또한 세심한 배려와 깊은 이해심으로 나와의 관계에 충실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나 외형상으로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 것처럼 관계가 포장되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쉽게 살 수 있는 게 인생인데,도대체 뭐가 문 제란 말인가. 하영을 만난 뒤로 이년이 지나는 동안 나는 거의 소설을 쓰 지 못했다. 현실과 나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과 불화감,그리고 사십대로 접어든 뒤 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인생에 대한 회오감까지 가세하여 도무지 글을 쓰 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질 않았다. 무엇을 위해,무슨 이유로 지금껏 나는 살아왔는가? 몇 권의 소설과 몇 번 의 사랑,독신의 이력과 몸에 밴 침묵의 그늘… 불혹도 아니고 미혹도 아 닌 경계 선상에서 나의 영혼은 위태롭게 떠돌고 있는 것 같았다. 신문 연재 소설을 써 달라는 제안을 받은 것은 바로 그 무렵의 어느날, 그러니까 1998년이 저물어가던 11월의 초순경의 어느날이었다. 1999년이 코밑에까지 이르렀으니 세기말적인 사랑 이야기를 연재해 달라 ,하는게 신문사 측의 요구였다. 그러면서 담당 기자는 잔혹한 사랑,지독한 사랑,컬트적인 사랑 등등의 말 을 주워섬겼다. 요컨대 막가는 시대의 막가는 사랑 풍속을 막가는 분위기로 써 달라는 주 문이었다. 삼일 밤 삼일 낮 동안 나는 신문 연재소설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에 약속 장소로 나가 담당 기자를 만났다. 하지만 삼일 동안 고심한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수락도 아니고 또한 거 절도 아니었다. 일종의 역설적인 견해를 전달하겠다는 생각을 품고 약속장소로 나간 것 인데,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신문사측의 요구를 완전히 뒤집어 엎 는 결론이라고 해야 할 터였다. 헐벗은 플라타너스가 내려다 보이는 이층 커피숍, 주문한 두 잔의 커피 가 날라져온 뒤에 나는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얘기한 게 대충 어떤 분위기를 지닌 소설이란 건 알겠는데… 연재 여부를 떠나 다소 엉뚱한 결론을 전하게 돼서 유감이군요. " "엉 뚱한 결론… 이라뇨?" 손에 들었던 커피잔을 다시 내려 놓으며 사뭇 놀 라는 눈빛으로 기자는 나를 보았다. "신문사 측에서 원하는 것은 아마도 지금의 세태를 반영하는 소설을 써 달라는 것일 텐데… 그것이 자칫하면 종말적인 분위기를 조장하는 데 본 의 아니게 일조할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 소설이 사람들의 무뎌진 경각심을 일깨울 가능성은 있겠지만, 연일 사회면을 장식하는 사 건 기사가 소설적 재미와 충격을 훨씬 능가하는 세상인데 과연 기대한 만 큼의 효과를 얻을 수 있을까요?" "무슨 말씀인지는 알겠지만… 온갖 신 문 연재소설의 판세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니 흐름을 벗어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 뜻은 알겠지만 현실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 니 어쩌겠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는 머리를 흔들었다. "현실이 지금처럼 극도로 혼란스럽게 느껴질 때는 오히려 과거를 반추 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사회적인 문제도 결국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쯤에서 한번쯤 지나간 시대의 사랑 풍속을 되새겨보게 하는 소설을 쓰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다시 말해 '있는 것' 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보다 '있었던 것' 을 되새겨봄으로 써 현실과의 극명한 대비감을 느끼게 할 수 있다는 거죠. 격세지감같은 것이랄까, 그런 걸 통해 역으로 현실을 반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거죠. " "과거를 되새기게 하는 소설이라면… 구체적으로 어떤 소설을 말씀하시는 거죠?" 그의 물음에 곧바로 응대하지 않고 나는 잠 시 사이를 두었다. 남겨진 커피를 마저 마시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 앙상하게 가지를 드 러낸 플라타너스를 내려다 보고, 그것도 모자라 담배까지 피워 물고 나서 야 나는 비로소 마음에 품었던 역설의 요체가 무엇인지를 발설할 수 있었 다. "첫사랑…요?" 입을 반쯤 벌리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는 나를 보았다. 그래서 지금의 젊은이들은 사랑의 순서 따위에 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 지만, 과거의 젊은이들에게는 그 '첫번째' 라는 의미의 고결성이 평생을 좌우할 정도로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걸 일깨울 수 있는 자전소 설을 쓰고 싶다는 게 솔직한 나의 결론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거칠대로 거칠어진 세상, 그 바탕에 어쩌면 첫번째를 중시할 줄 모르는 사회적 풍조가 깔려 있는 것이나 아닌지 모르겠다는 말을 마지막 으로 건네고 나서 나는 더이상 할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건너다 보 았다. "결과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선생님의 의사를 데스크에 전 하겠습니다. 그리고 내부 결정이 내려지는 대로 다시 전화를 드리죠. " 어떤 우여곡 절의 과정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렇든 그날로부터 닷새가 지난뒤 에 나는 신문사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내부 결정이 내려졌으니 이제부터 연재를 준비해 달라고 기자는 다소 고 조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기간은 1999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일년간 고생 좀 해 달라 는 말을 덧붙이고 나서 기자는 전화를 끊었다. 첫사랑. 그렇게 해서 나는 소설가가 된 이후 최초로 자전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세상과 나사이에 가로놓인 거리감과 불화감의 실체를 향해 힘겹고 무거 운 발걸음을 내딛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마음의 정글, 그 가장 깊은 오지에 불가침의 성역으로 자리잡고 있는 에메랄드 궁전을 향하여. 하지만 1999년으로 접어들자마자 이 세계는 예언 적중률 99%가 넘는다는 노스트라다무스의 인류 멸망 예언을 놓고 벌 집을 쑤셔놓은 것처럼 들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과거를 통해 역으로 현실을 되짚어보겠다던 나의 애초 의도는 초장부터 곤욕의 늪으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1999년 안에 지구 최후의 날이 도래한다는데 태무심하게 앉아서 과거를 되새김질하는 일에 열중하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작태란 말인가! 1999년 7월, 세기말이 아니라 종말을 향한 집단적 광기 에 질려버려 나는 연재를 중단하고 동시에 절필 선언을 해 버렸다. 그러고 싶어서 그런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 다시말해 더이상 물러서거나 비켜갈 수 없는 궁지에 몰려 내 스스로 세상과의 소통을 포 기해 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글렀어, 글렀어, 글렀어, 하는 말을 세번씩이나 되풀이하고 나서 서늘한 마음의 냉기를 느끼며 '연재 중단의 변 (辯) , 그리고 절필 선언 ' 이라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작파 (作破)! <박상우 소설가> 참으로 오랜만에, 오후에 나는 명동으로 외출했다. 하지만 나른한 오후이니 전화를 해달라던 하영의 패션숍을 찾아가기 위 해서가 아니라 그녀에게 줄 생일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모처럼 나들이를 한 것이었다. 그녀와 사귀어 온 지난 삼년, 우연하게 명동에 들를 일이 생겨도 나는 단 한번도 '유하영 부티크' 로 들어가 본 적이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그러는 것이 왠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져서 그런 것이었다. 무엇이 좋을까. 그녀의 생일 선물을 고르기 위해 나는 한동안 이 블록 저 블록을 돌아다니며 즐비한 쇼 윈도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악기사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목걸이 형으로 만들어진 앙증맞 은 오카리나를 발견하곤 별다른 망설임 없이 그것을 생일 선물로 선택했 다. "이건 저도 하나 가지고 있는데, 너무너무 맘에 들어요. 한번 불어 보 실래요?" 목걸이 형으로 만들어지긴 했지만, 계산대의 아가씨가 일러주 는 대로 작은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불어보니 맑고 선연한 장조 음계가 정확하게 밀려나왔다. 그러자 1980년대 후반이었던가 1990년대 초반이었던가, 아무튼 맑고 신 비로운 선율을 내는 그 피리소리에 한동안 심취했던 기억이 묵연하게 뇌 리를 스쳐갔다. 가뭇없는 인생의 지문처럼, 문득 듣게 된 선율에서 우러나는 깊고 가슴 저린 추억의 파장 같은것. 선물을 사고 나서 좀 더 명동에 머무를까, 아니면 하영에게 전화를 할까, 그런 걸 망설이다가 나는 보이지 않는 기 류에 떠밀리듯 다소 우울한 심정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내가 명동에 처음 발을 들여놓던 1970년에 중반의 카랑카랑하던 햇살, 그리고 에메랄드 궁전으로 홀연히 사라져버린 한 여인에 대한 아픈 기억 을 곱씹으며 그곳을 배회하던 1970년대 후반의 나른하던 햇살이 기억에서 아프게 되살아나는 것 같아서 였다. 첫사랑 때문에 첫발을 딛게 되었던 명동, 그곳을 무슨 기연으로 나는 여 적 맴돌고 있는 것일까. "내가 남긴 메시지 들었나요?" 집으로 돌아와 채 십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하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들었어. " "근데, 왜 전화하지 않았어요? 오후에 잡혀 있던 중요 한 약속까지 취소하고 내내 전화를 기다렸는데…. " 메시지를 듣고도 자 신에게 전화하지 않았다는게 다소 어이가 없다는 어조로 그녀는 되물었다 . "특별한 이유는 없어. 그리고 외출했다가 좀 전에 돌아왔거든. " "어디요?"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내가 좀체 외출하지 않는다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그녀, 그러니 놀라는 목소리로 되물을 수밖 에. "……명동에 갔었어. " 거짓말을 할 줄 몰라서가 아니라, 그러고 싶지 않아서 나는 사실대로 대답했다. "내 메시지를 듣고 난 뒤에 명동엘 다녀갔단 말예요?" "그래, 그랬어 . 그냥 잠깐 다녀온 거라구. " "……왜요?" 낮게 가라앉은 어조에 그녀 의 불만 어린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명동에 다녀온 이유? 글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특별한 일은 아냐.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하영이도 절로 알게 될 거야. 그러니까 이 런 문제로 감정 상하지 말라구. " "그래두……너무했네요. 난 날씨가 너 무 좋아서 이런 날 함께 북한강으로 드라이브나 하고 왔으면 좋겠다는 생 각을 했던 건데……내가 또 바보 같은 생각을 했나 보군요. " 중간중간 가느다란 떨림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그녀는 힘없이 말했다. "북한강……좋은 소재였는데 정말 미안하군. 하지만 이제 오월 첫날이 니까 아직도 그곳에 갈 수 있는 기회는 많을 거야. " 어째서 오늘, 그녀 가 갑작스럽게 북한강을 떠올렸는지를 나는 비로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일년 열두 달 중 바다빛과 강빛, 그리고 산색이 가장 좋은 달이 오월이 라는 말을 내가 그녀에게 들려준 게 바로 거기, 북한강이 아니었던가. "저녁엔 뭘 하실 거예요?" 마음을 가다듬은 듯 차분해진 목소리로 그녀 는 물었다. "뭐 특별한 일은 없어. 그냥 평소처럼 지내게 되겠지 뭐. 그리고 내일 은 하영이 생일이니까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내 나름대로 구상도 해 둬야지. 안 그래?" "무슨 좋은 계획이라도 있나요?" 오월의 녹빛 북한 강을 처음 관망하게 되었을 때처럼 그녀는 다소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건 모두 다 비밀이야. 하지만 너무 큰 기대는 하지 마. 그리고 정오 무렵부터 나에게 시간을 할애해 줘야 하는데……그럴 수 있겠어?" "그럼요.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요. 오전에 예약된 손님 두 명만 제가 처리하고 나머지는 미스 한에게 부탁해 두면 돼요. 그럼 내일 전화 주실 래요?" "그래, 내일은 내가 전화할게. " 전화를 끊고 나자 왜일까, 빛 한 점 없는 동굴 속을 가까스로 빠져나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와 주고받은 감정의 흐름이 선명하지 못했기 때문, 아니면 내 스스 로 감정을 기만한 것 같다는 불유쾌한 여운이 끈적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 일 터였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생겨나는 타성 때문에 진실이 아니라 기술을 구사해 야 한다는건 얼마나 서글픈 일인가. 하영이 모르는 동안에도 나는 여러 번 북한강엘 다녀왔었다. 서울에서 한 시간 정도 달리면 당도할 수 있다는 거리상의 편의성 때문 이 아니라, 북한강이 지니고 있는 특유의 흐름 속에 내가 지상에서 잃어 버린 모든 것들이 은밀하게 어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려 있는 것, 그러니까 경치와 무관한 무엇인가가 거기에는 분명 깃들 어 있는 것 같았다. 희노애락으로 얼룩지며 한세상 살아가는 동안, 인생의 이름으로 상실하 게 되는 온갖 다채로운 감정의 물무늬가 거기, 녹빛 수면에 은밀하게 아 로새겨져 있는 것 같았던 것이다. 무엇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갓스물이 되던 한겨울, 검붉은 노을이 수면 에서 이글거리던 저녁무렵에 나는 내 영혼의 모태가 되어 준 한 여자와 북한강가에 서 있었다. 너무 짧은 동안에 너무 긴 인생을 살아버린 것 같다고, 이제 조용히 에 메랄드 궁전으로 떠나야 할 시간이 된 것 같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여자… 그리고 온다간다 말 한마디 없이 자취를 감취 버림으로써 여적 나 혼자 그 강변을 떠돌게 만든 여자 때문에 결국은 하영도 기이한 인연 의 덫에 치인 사람처럼 북한강을 보게 된 것이었다. "말로만 간다 간다, 그러면서 언제 가려구요?" 마음이 어지러울 때마 다 한번씩 북한강을 휘돌고 온다는 나의 말을 듣고난 뒤부터 하영은 나를 졸라대기 시작했다. 우연히 뱉은 말이 씨앗이 되고, 그것이 자라 결국 나는 그녀를 북한강으 로 데려가고 말았다. 갓스물에 내가 섰던 바로 그 자리에 카페가 들어섰기 때문에 나는 매번 그 집 창가에 앉아 강을 내려다보며 차를 마시곤 했지만, 하영을 데려가 던 날은 한번도 가 본 적 없는 강 반대편의 찻집을 관망의 터전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다. 나로서는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를 모면하거나,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를 지켜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날 북한강을 내려다보며 하영과 차를 마시는 동안, 불행하게 도 나는 하영의 외관에서 전혀 다른 여자의 환영을 이끌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조바심을 치듯 연해 시계를 보았고, 불과 두어 시간도 지나지 않 아 도망치듯 그곳을 떠나고 말았다. 이제 두번 다시는 하영과 함께 이곳에 오지 않으리라, 이제 두번 다시는 타인과 함께 북한강을 찾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여 다시 현실로 빠져 나온 것이었다. 갓스물에 내가 섰던 강 건너편에서 시종 나를 지켜보던 누군가의 시선, 내가 죽기 전엔 영영 지워지지 않을 그 눈빛. 저녁 여덟시경, 나는 오피스텔 아랫 동네에 있는 '털보네와 짱구네 식당 ' 으로 내려가 순두부 백반으로 저녁을 먹었다. 사십대 중반의 고등학교 동창 둘이 운영하는 작고 깔끔한 식당이었는데 , 간판 이름은 두 사람의 별명에서 따온 것이라고 했다. 회사원이었던 털보씨는 감원 대상으로 명예퇴직하고, 공무원이었던 짱구 씨는 아내가 말세 종교에 빠져 남편 모르게 전재산을 날려벼렸다는 것… . 그것이 두 사람이 함께 식당을 운영하게 된 계기라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 나서 나는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갔다. 그곳은 '털보네와 짱구네 식당' 맞은편 빌딩 일층에 있는 자그마한 술집 이었는데, '로스트 호라이즌 (Lost Horizon)' 이라는 흑백영화를 보았던 오래된 기억이 있어서 시간이 버겁거나 무료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그 곳으로 내려가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시간을 보내다 오곤 했다. 하지만 그 집 주인인 정 마담은 정작 영화는 보지 못하고 제목만 알고 있는 인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나와는 동갑내기에다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래서 술을 마시는 동안 이것저것 눈치 보지 않으며 그녀와 나는 친구 처럼 자연스런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오늘은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노동자도 아니면서, 설마하니 노동절을 기념하기 위해 찾아온 건 아니겠지?" 바 안쪽에 앉아 신문을 읽던 정 마담이 문에 매달아 둔 풍경소리를 듣고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그녀 나름대로 사람을 반기는 방식이었다. "인생의 목적을 잃어 버리고 사는 일도 힘겨운 노동이야. 잔말 말고 커 피나 주시지. " 바를 사이에 두고 그녀와 마주하는 자리에 앉으며 나는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커피를 파는 집이 아니라 맥주나 위스키.칵테일 따위를 파는 집이었지만 , 내가 달라면 그녀는 군말않고 커피를 무료로 서비스하곤 했다. "그러니까 쓰던 소설이나 열심히 쓸 것이지 절필 선언 같은 건 왜 해? 아니… 아니다! 절필 선언이 있으면 복필 선언같은 거도 있어야 할 것 아냐. 까짓 세상, 그렇게 결벽증 걸린 사람처럼 살아봤자 자신만 피곤한 거야. " 커피잔을 내 앞으로 내밀며 누나 같은 표정으로 그녀는 혀를 찼지만, 그녀의 말투에 꽤나 익숙해진 탓에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 았다. 그러자 그녀가 다시 물었다. "하영이는 잘 있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묵묵히 커피를 마시고 나서, 잘 마셨어, 하는 말을 남기고 조용 히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러자 그녀가 문앞까지 따라나와 다소 걱정스럽다는 어투로 엉뚱한 말 한 마디를 내 등에 얹어 주었다. "자신에게 아무리 충실하게 살아도 인생은 어차피 오리궁둥이 같은 거 야. 그러니 이젠 좀 푼더분해져 보라구. " 박상우<소설가> 부드러운 봄밤, 나는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 놓았다. 노량진을 거쳐 장승백이로 진입하는 지점까지 올라가 붉은 신호등 앞에 잠시 서 있다가 오던 길을 되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들어가 진토닉을 한잔 마시고 오피 스텔로 올라왔다. 부드러운 봄밤이 조성하는 일종의 모호함 때문인가, 농밀한 안개 속을 거닐다 돌아온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스피린 한 알을 먹고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할까 말까 망설이던 참, 그 것을 잠시 보류하라는 듯 전화벨이 울렸다. "이본오 선생님, 제 목소리 기억하시겠어요?" 맑고 가느다란, 그러나 깊은 곳 어딘가에 서늘한 냉기를 숨기고 있는 듯한 목소리, 아침에 들었 던 ABS방송국 여자 프로듀서의 목소리였다. "하루가 지나지 않았는데……. 또 전화를 했군요. " 어이가 없다는 표 정을 지으며 나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내일쯤 다시 전화할 거라고 생각하셨던 모양이죠? 전……. 실례되는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의 예상을 깨는 일을 잘해요. 잘 한다 기보다 그것을 즐긴다고나 할까요? 암튼 그래요. 근데 선생님은 지금 뭘 하고 계세요?" "난…… 머리도 좀 아프고 피곤한 것 같아 샤워하고 일찍 쉬려던 참이었소. " 대답을 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그녀가 작전을 바 꾸고 아침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걸 알아 차릴수 있었 다. 본론을 뒤로 미루고 일상적인 대화를 먼저 주고 받음으로써 상대방의 긴 장감을 해체시켜 보겠다, 이건가? "제가 안 좋을때 전화를 드린 것 같군 요. 그냥…… 저도 별볼일 없이 시간을 보내다가 문득 선생님 생각이 나 서 전화를 드린 거예요. 선생님 입장에서는 제가 전화를 건 목적이 보나 마나 업무 때문일 거라고 생각하시겠지만…… 제가 선생님 작품을 다 읽 은 독자라는 사실은 아마 모르고 계실 거예요. 그렇죠?" "그거야 내가 이예린씨와 사사로운 대화를 주고받은 적이 없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뇨? 그리고 지금은…… 내 자신의 결정에 내 스스로 충실하기 위해 철 저하게 개인적인 시간을 가져야 할 시기이기도 해요. 그러니까, 설령 내 작품을 다 읽었다고 해도 별달리 주고받을 만한 얘기가 없다는 거요. 앞 으로는 소설을 쓰지 않겠지만, 이미 발표한 작품에 대해서는 독자와 대화 할 의무가 있다…… 설마하니 그런 생각으로 독자임을 고지하는 것 아니 겠죠?" 무슨 이유 때문인가, 내 말을 듣고 나서 그녀는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뒤에 정말 어이가 없다는 듯 그녀는 이렇게 물었다. "선생님, 설마하니 절 미저리로 취급하시는 건 아니겠죠?" 미저리라는 말을 듣고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내가 그녀에게 지나치게 과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건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소 누그러진 목소리로 나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들렸다면 미안해요. 작년에 겪은 일들 때문에 아직도 감정이 자연스럽지 못해서 그럴 거요. 몸과 마음이 따로 놀며 삐걱거린다고나 할 까……암튼 그런 형국이요. " "삐걱거린다는 표현이 무척 아프게 들리네 요. 삐걱거린다는 건……뭔가 몰락의 조짐을 느끼게 하는 말이거든요. 그 래서 불길한 아픔이 느껴져요. 소설을 쓰지 않으면……그럼 앞으로 어떻 게 살아가실 생각인가요?" "근데 이예린씨는 나이가 몇이요?" 나의 앞 날을 걱정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연민이 가득 담겨 있는 것 같아 문득 떠 올린 궁금증이었다. "전, 스물넷요. " "스물넷인데……피디란 말이요?" 대학 졸업하고 곧 바로 방송사에 입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른다섯이 되어서야 비로소 프로 듀서가 된 고등학교 동창생 하나가 문득 떠올라 나는 놀라는 목소리로 물 었다. "선생님 시절과 달리 요즘 피디들은 전반적으로 상당히 젊어요. 하지만 전 수습기간이 끝난 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첫 발령을 특집제작국으로 받아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제가 뜻한 일을 하게 되었으니 열심히 해 볼 참이예요. 아침에 말씀드렸던 그 다큐멘터리가 바로 제가 연출하게 된 첫 작품인데……이렇게 초반부터 어려움이 많네요. 하지만 뭐 사적으 로 전화를 드린 거니까 오늘은 더이상 그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께 요. 근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실지에 대해서는 아직 대답하지 않으셨죠 ?" "아, 그건……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어요. 명예 퇴직한 다음날부터 곧바로 다른 일에 몰두하기 어렵듯, 매사에는 나름대로 정리해야 할 시간 이 필요한 법이죠. 그래서 지금은 지극히 단조롭게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 어요. 이렇게 지내다 보면 어떤 쪽으로든 길이 열리겠죠 뭐. " "스스로 길을 만들지 않고 자연스럽게 길이 열리길 기다린다……그런 말씀이로군 요. " 음미하듯 그녀는 느린 어조로 내 말을 정리했다. "그렇죠, 자연스럽게. " "그럼 혹시……제가 첫 작품으로 연출하게 된 다큐멘터리가 선생님에게 자연스럽게 열리고 있는 또다른 길은 아닐까요 ?" 그녀의 깜찍한 발상에 나도 모르게 절로 웃음이 나왔다. '첫사랑' 이라는 소설을 중단했더니 '첫사랑' 이라는 다큐멘터리가 새 로운 길로 열린다? 그녀의 논리적 비약에서 반짝이는 재기를 느끼며 나는 무선전화기를 다른 손으로 바꿔들고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발코니 쪽으로 걸어가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개인적으로 걸어온 전화를 이렇게 은근슬쩍 공적인 전화로 바꾸는 것 …… 이런 것도 자연스럽게 열리는 또다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예린씨는 의도적으로 길을 만들고 있는 거고, 나는 이미 그것을 눈치챘으니까 이것은 파울 플레이…… 다시말해 교묘한 반칙 행위가 되는 거요. " "흠, 선생님은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려운 분이시군요 . 하지만 그것이 선생님에게 열리는 또다른 길일 거라는 제 소신에는 앞 으로도 변함이 없을 거예요. 그리고 오늘은 제가 뜻한 만큼의 성과를 얻 었으니 이만 끊을게요. 그럼, 편안한 밤 보내세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발코니로 나가 테이블 앞에 앉았다. 눈부신 햇살이 쏟아지던 한낮과 달리, 녹색 테이블은 이제 검푸른 어둠 의 식탁으로 변해 은밀한 밤의 제전을 기다리고 있었다. 부드러운 봄밤의 저쪽, 강 건너편의 불빛은 이미 제전의 절정을 예고하 듯 한강의 수면으로까지 흘러내려 화려한 춤사위를 뽐내고 있었다. 절정이란, 꺼지기 직전의 성냥불처럼 가슴 저리게 아름다운 것. 무엇이 다가오고 있는 것일까. 오월의 첫날이 막을 내리는 밤풍경을 잠잠한 눈 빛으로 지켜보며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무엇인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어떤 기류가 서서히 그 조짐을 드러 내기 위해 은밀한 태동을 시작한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의 시간. 밤이 숨 기고 있는 흑막의 분위기 때문이 아니라 일종의 에너지로 무엇인가가 연 해 감지되는 것 같아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느끼고 싶지 않다, 적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다, 하고 나 의 몸이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진원지를 알 수 없는 진동은 좀체 잦아들지 않았다. 그것은 지나간 시간의 암층에서 시작돼 현실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 같았 고, 이윽고는 예비된 미래로까지 그 파장을 면면히 이어나가려는 것 같았 다. 인간의 삶이 단지 생명의 시작과 끝 사이를 지나가는 단순한 과정이 아 니라는 것, 그리하여 시간과 시간의 매듭과 연결고리 사이에 은밀한 필연 이 숨겨져 있다는 걸 그것은 오래오래 일깨우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꼼짝없이, 나는 포박당한 사람처럼 진동의 와중에 몸을 맡기고 전혀 다른 종말감 속으로 빠져들어가기 시작했다. 오라, 그리고 내 운명을 옥죄는 이 사슬을 풀라! 오전 열시경, 나는 꽃배달 전문점에 전화를 걸어 서른 세 송이의 붉은 장미를 명동의 '윤하영 부티크' 로 보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축하카드에는 간단히 '그대의 서른 세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라고만 적어 달라고 했다. 근사하거나 감동적인 문구, 아니면 여자의 마음에 깊이 아로새겨질 만한 수사를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화려하고 과장된 것보다 단순하고 담백한 표현이 훨씬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것 같아서였다. 침묵의 방. 꽃배달 부탁을 하고 나서 나는 참으로 오랜만에 서랍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내가 의도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방문 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이 오피스텔의 열린 공간에 할애된 단 하나의 방이었지만, 이사를 와서 짐 정리를 끝낸 뒤부터 나는 그곳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있었다. 접근 엄금의 공간으로 내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그곳은 소설과 연관된 모든 것들, 다시 말해 소설가로 살아온 나의 과 거가 고스란히 저장된 방이었다. 거기에는 병풍처럼 벽면을 덮은 책장, 여러가지 자료 파일, 낡고 오래된 386 컴퓨터, 그리고 집필을 위해 내가 사용한 수십권의 노트가 쌓여 있 었다. 뿐만 아니라 소설가로 살아오며 얻게 된 자잘한 소품과 기념품, 사진과 패널 따위들이 과거의 특정했던 시간을 반영하듯 이곳저곳의 공간을 차 지하고 있었다. 현실로부터 격리된 과거의 분묘에는 오전인데도 푸른 어둠이 넘실거리 고 있었다. 같은 오피스텔에 속하면서도 그 내부의 공기는 무게가 느껴질 정도로 눅 눅하게 가라앉아 있었고, 벽면의 책장에 꽂힌 수다한 서책에서 밀려 나온 특유의 냄새는 곰팡내 못지 않을 정도로 진하게 곰삭아 있었다. 창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거기에다 책장을 놓아 빛을 차단시켜 버렸으 니 15층이라 해도 지하 분묘를 무색하게 할 정도였다. 석연찮은 심정으로 나는 잠시 출입문을 등지고 서 있었다. 잊고 지내던 내면의 물결, 기억을 자극하는 향취, 정서를 뒤흔드는 친화 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불화감이 이내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망설이지 않고 나는 컴퓨터가 놓인 테이블 옆의 책장으로 다가갔 다. 그리고는 거기, 자료 파일들이 꽂힌 책장의 하단에서 필요한 파일 하나 를 찾아냈다. 음식문화 전반에 관계된 자료 파일에서 나는 필요한 레스토랑의 전화번 호를 찾아 메모지에 옮겨 적었다. 작년 봄, 일산에 사는 후배 작가와 한번 가 본 적이 있는 바비큐 스테이 크 전문 레스토랑이었다. 장흥 기산저수지 옆에 위치한 곳이었는데, 시원스럽게 열린 전망과 울창 한 주변의 숲이 인상적으로 내다보이는 곳이었다. 그래서 언젠가 특별한 기회가 생기면 한번 오리라 마음 먹고 레스토랑을 소개하는 안내 팸플릿을 얻어다 자료 파일에다 넣어 두었던 것이다. 방을 나서기 직전, 나는 검푸른 어둠을 머금고 있는 컴퓨터 모니터를 들 여다 보았다. 그것과 마주보고 앉아 보낸 무수한 밤과 낮, 그것과 마주보고 앉아 만들 어낸 헤아릴 수 없는 문장들이 빛바랜 흑백 사진처럼 묵연하게 뇌리를 스 쳐갔다. 하지만 고뇌와 성취, 비상과 추락의 시간이 아로새겨진 내 영혼의 앨범 이라고 믿었던 그곳에는 이제 깊고 깊은 침묵의 그늘이 검푸른 어둠으로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대, 결별의 그늘에서 홀로 빛바래는 추억을 보라. 끝없는 손짓으로 나를 부르는 듯한 모니터가 안쓰럽게 보여 나는 슬그머니 손을 내밀었다 . 그리고는 오래된 추억과 손을 잡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전원 스위치를 눌렀다. 그러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눈부시게 짙푸른 빛이 갑작스럽게 화면에 서 터져 나왔다. 곧이어 내가 남긴 마지막 족적처럼 중도에 집필을 포기한 소설의 파일이 화면의 중앙으로 떠올랐다. 첫사랑 느닷없이 과거의 덫에 치인 사람처럼 나는 불가항력적인 심정이 되어 파일을 열어 보았다. 그러자 작업이 진행되던 마지막 부분에서 커서가 깜박이고 있었다. 매일을 이와같은 상태로 변함없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커서가 연해 깜박거리며 연재를 중단하기 직전의 마지막 부분에다 나의 시선을 비끄러매려 했다. - 선생님……애인 있나요. 기나긴 겨울밤, 잠 못 이루고 몸을 뒤척일 때마다 귓전으로 바람소리가 밀려들곤 했다. 세상을 휩쓸고 가는 듯한 그 공허로운 바람소리 때문에 나는 오래오래 숨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막막했기 때문이었다. 틀림없이 내가 당도해야 할 목적지가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그곳으로 향하는 모든 길이 사라져버린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느 누구도 그 막막함을 밝혀주는 빛이 될 것 같지 않았고, 어느 누구 도 그 사라져버린 길이 되어 내 단절감을 말끔하게 해소해 줄 것 같지 않 았다. 아무에게도 위로받을 수 없는 열여덟, 그래 그때 나는 고작 열여덟이 아 니었던가. 방에서 나오자 마자 나는 장흥의 레스토랑으로 예약 전화를 했다. 그리고 생일인 사람과 동행하니 샴페인을 준비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 그런 뒤에 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열두시 정각에 명동성당 입구에서 만나 자고 했다. 예기치 못한 기습에 상처를 입고 쫓기는 사람처럼, 그리고는 서둘러 집 안 청소를 하고 샤워를 했다. 하지만 과거의 분묘에서 여전히 살아 숨쉬던 과거의 실체는 청소로도 샤 워로도 좀체 지워지지 않았다. 가슴 저린 봄날. 정오에 나는 명동성당 입구에서 하영을 만났다. 그리고는 인근의 유료 주차장으로 그녀와 함께 가 입구에 세워둔 차에 올랐다. 허리선을 잘 살려 주는 지퍼 달린 검정 재킷에 일자형 미니 스커트를 입 고 있어서인가, 나의 안목으로는 그녀가 도무지 서른셋으로 보이지 않았 다. 서른셋은 커녕, 뭔가를 은근히 도발하고 싶어하는 이십대 중반 정도로 밖에는 보이질 않았다. "아침에 보내주신 장미, 정말 고마워요. 지난 밤에는 늦도록 잠이 오질 않아서 우울한 기분으로 와인까지 몇 잔 마셨는데… 아침에 장미를 받고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어요. 상쾌한 소리를 내며 유리잔이 깨지는 듯한 느낌, 아시겠어요?" 핸들을 잡은 나의 손등에다 자신의 손을 얹으며 그 녀는 물었다. "근데, 왠지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 " 바로 앞에서 서행하 는 연두빛 스포츠카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나는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죠, 그게?" 나의 손등에 얹었던 손을 거두며 그녀가 다소 긴장된 목소리로 물었다. "서른 세 송이의 장미 말인데… 아무래도 너무 많이 보낸 것 같다는 생 각이 들어. 그게 잘못된 것 같다는 거지. " "그럼 몇 송이가 적당할 것 같애요?" 낭랑하게 고조된 음성으로 그녀가 다시 물었다. "스물여섯 송이. " "푸, 생일이라고 정치적인 발언하시는 거죠?" "아 니 진심이야. 그래서 지금 생일을 축하하는 독자적인 방법을 구상하는 중 이야. " 푸른 신호등을 기다리며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예를 들자면?" "그런 거, 예를 들 필요는 없어. 주관적으로 행동하면 그만이니까. 오늘 내가 서른 세 송이의 장미를 보낸 건 법적인 나이와 생일을 형식적으로 축하한 거야.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다 그러니까, 그게 석연찮다는 건데… 아무렇든 내년부터는 철저하게 주관 적으로 축하를 해 줄게. " 뒤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를 듣고 나는 재빨리 차를 출발시켰다. "주관적인 축하라면… 제 나이를 맘대로 재단하겠다는 건가요?" "법적 인 나이를 형식적으로 축하하는 게 아니라 인생살이가 반영된 실제의 모 습을 근거로 나이를 측정하고 거기에 걸맞게 축하를 해 주겠다는 거지. 그러니까 일년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해마다 축하받는 나이가 달라질 수도 있다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어?" "금년 생일에 스물여섯처럼 보인 내가 내년 생일엔 사십대처럼 보일 수 도 있다는 뜻인가요?" "그렇지, 바로 그거야! 일년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실제의 인생이 더욱 젊어질 수도 있고 재수 없으면 어이 없을 정도 로 늙어버릴 수도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생일이 될 때마다 지난 일년 동 안의 자기 삶을 주변 사람들에게 평가받게 되는 거지. 그렇게 되면 누구 나 일년 동안의 자기 삶을 소중하게 생각할 것이고,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함부로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무슨 궤 변인가, 말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입가로 웃음이 번져나왔다. "하여튼 늘 생각하는게 너무 엉뚱해요. 만약 그런 식의 생일 축하 방법 이 세상으로 퍼져나가면 생일 노이로제 때문에 정신과를 찾는 사람들, 엄 청 늘어날 거예요. 안 그렇겠어요?" "후후, 노이로제에 걸릴 짓을 안 하 고 살자는 게 이런 축하 방식의 근본 취지야. 어쨌거나 해마다 한살 한살 정해진 나이를 먹는 걸 형식적으로 축하해 준다는 건 너무 단조롭잖아. 가만히 있어도 저절로 먹는 나이가 아니라 어떻게 살았느냐, 혹은 어떻 게 살려고 하느냐, 그런 게 반영된 정신 연령을 축하해 주는 게 훨씬 중 요할 수도 있다는 거야. 간단히 말해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인 나이에 집 중할 필요가 있다는 거지. 세상엔 말야, 십대 중에도 육십대처럼 노회한 사고를 지닌 사람이 있는가 하면, 육십대 중에도 십대처럼 맑고 깨끗한 정서를 지니고 있는 사람도 있어. 내면의 나이랄까. 아무튼 나는 그런 게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는 거야. 이해 돼?" 직선 도로를 달리며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나는 재빨리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럼 자신의 실제 나이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나요?" "나?"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는 한손을 핸들에서 떼고 이마를 짚었다. "난 금년 생일엔 스물여섯이니까…… 오늘 받은 서른세 송이의 장미에 서 일곱 송이를 뽑아낼 거예요. 그럼 됐죠? 그러니까 이제 실제 나이를 고백해 보세요. " "이것 참 야단났군. 내 실제 나이를 알면 하영이가 엄 청 화를 낼 텐데…… 어쩌지?" "괜찮아요. 팔자라고 생각할 게요. " 피 식 웃으며 그녀는 농스럽게 말했다. "정말 미안한데…… 내 실제 나이는 열여덟이야. 열여덟에서 더이상 나 이를 먹지 못하고 정신 연령이 멈춰 버린 거야. " 무심코 말을 뱉다가 진실을 말해 버렸다는 걸 알았다. 내 인생의 아주 중요한 무엇인가가 고스란히 성장을 멈춰버린 나이, 그 게 열여덟이 아니었던가. 아침에 사용하지 않는 방으로 들어가 열어보았 던 컴퓨터 화면, 영원히 아물지 않을 상처처럼 거기서 여전히 깜박거리고 있던 커서가 문득 되살아났다. "왜 하필이면 열여덟이죠?" 아니나 다를까, 다소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하영은 물었다. "그냥…. 그 시절 이후의 삶에서 별로 매력을 못 느꼈던 것 같아. 차분 하게 알 속에 갇혀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래도 그 시절에 지녔던 무수 한 공상과 이 세계에 대한 의구심이 가장 나다웠던 게 아닌가… 그런 생 각이 들어서 한 말이라구. 그러니까 내가 열여덟이라고 말한 건 그 시절 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것이지 지금의 내 상태가 그렇다는 건 결코 아 냐. 아무렴, 지금의 나에게서 하영이가 열여덟의 정서를 느낄 수 있겠어 ?" 순간을 모면하려는 조건반사적 대사, 즉 임기응변. "하긴요…. 반드 시 열여덟은 아니지만 나도 그 무렵의 정서를 그리워 할 때가 참 많아요 . 꿈꾸는 것이 실현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그냥, 꿈꿀 수 있다는 사실 을 마냥 행복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하 려고 해도 되질 않아요. 꿈이 솟아나는 맑은 샘이 가슴에 있었는데…. 그 게 언제부턴가 메말라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갑작스럽게 서글퍼지 곤 하는 거예요. 사람이 이렇게 늙는가…. 지난 밤에도 사실은 서른셋이 라는 나이를 생각하다가 우울해진 건데…. 아무튼 대책없이 나이를 먹는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막막했어요. 서른셋이라는 나이에 대해 나는 도 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한밤중에 선글라스를 쓰고 술을 마셨다 면 그 기분 알 만한 거죠?" 지금 생각해봐도 지난밤의 일이 한심스럽다 는 듯 후우,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나이란 정말 엿같은 거야. 그러니까 사람은 주어지는 나이를 지 나치게 의식하면서 살면 안되는 거라구. 스물 여섯살짜리가 한밤중에 선 글라스를 쓰고 술을 마시다니, 그게 대체 무슨 청승이람. " 나의 열여덟 에 대해 그녀가 길게 물어보지 않는 걸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다소 농스런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위기감 뒤의 안도감 때문인가, 그 뒤로도 그녀는 나이에 대해 뭔가를 더 말했지만 나의 귓문으로는 그것이 밀려들지 않았다. 마흔셋이라는 나이의 껍질 속, 아니 사십 삼 년이라는 인생의 허물 속에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는 열여덟 시절의 애잔했던 정서가 현실의 수면 위로 떠올라 심신을 빈틈없이 사로잡기 시작한 때문이었다. 이 무슨 막무가내의 환기력이란 말인가. 오, 해피 데이. 예약을 해 둔 장흥의 레스토랑에 당도했을 때는 오후 한 시가 좀 지나 있었다. 주변의 자연경관과 레스토랑의 이름이 왠지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 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안내해 주는 예약석에 자리를 잡고 앉자 다툼 질을 하듯 저마다 때깔을 자랑하는 주변의 녹음이 절로 기분을 산뜻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았다. 연산홍과 철쭉, 벚꽃까지 흐드러지게 피어 마치 동화 속의 정원으로 들 어와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들 정도였다. 예약을 하며 생일이라는 말을 해서인가, 테이블 위에는 자그마한 연분 홍빛 생일 케이크가 올려져 있었다. 양초를 꽂기 위해서인듯 나비 넥타이를 맨 웨이터가 생일인 사람의 나이 를 물었다. 그러자 하영이 방싯 웃으며 스물여섯요, 하고 대답했다. 곧이어 웨이터가 양초와 얼음이 채워진 아이스 패일, 두 개의 잔과 샴페 인을 가져왔다. 그러고는 거품을 뿜어올리지는 않되 코르크 마개는 뻥, 하는 소리와 함 께 가볍게 허공으로 날아가게 만들었다. "스물여섯번째 생일을 축하합니다. " 웨이터가 공손하게 하영에게 먼저 샴페인을 따라 주고 이어 나에게도 따라 주었다. 그런 뒤에 바비큐 스테이크를 주문 받고 몇 가지의 추천할 만한 소스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멕시칸 살사 소스, 아메리칸 스테이크 소스, 이탈리안 소스, 마 마 소스 따위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무엇이랴. 골치 아픈 형식 절차를 싫 어하는 나의 입에서 예의 알아서 달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하영이 나머지 선택 과정을 해결해 주었다. 적어도 그녀는 나의 진화되거나 개량될 수 없는 고질적 기호성에 대해서 는 어느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내 생일이라고 이런 곳가지 예약하시고………. 후, 고생스럽죠?" 샴 페인 잔을 맞부딪치고 나서 그녀가 장난스럽게 웃어보였다. "난 영원히 털보네와 짱구네 스타일이야. 오피스텔 밑에 그런 식당이라 도 안 생겼다면 굶어 죽었을지도 몰라. 잘해봤자 오피스텔 일층에 있는 우동집이나 날마다 들락거렸겠지 뭐. " 피자, 햄버거, 핫도그 따위처럼 간편한 식사에 대해 내가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킨다는 말이 아니었다. 문제는 식성이 아니라 정서적인 이질감, 다시말해 익숙하지 않은 걸 싫 어한다는 뜻일 뿐이었다. 전쟁이 발발하거나 천재지변이 일어나서 먹을 게 궁해진다면 나도 당연 히 피자나 햄버거나 핫도그 같은 걸 먹을 수 밖에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고, 조금만 노력한다면 얼마든지 자기 고유의 기호성을 지켜나갈 수 있는 세상이었다. 민첩하게, 세상 변하는 대로 닥치는 대로 내 자신을 바꿔나가고 싶지는 않은 것이었다. "바로 그런 점을 제가 좋아한다는 거 모르세요?" 식사를 하는 동안 하영은 아주 여러 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자신에 게 주어진 현재의 시간에 사뭇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너무 좋아요" 라는 말을 몇번씩이나 되풀이했고, 좋다는 생각에 스스 로 도취한 듯 느닷없이 여행을 떠났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다. 이야기는 저절로 부풀어 구체적인 여행지가 거론되고, 여행 기간이 설정 되고, 패션숍에 관계된 일을 처리하는 방법까지 상정되었다.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다" 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매번 나에게 동의를 구하는 표정을 짓곤 했던 것이다. 그러지 뭐, 그래, 괜찮아. 하영의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아 나는 거의 매번 그런 식의 대답을 건네며 머리를 끄덕이곤 했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었지만, 그녀가 주변 환경과 자신의 현재 상태에 스 스럼없이 심취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말로 여행 계획을 세우고, 말로 여행을 떠나고, 말로 여행지에 당도하고 , 말로 여행지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고 해서 나쁠 게 뭐란 말인가. 그녀의 바쁜 나날이 실제로는 여행을 떠날 수 없게 한다는 걸 나는 훤히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가 그와 같은 가상 여행에 더욱 충실하고 있는 거라 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그녀의 가상여행에 망 설임없이 동참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녀의 생일 여행이 온전하게 마무리 되도록 심정적으로 도와 줘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 영혼을 송두리째 퍼부 을 수 없는 제한된 사랑의 한계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생각하세요?" 식사를 끝내고 레스토랑 아래쪽의 저수지로 내려 갔을 때 그녀는 어느덧 가상 여행을 끝내고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저수지 주변에 마련된 녹색 벤치에 앉아 담배를 피워 물었을 때 던져진 그녀의 질문, 나른한 하오의 햇살이 뒤덮인 수면처럼 이를데 없이 잠잠 한 그녀의 목소리만으로도 나는 그걸 여실히 알아차릴 수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 " 저수지 수면에다 시선을 붙박은 채 나는 중얼거렸다. "이런 질문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는데… 정말 다시는 소설을 쓰지 않을 건가요?" "소설이라니… 이런 자리에서 그런 얘기는 왜 꺼내?" 고개를 돌리자 벤치 뒤편의 떡갈나무에서 흘러내린 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반쯤 뒤덮고 있었다. "그건… 소설을 쓰지 않는다는 게 저와의 관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 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에요. " "내가 소설을 포기한 뒤로 하영이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건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멀리 저수지 뒤편으로 펼쳐진 푸른 산빛을 내 다보며 나는 물었다. "꼭 그런 뜻으로 물은 건 아녜요. 그냥…왠지 모르게 허전한 여백이 두 사람 사이에 자꾸만 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이런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도 꽤 오래 전부터인데…괜히 여러가지로 마음 복잡할 텐 데 나까지 속을 썩이는 거나 아닌가 싶어 말을 하지 않았던 거라구요. " "하영이 눈에 내가 걱정스럽게 보인다는 뜻인가?" "어쩌면 그럴지도 몰라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포기한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막막 한 허전함 같은 게 나에게 전해지고…그러면 나도 덩달아 기분이 허무해 지곤 해요. 구체적으로 뭐가 문제라고 말한 적은 없지만, 그런 것 정도는 나도 얼마든지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리고 그런게 서먹한 거리감이 되 는거…다른게 아니라 그런게 난 괴로운 거예요. " 가늘게 솟아오른 하이 힐 굽으로 땅에다 금을 긋지 못하게 하며 나는 그녀를 보았다. 나무 그늘이 그녀의 얼굴을 빈틈없이 덮고 있었다. "아뇨.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녜요. 우리가 처음 만나던 날 주고받았 던 말…생각나요?난 그냥 자연스럽지 않은 감정을 불편하게 생각하는 것 뿐이에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게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걸 난 아직 도 변함없이 믿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런게 훼손되는 걸 두려워하기도 하 구요. " "그래 하영이가 하는 말,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 하지만 그것이 소설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좀 무리가 있어. 반드시 말을 해야 한다면 …그건 소설에 관계된 문제가 아니고 인생에 관계된 문제일 거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쉽게 입밖으로 꺼내 설명하기도 힘든 거야. 달리 말하자 면 나로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도는 모르겠다는 거지. 뿐만아니라 뭔가를 위해 내 자신을 뜯어 고치기엔 시기가 너무 늦은 것 같다는 생각 이 들기도 해. " "…" "누군가 길을 가다가 지칠 대로 지쳐 버렸어. 그 래서 들판에 누워 망연한 눈빛으로 밤하늘의 별을 올려다보는 심정 같은 거…아니면 갈길을 두고도 멍하니 지는 해를 바라보는 심정 같은거…속 수무책의 심정으로 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거야. 아무리 바라봐도 보 이지 않는 자신을 향한 향수…다른게 아니라 바로 그런게 문제인 거지. " 하영과 내가 '잃어버린 지평선' 에 당도한 건 저녁 일곱시 이십분 경이 었다. 장흥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내가 그곳으로 가자는 제안을 했던 것인 데, 그것이 그리 흔쾌하게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던 모양 그녀는 잠시 망설 이는 기색을 보이다가, "그럼 가볍게 마셔야해요" 하고 단서를 달며 나 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 술잔을 들면 침잠하듯 한자리에 오래 붙박이는 나 의 술버릇을 우려해서 덧붙이는 단서 조항이 결코 아닌 것 겉았다. 자기 생일의 나머지 시간을 나와 단 둘이 오롯이 보내고 싶다는 은밀한 감정의 다른 표현 - 그녀가 나의 오피스텔이나 자신의 아파트로 가고 싶 어한다는 걸 나는 직감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 참, 오늘의 운세가 기막히게 맞아 떨어졌군. " 하영과 내가 안으 로 들어서자 수반에다 꽃을 꽂고 있던 정마담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엉뚱 한 소리를 했다. "왜, 보기 싫은 사람이 나타나서 오늘의 운세가 꼬인대. " 바 앞에 놓 인 높은 의자를 끌어내 하영을 앉게 한 다음, 나는 선 채로 정마담에게 이기죽거리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래, 이것 좀 봐. 말하는 걸 들어보니 더욱 기막히게 맞아 떨어지는 것 같네. " 보라빛 수건으로 손에 묻은 물기를 닦아내며 정마담은 장난 스런 표정으로 하영을 보았다. "그러니까 정말 궁금해요. 오늘의 운세가 저하고도 무관한 게 아니라는 뜻이죠?" 바 위에다 핸드백을 올려놓고 나서 하영이 물었다. "좋아, 우리 하영씨가 궁금해 하니까 뜸 들이는 일을 이쯤에서 그만두 지. 신문에 난 오늘에 내운세는 이런 거였어. 동료의 협조로 소득을 올리 고 대접을 하려다 오히려 대접을 받는다…. 어때 이 정도면 오늘밤에 내 게 기분 좋은 일들이 일어날 만 하겠지?" 갸름한 얼굴에 인생의 관록이 깃든 듯한 눈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정마담은 하영에게 동의를 구했다. "이거야 정말, 아전인수의 극치로구만. 이것 보라구, 신문에 난 거라면 보나마나 오팔년 개띠의 운세일텐데 그것이 정마담에게만 적용된다는 보 장이 어디있어?나두 같은 띠라는 걸 잊은 거야?역으로 말하면 그것이 오 늘밤 내 운세가 될수도 있다구. 들어보니 잘만하면 공짜술 마시게 될지도 모르겠군. " 기분좋은건 오히려 나라는 표정으로 나는 정마담을 보았다 . "이런, 이런…. 천기를 잘못 누설했구만. 지금까지는 운세에 대한 기대 감으로 시간을 잘 보내고 있었는데, 여기서 한 순간에 꼬여 버리네. 근데 왜 그렇게 있는 거지?" 수반을 바 끝쪽으로 옮겨놓고 나서 바짝 약이 오른 표정으로 정마담이 물었다. "아, 난 잠깐 올라갔다 올게. 차를 갖다 두고 와서 편하게 마시려구. 그 러니 내가 다녀올 동안 이 아가씨 좀 잘 보살펴 줘. 오늘이 스물여섯 번 째 생일이니까 평상시처럼 얼렁뚱땅 대하지 말고 특별하게 대해 달라 이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알아서 하라는 표정으로 나는 오른손 검지 를 곧추 세워 정마담을 겨냥했다. "아니 내가 언제 하영씨를 얼렁뚱땅 대했다는 거지?그리고 스물여섯 번 째 생일은 또 뭐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고 이어 하 영을 보았다. "그건 내가 다녀올 동안 여기 앉아 있는 이 공주님에게 물어봐. 그럼 인생을 새롭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될 거야. 뿐만 아니라 오늘의 운 세 같은 것으로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 하는 일도 없게 될거야. " 가볍게 손을 들어보이고 나서 나는 밖으로 나왔다. 불과 몇 분밖에 지나질 않은 것 같은데,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들어갈 때보다 날빛이 훨씬 어둑어둑해진 것 같았다. 오피스텔 지하 주차장에다 차를 주차시키고 일층으로 올라와 오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닐곱 번 쯤 신호가 간 뒤에야 비로소 그는 전화를 받았다. "도대체 뭘 하고 있었길래 전화를 이리 늦게 받아?" "발코니에 누워 있었어요. " 하루종일 말을 하지 않은 듯 그의 성대는 깊이 가라앉아 있 었다. "발코니에 누워서 뭘해?" "그냥…. 오후 내내 그러고 있었어요. 별달 리 할 일도 없고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송장처럼 조용히 누워만 있었어 요. " "그럼 술이나 한잔 하지 그래. " "술요?" 술을 한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갑작스럽게 한 옥타브쯤 높아진 목소리로 그는 되물 었다. "사실은 오늘이 하영이 생일이야. 그래서 낮에 식사하러 장흥에 갔다가 지금은 정마담집에 와 있어. 차를 갖다 두려고 잠깐 올라온 거라구. " "그럼, 그냥 내려 가요. 지금 내 기분이 남을 축하하는 자리에 갈 만한 상태가 아니거든요. 괜히 이런 기분으로 내려가서 다른 사람 기분까지 어색하게 만들고 싶진 않네요. 그냥 혼자 있을 테니 내 걱정일랑 접어 두 고 하영씨와 즐겁게 지내고 와요. 이러고 있다가…. 그래요, 혹시라도 마 음이 변하면 내려 갈게요. " 도리 없겠다는 생각으로, 그래 알았다, 하고 말하고 나서 나는 전화를 끊었다. 사람은 때때로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더욱 멀어지고 싶어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지상의 모든 고뇌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 고, 지상의 모든 고뇌를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고 해도 그것을 거부하지 않는 존재 - 진정한 개인이란 이 세계의 모순을 자신의 고뇌로 자학할줄 아는 존재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기애의 혓바닥과 배타적인 이빨만 발달한 기형적인 개인들이 어찌 그 와같은 자학의 세계를 감지할 수 있으랴. "지금 나는 이본오가 오지 않 았으면 더 좋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는데, 하필이면 이런 순간에 나타날 게 뭐야?" 바를 사이에 두고 하영과 마주앉아 사이좋은 자매처럼 맥주를 마시던 정마담이 나에게 뭘 마시겠느냐고 물었다. 진토닉을 좀 진하게 달라고 하고 나서 나는 하영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 았다. 작은 것이긴 했지만, 바 위에는 어느새 두 개의 빈 맥주병이 옆으로 밀 려나 있었다. "내가 오지 않았으면 뭐가 더 좋았을 거라는 거지?" 담배를 피워물고 나는 정마담에게 물었다. "흠, 오늘이 하영씨 생일이니까 인생 강의를 해 주려던 참이었지. 아니 인생 강의가 아니라 남자 강의라고 하는 게 더 낫겠군. " "정마담, 남 자에 대해 뭘 아나?" 진토닉을 단숨에 반쯤 마시고 나서 나는 다소 심드 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라? 날 아주 우습게 보시는군. 내가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한 경력자 라는 거 몰라? 그 정도면 남자들의 미주알과 고주알까지 다 알게돼 있어 . 신물이 나서 그렇지.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미간을 잔뜩 찡그리며 담배를 피워물었다. "무슨 궤변이야? 이혼을 세 번씩이나 했다는 건 정마담이 남자를 제대 로 몰랐다는 증거이기도 해. 제대로 알았다면 한번의 결혼만으로도 족했 을 거라는 거지. 안 그래?" 반쯤 남겨진 진토닉 잔을 마저 비우고 나는 빈잔을 정마담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고는 좀더 진하게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왜 그렇게 빨리 드세요? 가볍게 마시기로 했잖아요. " 하영이 바 밑 으로 손을 뻗어 내 다리 위에다 손을 얹으며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술이 아니라 음료수를 만들어 주니까 그렇지. 이집 주인이 진과 토닉 워터의 배합 비율을 전혀 모르는 모양이다. "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나는 다리 위에 얹혀진 하영의 손을 잡아 주 었다. "자!그럼 알아서 타 마셔." 짜증난다는 표정으로 정마담이 양손에 들고 있던 진과 토닉워터를 병째 바 위에다 올려놓았다. 그러자 하영이 빈잔을 자기 앞으로 옮겨 손수 진토닉을 만들기 시작했다 .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정마담이 푸,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입을 열 었다. "저러니 이본오 눈에 스물여섯으로 보일 수밖에 없지. 내가 남자에게 저 정도만 싹싹하게 굴었어도 오늘날 이렇게 술장사로 연명하지 않았을 텐데…이 지랄스런 성질머리 때문에 난 도무지 남자 농사가 안돼. 도무지 되는게 없다구. " "이거 또 왜 이러시나. 자, 술이나 마시자구. 오늘은 하영이 나이가 무려 일곱살이나 줄어든 특별한 날이니까 다른 건 몰라도 신세타령만은 하지 말자구. " 정마담의 심사가 갑자기 우울하게 가라앉 는 것 같아 나는 두 사람 모두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말은 거침없이 해도 정마담이 무척이나 감정이 풍부한 여자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녀가 명문여대 서양학과를 졸업하고 세번씩이나 결혼에 실패하게 된 아픈 인생 경력에 대해 내게 심심찮게 털어놓았었기 때문에 나 몰라라 할 만한 처지가 아니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통할 만한 인간적 교감 같은게 그녀와 나 사이에는 형 성돼 있었던 것이다. 잠시뒤, 실내 안쪽의 테이블에 앉아서 술을 마시던 젊은 남녀가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서빙을 하는 여자 아르바이트생이 테이블을 치우고 빈병과 컵, 안주접시 와 재떨이 따위를 쟁반에 담아와 정마담에게 넘겼다. 정마담이 그것들을 정리하는 동안, 하영은 촉축하게 습기가 밴 듯한 눈 빛으로 말없이 나를 보았다. 그 눈빛을 보며 나는 반사적으로 그녀와의 섹스를 떠올렸다. 떠올린 게 아니라 어느 순간부터인가 염두에 두고 있던 당연한 절차가 비로소 수면위로 부상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잃어버린 지평선' 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나와 단둘이 있고 싶다 , 하는 걸 그녀는 습한 눈빛으로 내게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근데, 하영씨는 결혼 생각 없어?" 정리를 끝낸 정마담이 다시 자리에 앉아 담배를 피워물며 엉뚱한 질문을 하영에게 건넸다. "결혼…요?" 당황한 표정으로 하영은 나를 보았다. "여자들 심리라는 게 뻔한 건데, 하영씨라고 해서 그런 문제에 초연할 수는 없는 거잖아. 게다가 이 별 볼일 없는 친구를 꽤나 사랑하는 눈친 데 결혼생각을 한번도 안해 봤다면…글쎄, 그말을 곧이 들어줄 사람이 있 을까?" 말하지 않아도 속내를 훤히 꿰뚫어 볼 수 있다는 눈빛으로 정마 담은 하영을 보았다. "여자들 마음이 뻔한 거니까… 그럼 제 마음을 안다고 가정하고 조언을 좀 해 주세요. " 말을 하고 나서 하영은 맥주를 두어 모금 마셨다. 자신의 속내를 밝히는 일이 거북살스러워가 아니라 옆에 앉은 나를 의식 해서 대화의 전개 과정을 한 단계 건너 뛰고 있는 것 같았다. "실패를 세번씩이나 한 내가 조언을 하면 옆에 앉은 사내가 또다시 나 를 비웃겠지?그러니 조언 같은 건 접어 두고 내가 터득한 남자 식별법에 대해 말해 주지. 이것저것 말 할 필요도 없이 이본오라는 인간에 대해서 만 말하면 하영씨에게 도움이 될 거야. 내가 보기에 하영씬 너무 착하고 , 착하기 때문에 남자에 대해 환상을 지니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이본오 에 대해서도 제대로 모르고 있을 거라는 거지. "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힐긋, 미묘한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어떤식으로 말해도 괜찮아. 나도 듣고 싶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말하 라구." 한 손으로 턱을 괴고 나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 앉아 있는 남자, 결코 쉬운 남자가 아니야. 그리고 이유를 말한 적은 없지만, 사람을 쉽게 사랑하지도 못하고 세상을 쉽게 살지도 못해 . 남자들 중에는 아주 간혹, 사랑에 대해 자신이 마음의 불구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런 유형에 속한다는 거지. 그런 남자 를 만나면 여자가 마음 고생을 무척 많이 하게 돼. 왜냐하면 사랑을 하면 서도 그런 남자는 전혀 다른 세상을 저 홀로 따로 살아가거든. 아무리 같 이 있어도 같이 있는 것 같지 않으니 어떤 때는 유령하고 같이 있다는 느 낌이 들기도 한다는 거지. 그런 게 여자로서 얼마나 견디기 힘든 고통이 라는 거…하영씨도 알지?" 정마담의 물음에 하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엔가 깊이 침잠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다소곳하게 바 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발설자인 정마담마저도 자기 말의 환기력 속으로 빠져들어간듯 사뭇 몽롱한 눈빛으로 바에 올려 진 맥주병에 시선을 붙박고 있었다. 마음의 불구? 다시 한잔의 진토닉을 만들어 마셨지만 취기는 좀체 느껴 지지 않았다. 마음의 불구, 라는 말에 심신이 빈틈없이 제어당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 각이 들 정도였다. 답답해서 다시 한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그런뒤에 나는 짧은 치마 밑으 로 드러난 하영의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렇게 해서라도 뭔가에 집중을 하고, 그렇게 해서라도 현실의 질감을 느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손을 뻗어 그녀의 흰 다리 위에 얹었을 때, 반응하듯 조심스럽게 내쪽으 로 고개를 돌리며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그만 가요. " 오피스텔로 들어서자마자 하영은 샤워를 하기 위해 욕실로 들어갔다. 그동안 나는 담배를 피우며 위스키를 한잔 더 마셨다. 일종의 마비가 필요한 시간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는데, 웬지 오늘은 그것 마저도 제대로 되어주지 않는 것 같았다. 섹스가 민감하게 진행되는 거라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나는 심리적으로 마비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섹스를 하는 동안의 사념만큼 사람을 서늘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냉각 제가 어디 다시 있으리. 그래, 마음의 불구를 잊기 위해 취하는 게로구나 하영이 욕실에서 나올 때까지 나는 내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부정하기 어려운 증거처럼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섹스를 한 적이 별로 없다는 기억까지 되살아 났다. 맨정신으로 사랑의 행위를 나눌 수 없는 상대를 진정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잇는 건가?샤워기에서 폭우처럼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를 온몸으로 맞 으며 나는 내 자신에게 물었다. 하지만 대답 대신 나의 입에서는 무엇을 향해서인지도 모르게 연해 빌어 먹을, 빌어먹을, 하는 말이 터져나왔다. 빌어먹을! 샤워를 끝내고 나왔을 때 하영은 불을 끈 어둠 속, 벽쪽에 붙 여 놓은 소파에 알몸으로 앉아 있었다. 커튼을 걷어놓은 발코니 쪽에서 밀려든 검푸른 빛에 젖은 그녀의 육체를 향해 나는 말없이 다가갔다. 그리고 잠시 소파 앞에 서서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는 그녀를 내려다 보 았다. 언제나와 마찬가지, 성적인 긴장감으로 그녀의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돼 있다는 걸 어둠 속에서도 나는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녀 자신을 스스로 자극하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철저하게 수동적이었지만, 그것이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방식이 라는 걸 스스로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허리를 굽히고 물을 퍼올리듯 양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들어올렸다 . 그리고 그녀의 이마와 뺨에 입맞추고 이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촉촉하게, 아직 물기가 가시지 않은 그녀의 입술에서는 싱그러운 오이 향내 같은 게 맡아졌다. 한쪽 무릎을 꿇어 소파 앞에 앉으며 나는 오른팔로 그녀의 허리를 감고 왼팔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그리고 반듯하게,가늘고 긴 그녀의 몸을 소파에 눕혔다. 하지만 진찰대로 올라가 누운 환자처럼 그녀의 몸은 아직 팽팽한 긴장감 으로 경직된 상태였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마지막 시술을 감행하는 의사 처럼 그녀의 몸에 대해 본능적으로 강렬한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소파에 반듯하게 누운 그녀의 알몸, 내 손길 닿은 곳마다 서서히 체온 이 살아나기 시작했다. 얼굴과 목선을 따라 부드러운 젖가슴에 이르고, 거기서 나는 모성을 그 리워하는 아이처럼 한동안 머뭇거리며 자그마한 유두와 젖꽃판을 만지작 거렸다. 그러자 흐흠, 하는 신음을 가까스로 속으로 삼키며 그녀는 허리를 꿈틀 거렸고, 곧이어 나의 머리를 힘주어 감싸안았다. 깊고 푸른 오월의 봄밤, 어디선가 짙은 훈향이 날아와 정신을 몽롱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녀의 매끄러운 살갗에 촉촉하게 습기가 배어났을때, 나는 그녀의 몸을 들어올려 침대로 옮겨 눕혔다. 그녀의 온몸은 이제 특유의 긴장감에서 풀려나 팽팽한 기대감으로 부풀 어 오르고 있었다. 그러자 서른 세 송이의 장미, 그 하나 하나의 꽃잎이 피처럼 낭자하게 떨어져 그녀의 몸 아랫쪽에서 자극적인 향기를 밀어올리는 것 같았다. 그것을 연상으로 흡입하며 나는 그녀의 몸이 아니라 향기의 근원을 향해 천천히 내 자신을 밀어넣기 시작했다. 집중하라. 언제나처럼 내 속의 누군가가 은밀하게 내게 권고했다. 나의 동작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그녀에게 집중하고, 그것을 또 다른 집 중력의 연료로 삼으라는 오래된 가르침 이었다. 몸은 절대로 정신을 벗어날 수 없으되, 집중할 수만 있다면 몸의 가능성 이 오히려 정신을 고양 시켜줄 수도 있으리라. 서두르지 않고 한 동작 한 동작, 나는 현실과 과거와 미래의 어느 곳에선가 자극적으로 밀려나오 는 듯한 향기의 근원을 향해 차분하게 굴신해 들어갔다. 지금은 모르겠으나, 나의 집중력은 끈덕지게 그것 만을 의식하고 있었다 . 어떤 순간에도 인간의 정신과 육체, 그것의 합일에 우주적인 기운이 충 당되어야 한다는 걸 부정해서는 아니 되는법. "무슨 새소리가…어디서… 들려요. " 하영의 입이 열리고 거기서 그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하는 말 들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지금 어느 지점에 이르러 있는지를 일깨워 주는 일종의 자동 기술 처럼 그녀의 신음과 같은 말에서는 언제나 기이한 주술성이 느껴지곤 했 다. 그녀가 그녀 자신을 벗어나는 순간 그래서 언제나 그 지점쯤에 이르게 되면 나는 육신이 느닷없이 팽창하고 정신의 일정 부분이 말끔하게 탈색 되는 듯한 충격에 사로잡히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집중력의 결과, 다시말해 육체와 정신이 타산의 영역을 포기하고 행복한 공분모를 형성한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진정한 합일은 서로를 망각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 "구름이 흘러가 고…소나무가 보이는데…따뜻한 비가 내려요. " 그녀의 주술이 절정을 향해 치솟아 오르는 동안 나의 눈앞에서는 푸른 섬광이 어른거리기 시작 했다. 내가 한줌의 모래로 스러진다 해도 지금 이 순간의 집중력을 포기하지는 않으리라. 이를 악물고 어딘가, 나는 내 뿌리가 마지막으로 가닿을 곳을 강렬하게 예감하기 시작했다. 질감이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지층의 어디쯤, 거기서부터 나는 다시금 현 실감을 회복할 수 있을 터였다. 그리하여 푸른 섬광이 허공에서 낙차 큰 포물선을 그릴때, 비로소 나와 합일한 한 여자가 어둠속에서 온몸을 떨며 신음하는 소리가 귓전으로 밀 려들었다. "아, 이런 순간에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 밤 열한시가 가까워지는 시각, 하영과 나는 발코니에 앉아 있었다. 섹스와 다시 한번의 샤워, 그리고 성적인 긴장감이 지나간 뒤의 망연한 평온함이 그녀와 나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는것 같았다. 원근으로 내다보이는 모든 것들이 왠지 모르게 무위롭게 느껴지는 시간 이었다. 끊임없이 다리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차량의 행렬 밑으로 묵묵히 흘러가 는 강, 그 먹빛 수면밑에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깊고 깊은 밤의 심연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날카로운 은유처럼 번들거리는 수면의 불빛, 그것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향한 질타이거나 힐난의 말로 오래전부터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너희들, 인생이 뭔지 알고나 사느냐? 한동안 말없이 앉아서 밤풍경을 내려다보던 하영이 커피를 마시겠느냐고 문득 나에게 물었다. 그러마고, 담배를 피워물며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젖은 듯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가는 희끄무레한 봄밤, 고개를 들고 허공 을 올려다 보았지만 별은 보이지 않았다. 뜨거운 두 잔의 커피가 녹색테이블 위에 올려지기 전, 귀에 익은 슈베르 트의 소나타가 실내에서 먼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런 뒤에 작은 쟁반을 손에 든 하영이 다시 발코니로 나왔다. "저녁무렵부터 커피를 마시고 싶었는데, 이제야 마시게 되네요. " 머 그잔 하나를 내 앞으로 건네며 그녀가 말했다. "이건, 그래도 명목이 있는 커피로군. " "명목이라뇨?" 머그잔을 입 술에 댄채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보았다. "정사가 끝난 뒤의 커피잖아. " "그럼 좀전에 태운 담배는 정사가 끝 난 뒤의 담배인가요?" "그래, 예전에 그런 제목의 샹송이 있었는데…영 화주제가였던가, 잘 모르겠어. 아무튼 '정사가 끝난 뒤의 담배' 였어. " 그녀와 나는 다시 밤풍경을 내려다보며 뜨거운 커피를 마시기 시작했다 . 정사가 끝난 뒤의 담배, 정사가 끝난 뒤의 커피, 그리고 정사가 끝난 뒤 의 침묵…세상은 밤을 배경으로 한 무언극의 무대처럼 그녀와 나로부터 아주 먼 곳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세상의 가속력에서 튕겨져 나왔지만, 이제 두번 다시는 그것을 좇아가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그녀와 나는 잠잠한 침묵으로 정사가 끝난 뒤 의 평온을 즐겼다. "우리는 평생을 이런 식으로 사는 건가요?" 어는 순간인가, 머그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차분한 음성으로 그녀가 물었다. "이런 식이라니, 어떤 식을 말하는 거지?"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 고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렇게 며칠에 한번씩 만나서 식사하고, 술 마시고…그리고 정사를 나 누는 관계요. " 나는 그녀를 보고 있었지만 그녀는 내쪽으로 돌리지 않 고 여전히 밤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식이 아니라면, 달리 어떤 방식이 있지?" "아까, '잃어버린 지 평선' 에서 장마담의 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꺼내는 건 결코 아 니에요.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다른 방식을 꿈꾸고 있었는지도 몰 라요.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항상 서로에게 상처 주지 않기 위 해 노력하는 것도 좋지만…이런 방식에는 뭔가, 사랑 자체를 경계하게 만 드는 무서운 형식이 도사리고 있는 것 같아요. 사랑하는 사람도 일정한 정도이상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넘을 수 없는 경계선 같은거요. " 느리 고 둔중한 피아노의 건반음이 차츰 빨리지고 있었다. "그 넘을 수 없는 경계선을 만든 사람이 나라는 얘기로군. " 그제서야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하는지, 그 속내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 았다. 내가 유지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정확하게 감지하고 그것을 그녀는 문제 시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유지되어야 할 일정한 거리를 경계선으로 인지하고 , 그것을 넘어가고 싶다는 욕망으로 인해 자신이 철조망에 찔려 홀로 피 흘리고 있다고 절망하게 되는 시기. "내 말은, 경계선을 만든 사람을 탓 하는 게 아니에요. 사람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흘러가지 못하게 하는 어떤 지점에서 더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갇혀 있는 것 같다는 답답함…그런 걸 말하는 거죠. " 그럼 하영이가 말하는 다른 방식이란 어떤 거지?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나는 물었다. "집요하게 거리를 유지하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하면 뭣하겠 어요. " 몇번인가, 도리질을 하듯 머리를 가로저으며 그녀는 힘없이 말 했다. "이런거, 우리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서로 공감했던 부분들 아 닌가?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를 소유하려는 순간이 바로 그 상대를 잃어버 리게 되는 출발점이라는 거…생각 안나?" "아뇨 사람을 소유하고 싶다는 뜻이 아니에요. 단지 사랑의 감정이 자연스럽게 진전되지 못하는 걸 불 만스러워 하는 거죠. " "말이 무척 어려워지는군. 지금까지 하영이와 내가 유지해 온 이런 방식 이 완벽한 건 아니라 해도, 이런 방식에 대해서는 하영이도 처음부터 호 감을 느꼈었잖아. 만약 그 부분에서 처음부터 두 사람이 어긋났었다면, 그랬다면 무슨 수로 지금껏 이런 관계를 유지해 올 수 있었겠어. 만약 지 금보다 더 나은 방식이 있었다면 나도 당연히 그것을 실행하려고 노력했 을거야. 하지만 세상을 살면서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사랑을 하는 방식은 외형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는 천편일률적인게 현실이야. 그 런 건 나도 짜증스럽고 답답하다고, 기상천외하고 불멸을 닮아 있는 사랑 의 방식이 있을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말을 하고나서 후,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는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런 뒤에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쉬 었다. "화내지 마세요. 이러자고 꺼낸 얘기가 아니니까요. 난 그저… 서른세 번째의 생일에 아주 중요한 고백을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리고 뭔가, 내가 느끼는 사랑에 대해 아주 원초적인 대답을 듣고 싶었을 뿐이에요. "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녀는 고개를 숙이고 연해 자신의 손을 만 지작거렸다. "내 말이 화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면 미안해. 다만 '방식' 이라는 말 자체가 거북스럽게 느껴졌을 뿐이야.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건,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방식만으로 되는 건 아니잖아. " "그래요, 그래서 뭔가 를 가슴으로 느끼고 싶었던 거에요. 나를 만난 이후… 나에게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는걸 알고 계시나요? 평상시뿐만 아니라 정사를 나누는 동안에도 나는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어요. " 고개를 들고 그녀는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사랑한다는… 말?" 정곡을 바늘로 찔린 사람처럼 나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래요, 사랑한다는 말.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그런 건 감정이 자연스 럽게 밀어올려주는 말이 아닌가요? 이런 걸 물어야 하는 여자의 심정이 얼마나 절망스러운지… 아마 모르실거에요. 내가 왜 이런 걸 물어야 하는 거죠?" 다시 고개를 돌리고 멀리, 그녀를 깊어가는 밤풍경에다 눈길을 주었다. "묻게 만들었다니 할 말이 없군. 정말 할 말이 없어. " 그래, 무슨 말 을 할 수 있으랴. 내가 그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번도 하지 않았던 것은 결코 우연의 결과가 아니었다. 다시 말해 무심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은게 아니라, 그런 말을 입밖으로 꺼낼 수 없는 감정적인 제어력이 집요하게 나를 사로잡고 있었던 것이다 . "한 가지만 묻고 싶어요. " 침묵이 버겁게 느껴질 무렵, 서늘하게 가라 앉은 목소리로 그녀가 입을 열었다. 불빛이 너울거리며 춤을 추는 강에서 시선을 거두고 나는 말없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 다. "저랑 결혼할 수 있나요?" 컥,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온몸의 기 가 질리는 걸 느꼈다. 그녀가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발설한 것이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이 나에게는 금기에 대한 도발적인 언사로 들렸다. 그래서 다음 순간, 나는 본능적인 긴장감을 느끼며 자세를 고쳐앉았다. 단순하게 지나칠 수 없는 말, 다시 말해 적당히 넘어갈만한 상황이 아닌 것 같다는 반사적인 위기감 때문이었다. "왜 그렇게 놀라시죠? 제가 못할 말을 한건가요, 아니면 해서는 안될 말을 한건가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이런 걸 물을 수 있는 것도 자연스런 감정의 흐름이라고 난 생각해요. 아닌가요?" 시선을 조금도 흐트러뜨리 지 않고 그녀는 나를 보았다. "왜, 갑자기 그런 걸 묻지?" "갑자기 생겨난 감정이 아니에요. 며칠에 한번씩 만나서 식사하고, 술 마시고, 정사를 나누는 관계가 답답하게 느 껴질 때부터 줄곧 그런 생각을 해오고 있었어요. 그런 감정의 진전이 이 상한 건가요?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고 싶다는 거, 난 조금도 이상하거 나 잘못된 감정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 "이상하다고 말하는게 아냐. 내 말은…. " "아뇨, 됐어요. 다른 말은 하지 않아도 돼요. 그냥 내가 물은 말에만 대답해 주세요. " 쓸데없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 하는 듯 한 표정으로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후, 정말 점점 더 어려워지는군. 난, 하영이가 그런 문제로 은밀하게 고심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하질 못했는데… 의외로군. " 내 말에 그녀 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오직 한가지, 자신과 결혼할 수 있는지에 대한 대답만 듣고 싶다는 결연한 의지를 강조하는 것 같았다. 어쩌다가 이런 문제에 봉착하게 된 것일까, 나도 모르게 절로 한숨이 새 어나왔다. 하지만 어차피, 언젠가 한번은 마주쳐야 할 문제라면 차라리 관통하는게 나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번 자세를 고쳐앉았다. 남겨진 미래 전체를 걸어야 하는 문제에 어떻게 적당한 대답을 건넬수 있으랴 "원한다면 대답을 하지. 난, 결혼할 수 없어. " 나의 대답을 듣자마자 그녀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휑하니 안으로 들어가고 단 몇 초만에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 짧은 동안의 파행에 넋을 잃은 채,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가. 나는 망연한 표정으로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다. 내가 건넨 대답은 솔직 담백한 것이었지만 그것이 그녀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였는지를 되새겨볼 겨를도 없이 그녀는 바람처럼 오피스텔을 빠져 나가 버린 것이었다. 여자나이 서른셋, 결혼에 대한 히스테리가 시작되는 연령인가? 한참이 지난 뒤에야 나는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다급한 심정이 되어 그녀가 지나쳐간 흔적을 따라가기 시작했 다. 하지만 엘리베이터를 타고 일층으로 내려가고, 오피스텔 현관 앞까지 나 가봤지만 하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나는 정원이 조성된 마당으로 허청허청 걸 음을 옮겨 놓았다. 주변에 세워진 나트륨등에서 쏟아져 내리는 불빛을 받고 있는 관상수와 화단의 꽃들. 그리고 자연스럽게 얹혀진 화강암을 따라 나의 시선은 경 사진 언덕길로 이어져 나갔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가.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듯 발걸음은 끝 끝내 시선을 따라가지 않았다. 어쩌란 말인가. 한참을 서 있다가 도리 없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등을 돌렸다. 오피스텔 현관 대리석 계단이 끝나는 지점에 낯선 여자가 혼자 서 있었 다. 내가 밖으로 나올 때는 보이지 않았었는데 내가 언덕아래쪽을 내려다보 는 걸 시종 지켜보고 있었던 듯한 자세로 그녀는 묵묵히 나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래서인가 뭔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순간적으로 뇌리를 스쳐갔다. 뿐만아니라 그것을 확인시켜 주기라도 하듯 그녀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 와 내가 서 있는 마당 한 가운데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본오 선생님이시죠?" "…" 물끄러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나 는 여자를 주시했다. 스물너댓쯤으로 보이는 얼굴에 아무런 규칙도 없이 멋대로 자른 듯한 커 트머리 그리고 헐렁한 셔츠위에 감색니트를 걸치고 보기좋게 물이 바랜 청바지를 입은 차림새… 누구인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얼굴인데도 그녀 는 나로 하여금 미묘한 흡인력 같은 걸 느끼게 했다. "제가 누구인지 궁금하시죠. " 어색한 표정으로 그녀는 아주 조금 웃 어 보였다. "나는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데… 언제 만난 적이 있었던가요?" 전생 의 기억을 더듬는 사람처럼 사뭇 난감한 표정으로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보았다. "제가 바로 이예린이예요. 놀라셨죠?" "…" 하영을 찾으러 나왔다가 엉뚱하게도 이예린을 만나게 되는 상황, 그게 너무 황당하게 여겨져서 나 는 멍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이렇게 불쑥, 그것도 밤늦게 나타나서 정말 미안해요. 근데, 누굴 찾 으러 나오신 모양이죠?" 당돌하게 느껴질 정도의 눈빛으로 그녀는 내 얼 굴을 주시했다. "찾으러 나온 건지 따라나온 건지, 나도 잘 모르겠소. " "어떤 여자분 이 내가 타고온 택시를 타고 내려갔는데…그분인가?" 혼잣말처럼 나직하 게 그녀는 중얼거렸다. "근데 이렇게 늦은 시간에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뭐죠?만약 이 오피 스텔에 다른 볼일을 보러 왔다가 우연히 나를 발견했다고 말할 작정이라 면 들은 걸로 하고 그냥 들어가겠소. " "아니 그럴 생각은 없어요. 다 른 볼일을 보러 온 것도 아니고 우연히 선생님을 발견한 것도 아녜요. 좀 늦긴 했지만, 전 분명히 이본오 선생님을 만나러 여기에 온 거라구요. " 적당히 둘러칠 생각은 주호도 없다, 하는 걸 그녀는 분명하게 강조하 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그럼 보나마나 다큐멘터리 건으로 왔을 텐데…아무래도 이예린씨가 기 습시기를 잘못 잡은 것같소. " "지금은 그런 걸 말하고 싶은 기분이 아 니다, 그런 뜻인가요?" "그런 뜻이요. " 그녀의 또랑또랑한 눈빛에서 여전히 미묘한 이끌림 같은 것 느끼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괜찮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당장 그 문제를 논하자는건 아니니 까요. 하지만 저에게도 주어진 시간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식으 로든 결정은 내려야 해요. 그러니까 괜찮으시다면 한두시간 정도만 시간 을 내 주세요. " "지금 당장 말이요?" "아뇨, 오늘 말구…선생님 편하 실 때요. 그러니까 오늘 제가 여기까지 찾아온 건 출연 여부 때문이 아니 라 한번만 절 만나 달라는 말을 하러 온 거예요. 무작정 싫다고만 하시니 까 저로서도 달리 방도가 없었거든요. 이렇게 쳐들어 오는 수밖에…" 왜 일까,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다소 서글픈 표정으로 꽃나무들이 심어진 화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단한번 만나 달라… 일단한번. " 그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주술성 같 은 걸 되새기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래요. 어느날 저녁, 맥주나 레모네이드 같은 걸 마시며 부담없이 대 화를 나눌 수도 있잖아요. " "맥주나 레모네이드?" 되묻고 나서 풋, 하 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하고많은 마실것들 중에 왜 하필이면 맥주나 레모네이드인가. 그것이 마 치 사람을 꼬드기기 위해 떠올린 귀여운 발상처럼 여겨져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내말이 웃겼나요?" 다소 당황한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 녀는 물었다. "아뇨, 웃겨서 웃은게 아니라 신선하게 느껴져서 웃은 거예요. 근데 이 예린씨는 맥주나 레모네이드를 좋아하나보죠?" "네, 아주 좋아해요. 특 히 레모네이드는 더. " "좋아요, 그럼 이예린씨 말대로 어느날 저녁, 맥 주나 레모네이드를 한잔 하죠. 이제 된거죠?" "아. 성공이다!" 갑작스 럽게 밝은 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가볍게 상체를 흔들었다. 서늘한 감성을 느끼게 하는 그녀에게도 이런 면모가 있었구나, 새삼스런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무렇든 뭐라고 딱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미묘한 이끌림 같은 걸 느 끼며 나는 그녀에게 잘 가라는 말을 건넸다. 그리고 그녀가 경사진 언덕길을 총총히 걸어 내려가는 걸 잠시 지켜보다 가 등을 돌리고 천천히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사랑한다는 말, 그리고 결혼. 엘리베이터를 향해 가는 동안 하영에 관 한 생각이 문득 되살아났다. 이예린을 만나던 지난 몇분 동안 내가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얘 기가 되는 셈이었다. 그래서 상승 버튼을 눌러놓고 나서 푸, 하고 한숨을 내쉬며 나는 머리를 흔들었다. "젠장, 정말 한심하게 꼬이는군. " 하지만 그 순간에도 나의 뇌리에서 는 하영이 제기한 문제가 아니라 전혀 다른 말이 휠씬 강렬하게 살아남아 하영의 말을 물리치고 있었다. 하영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일종의 환기력 같은 것에 내가 단단히 사 로잡혀 있는 것 같았다. 무심히 받아들인 한마디의 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도 아닌데 그 것이 나를 사로잡는 신비로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어느날 저녁, 맥주나 레모네이드. 누군가 정신없이 문을 두들겨대는 소리를 듣고 나는 퍼뜩 잠에서 깨 어났다. 어째서 벨을 누르지 않고 문을 두들겨대는 것일까.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바깥쪽의 기척을 살폈다. 잠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서 꿈을 꾼 건가. 고개를 갸웃하고 나서 나는 손을 들어 제멋대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뒤로 쓸어넘겼다. 그때 다시 문을 두들기는 소리,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듯한 여자의 다급 한 목소리가 동시에 안쪽으로 밀려들었다. "선생님, 계세요?빨리 문 좀 열어 주세요,빨리요. "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 이런 젠장!하고 투덜거리며 나는 침대에서 내려가 서둘러 옷 을 입었다. 그리고는 총총히 출입문 앞으로 걸어가 세 개의 잠금장치를 차례로 풀었 다. 예상했던 대로 1503호의 은미, 그녀였다. 그녀가 코피가 터지고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헝클어진 모습으로 출입문 앞에 서 있었다. 커다란 꽃무늬가 들어간 엷은 원피스는 앞부분의 단추가 떨어져 헤벌어 지고 발에는 신발도 신고 있지 않았다. "맙소사, 이건 또 뭐냐?" 기막힌 그녀의 모습을 보고 나는 탄식하듯 입을 벌렸다. 하지만 그녀가 들어가야 할 맞은편, 1503호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그 녀와 동거를 하는 영우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들어가도 되죠. " 눈화장이 지워져 주변으로 볼썽사납게 퍼지거나 말 거나, 그녀는 손등으로 연신 눈물을 훔쳐내며 물었다. "그래, 들어와. 근데 영우는?" 피에로가 따로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하 며 나는 물었다. "그 개자식이 날 이렇게 두들겨 패고 내쫓은 거예요. 미친 새끼. " 안 으로 들어오자마자 그녀는 바닥에다 핸드백을 팽개치고 곧바로 안쪽으로 걸어가 제집처럼 털썩, 소파에다 몸을 쑤셔박고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지 엉엉,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커다 랗게 소리내 울기 시작했다. "너 또 외박했구나?" 오전7시40분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올려다보고 나 서, 그래, 보지 않아도 알 만하다,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 스물 세살 동갑나기들의 어이없는 동거 생활에는 이래저래 잦은 다툼이 있었다. 하지만 둘이 이 정도로 심각하게 싸우게 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그녀 가 외박을 하고 돌아온 아침이거나 이른 새벽이라는 걸 나는 여러번의 중 간자 역할을 통해 훤히 알고 있었다. "뭐, 마실 거 좀 줄까?" 좀체 그쳐지지 않는 그녀의 울음을 그치게 해 볼 요량으로 나는 물었다. "커피 한잔만 끓여 주실래요? 술도 안 깨고 피곤해 죽겠어요. " 내가 주방에서 커피를 끓이는 동안 은미는 욕실로 들어가 대충 얼굴을 씻고 매 무새를 가다듬고 나왔다. 화장이 지워진 그녀의 얼굴이 전혀 다른 사람처럼 앳되고 순진하게 보였 다. 커피를 그녀에게 건네주고 나서 나는 발코니로 나가 의자 하나를 안으로 들여왔다. 그리고는 소파 앞쪽에 그것을 놓고 그녀와 마주되게 앉아 담배를 피워물 었다. "영우가 집엘 못 들어오게 한 거야?" "아뇨 일단 들어오게 하고, 들어 가자마자 마구 두들겨팼어요. 그리고는 내가 덤벼들 겨를도 없이 밖으로 내쫓아버리고 문을 걸어버린 거에요. 뭐 나같은 창녀하고 더 이상 같이 살기 싫대나 어쨋다나……. 병신같은새끼, 지가 무슨 도덕군자인 줄 아 나봐. 내가 누구 땜에 이짓하고 사는 줄도 모르고……. " 말끝을 흐리며 그녀는 다시 이잉, 하고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는 커피잔을 탁자에다 내려놓고 티슈를 몇 장 끄집어내 눈물을 먼 저 찍어내고 나서 팽, 그것으로 소리가 나게 코를 풀었다. 자신은 화끈하고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이지만 세상을 찝찝하게 살지는 않을 거라고 말하곤 하는 스물셋, 그녀를 볼 때마다 나는 왠지 모르게 가 슴이 아릿해져 오는걸 느끼곤 했다. "매번 이렇게 똑같은 일을 당하면서 외박은 왜 또 한거야? "그거요? 누 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아세요? 나도 저 자식 싫다는 일은 정말 안하 고 싶어요. 그리고 할 수만 있다면 룸살롱 나가는 일도 지겨워서 그만 두 고 싶을 때가 한두번이 아니에요. 젊은 여자애들 몸뚱어리만 보면 사족을 못 쓰고 집적거리는 노땅들도 지겹고, 그 인간들하고 외박 나가라고 할 때마다 협박해대는 주인과 마담, 지배인의 등쌀도 정말 지긋지긋하다구 요. 하지만 어떡해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당장 먹고 살아갈 방법이 없는걸요. " 아무것도 모르면 잠자코 있기나 하세요, 하는 듯한 눈빛으 로 나를 흘겨보고나서 그녀는 다시 커피잔을 들어올렸다. "그렇다고 해서 평생을 이런 식으로 보낼 수 없는 거 아냐. 내 말은… 그러니까 서로를 위해 살아가는 방식을 바꿔볼 수도 있는 것 아니냐, 그 런 거야. " 말을 하면서도 이게 무슨 씨알도 먹히지 않을 헛소리인가, 하는 생각을 나는 했다. 그네들, 스물세살짜리들의 상식을 벗어난 듯한 동거 생활에 대해 나는 처음부터 적절하게 해 줄 수 있는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마나한 원론적인 얘기들, 그러니까 당사자 들이 전혀 귀담아 듣지 않는 말을 늘어놓으며 때마다 참으로 내 자신을 한심스러워하지 않 을 수 없었다. "나, 정말 안되겠다 싶으면 두 눈 딱 감고 15층에서 뛰어내려 버릴 거에 요. 사는 거, 정말이지 이젠 미련도 없어요. 어떤 땐 내가 너무 오래 산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어요. 그런데도 굳이 아둥바둥하며 살아야 하는 필요가 어딨어요?"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탁자위에 올려진 내 담배 하 나를 꺼내물었다. "이봐, 지금 은미와 영우에게 필요한 건 그런 게 아냐. 이런 말, 어떻 게 들릴진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엔 룸살롱에 나가는 은미나 아무일도 안하고 놀고 있는 영우도 한심스럽긴 마찬가지야. 고등학교때 만난 첫사 랑이라는 게 뭐가 그리 대단해?" 고등학교때 만나고, 고등학교때 같이 가출하고, 그래서 그때부터 같이 살기 시작하면서 여기까지 흘러왔다는 말 - 언제였던가, 은미가 아니라 영우에게서 나는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서로에게 첫사랑이라는 말이었는데, 그것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 무튼 그때 나는 이상한 충격을 받고 물끄러미 영우의 얼굴을 건너다보았 었다. "첫사랑이라는 거, 누가 대단하다고 했어요? 저 자식하고 난 그런 것 때문에 사는 게 아니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서 어쩔 수 없이 사는 것 뿐이에요. 고등학교때 만나서 지금까지 우린 이렇게 망가진 것밖에 없단 말예요. 보시는 대로 이렇게요. " 손바닥으로 자신의 턱을 치켜드는 시 늉을 하며 그녀는 나를 보았다. "그래 이제 어쩔 거야? 내가 가서 영우를 데려올까?" 길게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도 없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요컨대 해결방도를 찾아야 할 시간이 아니냐, 하는 걸 물은 것이었다. "싫어요, 부르지 마세요. 지금 불러봤자 여기서도 행패를 부릴 게 뻔하 다구요. " 진저리를 치듯 그녀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러니까, 그 생활을 도저히 그만둘 수 없으면 외박이라도 하지 말라 구. " "선생님도 정말 한심해요. 외박 자체가 뭐 그리 대단해요? 외박 안하고 새벽 두시나 세시쯤 집에 돌아온다고 해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지 할 일 다하고 올 수 있단 말예요. 그리고 룸살롱에 나오는 여자애들 대개 다 그렇게 해요. 어쩌다가 술이 너무 취하고 피곤하면 나도 모르게 곯아떨어지는데…. 눈떠보면 벌써 날이 밝아있곤 한단 말예요. 나도 정 말 그런 짓은 하기 싫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매달 나가는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는데 낸들 어쩌겠어요. 아, 정말 짜증나!" 생각 하기도 싫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나서 그녀는 다시 소파 에다 몸을 눕혔다. 그리고는 나 몰라라 하는 표정으로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무엇이 어찌되었건 잠부터 자야겠으니 더이상 말 시키지 마라, 하는 걸 다만 행동으로 강조하는 것 같았다. 이 대책없는 몸짓 언어의 세대, 무슨 수로 혼수상태의 영혼을 일깨울 수 있을까. 은미가 눈을 붙인 뒤,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실내를 서성 거렸다. 그러다가 도리 없겠다는 생각으로 1503호, 은미와 동거하는 영우를 만나 러 갔다. 두서너번 벨을 누른 뒤에야 문을 연 그는 창백한 낯빛으로 나는 내다보 며 용건이 뭐냐고 물었다. "이봐, 내가 여기 왜 찾아왔는 줄 정말 몰라서 묻는 거야?" 다소 화가 난 듯한 표정으로 나는 되물었다. "은미 때문인가요?" 그녀의 외박때문에 밤새 잠을 자지 못한 듯 그의 두눈을 붉게 충혈돼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외박때문이 아니라 외박 뒤에 일어난 일 때문에 온 거 야. 은미가 지금 내 소파에서 자고 있는데, 그런 건 화가 나지 않나요?" "어디서 자거나 말거나, 난 그런 거 관심없어요. " 말을 하고 나서 푸 , 하고 입바람을 내불어 그는 이마 위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밀어올렸다 . "좋아. 뭐가 어찌됐 든 안으로 들어가서 얘길했으면 좋겠는데…안 될까 ?" 나의 말을 듣고나서 그는 잠시 망설이는 표정을 보였다. 분노와 체념, 강단과 혼돈이 차될 때처럼 그의 눈빛은 몹시 불안정해 보 였다. 하지만 그런 것 전체를 감싸안고 있는 더욱 강렬한 기운은 제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하는 자기 연민과 자학의 그늘인 겉 같았다. 이윽고 자신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는 사슬고리를 풀고 물을 열었다 .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 뒤쪽의 벽면에 걸린 대형 패널 하나가 섬뜩하게 눈길을 끌었다. 전에, 그러니까 두사람이 싸웠던 지난달 중순경까지 거기 걸려 있던 것 은 1980년대 중반에 상영되었던 '베티 블루' 라는 영화의 포스터 패널이 있었다. 필립 데잔의 '아침 37°2' (Le Matin37°2) 이라는 소설을 영화한 것으 로 영화뿐아니라 원작소설까지도 읽었던 터라 나는 기회 있을때마다 감회 어린 눈빛으로 그것을 올려다보곤 했었다. 여자가 임신하기 가장 좋은 체온은 37°2라고 했던가? 나는 소파에 앉자 마자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베아트리스 달이라는 주연 여배우의 눈빛을 마음에 들어서 은미 가 샀다던 패널, 그것이 걸려 있던 자리를 대산 차지하고 잇는 패널을 올 려다 보았다. 지구 멸망의 날이 온 듯한 배경, 무수한 해골과 뼈들이 나뒹구는 폐허 위게 검은 가죽 옷을 입고 서로 다른 방향을 내다보고 서 있는 다섯명의 남자들 - .악마주의를 떠올리게 하는 사진의 아래쪽에 '울안엠 (Oulane m)' 이라는 글씨가 핏빛으로 떠올라 있었다. 울안엠, 울안엠….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퍼뜩 기억이 되살아나지 않아서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페널 밑에 창백한 낯빛으로 앉 아 있는 영우에게로 시선을 낮추고 물었다. "저게 뭐지?" "뭐 말이죠?" 일부러 그러는 것인가. 내가 눈짓으로 패널을 가리켰음에 도 불구하고 그는 사뭇 몽롱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저거… 울.안.엠, 록 그룹 이름인가?" "네." 깡마른 몸을 간신히 가 누며 그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결성된 지 얼마 안 된 그룹인 모양이지. " "일년쯤 됐을 거예요. " "근데, 울안엠이 무슨 뜻이지. " "잘은 모르겠는데… 카를 마르크스 라는 사람이 학생 시절에 썼던 희곡 제목이라고 들었어요. " "아!" 그 제서야 퍼뜩 뇌리에서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어 나는 입을 벌렸다. 그리고 더욱 의구스런 눈빛으로 다시 한번 패널을 올려다 보았다. 사탄 숭배자들이 모이는 교회에서 행해지는 흑마술, 촛대에 거꾸로 꽂혀 타 내리는 촛불, 기도서에 기록된 모든 문구를 맨 뒷줄부터 거꾸로 읽어 올라가는 신부, 거꾸로 매달리거나 신도들의 발 아래에서 무참히 짓밟히 는 십자가, 그리고 가톨릭 교리서에 열거된 일곱가지 대죄 (大罪) 를 모 두 범할 것과 선한 일을 절대 도모하지 않을 것을 서약하는 사탄 숭배자 들…. 그래, '울안엠' 은 그런 내용을 지닌 희곡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의미를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성서적 의미, '임마누엘 (Immanuel)' 을 거꾸로 발음한 것이 바로 '울안 엠 (Oulanem)' 이며 대개의 흑마술 추종자들은 그처럼 성호 (聖號) 를 거 꾸로 불러야 효력이 있다고 믿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희곡으로 쓴 카를 마르크스가 바로 사탄 숭배자였다는 기록! "저건 누가 산 거지. " 패널 에서 시선을 거두고,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서 나는 그에 게 물었다. "내가 산 건데… 이상한가요. " 자세를 고쳐앉으며 그는 다소 흥미롭 다는 표정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이상한 게 아니라 자네에게 걸맞지 않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군. 뭔 가, 그래 위악적으로 자기 경계를 넘어가려는 몸부림 같은 거 말야. " "위악적이라뇨?" "내 표현이 잘못 됐다는 건가, 아니면 위악적이라는 말 이 무슨 뜻인지를 모르겠다는 건가?" "위악적이거나 말거나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내가 저 패널을 산 건… 그래요, 저걸 보는 순간 굉장한 매력을 느꼈기 때문이에요. 갑작스 럽게 마음이 평온해지고, 내가 고민하는 모든 것들을 말끔히 제거해 주는 신비스런 힘을 지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라구요. " 미간을 찌푸리고 다소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그는 언성을 높였다. "그럼, 저런 걸 걸어두고도 은미와 싸우는 이유는 뭐지?" "그건 싸울 만하니까 싸우는 거죠. 창녀보다 추악하게 살면서도 자신이 항상 선을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하는거… 정말 지긋지긋하고 구역질 나는 일 아닌가 요?"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상체를 굽히고 탁자 밑으로 손을 넣어 마시다 남겨둔 양주병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두어 모금 마시고 나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 았다. "하지만 은미도 쉬운 입장은 아니잖아. 그런 일 하고 싶어서 하는 게 아닐 거고…더욱이 자네는 아무일도 하질 않고 손을 놓고 있는 형편 아닌 가. " "그래서요? 내가 아무 일도 하질 않고 놀기 때문에 은미가 룸살롱 에 나간다, 그런 뜻으로 하시는 말씀인가요?" 탁, 소리가 나게 양주병을 탁자 위에 내려놓고 불쑥, 그는 상체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말하는 거야. " "상황? 정말 죄송한 얘긴데요, 그런 상황에 대해 이 선생님이 알고 계신 거 뭔질 모르겠군요 . 이 오피스텔로 이사 오기전에 그 기집애와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리 고 이렇게 비싼 월세 물면서 이 오피스텔로 이사를 오게 된 이유가 뭔지 … 그런 거 알기나 하세요?" "그런 거야 내가 모르는게 당연한 거 아닌 가?" 다시 한대의 담배를 꺼내 물며 나는 되물었다. "이곳으로 이사 오기 전엔 주방시설도 되어 있지 않고 화장실도 따로 사용할 수 없는 단독주택에서 방 한 칸을 얻어 살았어요. 그리고 그땐 나 도 정말 열심히 일했어요. 은미의 기질을 알기 때문에, 그 기집애가 샛길 로 빠지지 못하게 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았다구요. 하지만 집에서 아 무것도 하지 않던 그 기집애가 또다시 친구들과 어울려 밖으로 나돌아치 기 시작하는걸 보고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글쎄, 문제는 상황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했을까?" "그래요. 은미는 상황 때문이 아 니라 타고난 기질 때문에 저러는 거라구요. 그러니까 룸살롱에 나가고 매 춘까지 하는 게 생활여건 때문이라는 건 새빨간 거짓말이라구요. 그런데 어째서 이 선생님은 항상 은미의 말이 전부 사실일 거라고 생각하는 거 죠?" 물었지만 대답은 듣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는 다시 두어 모 금의 양주를 마셨다. "은미의 말만이 아니라 난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사실이라고 믿어. 문제 는 서로의 생각과 입장이 다르고 그래서 이해가 엇갈리는 거라고 생각하 는 거지. " 나도 모르게 은근히 부아가 치미는 것 같아 나는 손을 내밀 어 그에게 양주병을 달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그것을 건네받아 나도 두어 모금을 마셨다. 젠장, 아침부터 철딱서니없는 애들의 사랑 싸움에 끼어들어 이게 무슨 꼴이람, 하는 자괴감을 다스리고 싶어서였다. "이 오피스텔로 이사 오는 것도 내가 얼마나 반대했는지 아세요?하지만 그 기집애는 자신이 모든걸 다 알아서 할 테니 무조건 이사부터 하자고 덤볐단 말예요. 그런데, 알아서 한다는 게 고작 룸살롱에 나가서 웃음을 팔고 그것도 모자라 몸까지 파는 건가요?" 상체를 곧추세우고 사뭇 불안 정한 눈빛으로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은미가 옆에 있기라도 하다면 다시 한번 두들겨패고 싶다는 격렬한 충동으로 온몸이 부풀어오르는 것 같았다. "이봐, 자네의 기분은 나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그럼 내가 한 가지 만 묻겠는데, 자넨 정말로 은미를 사랑하나?군더더기 덧붙이지 말고 간단 히 그것만 말해봐. " "사랑요?" 되묻고 나서 그는 곧추세웠던 상체를 힘 없이 가라앉혔다. 그리고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고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눈빛이 몽롱하게 가라앉고 얼굴이 백지장처럼 변해가는게 다소 안쓰럽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나는 말없이 그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이윽고, 삼사분쯤 지난 뒤에 그는 혼잣말을 하듯 힘없는 어조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가 정말 은미를 사랑하는지… 나도 날마다 내 자신에게 그걸 묻곤 해요. 그리고 사랑한다고 대답하기도 하고, 사랑하지 않는다고 대답하기 도 해요. 사랑한다고 믿고 싶을 때가 있는가 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사 랑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모든 걸 다 때려치우고 싶을 때도 있어요.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거죠?" "그런 걸 애증이라고 하는 거야. 사랑의 감정은 분명히 있는데, 그것을 에워싼 상황이 끝없는 갈등을 불 러일으킬 때…. 그럴 때 애증이 생겨나는 거지. 마치 마음속에서 악마와 천사가 싸움질을 벌이는 형국과 같아서 어떤 때는 천사의 말에 귀가 솔 깃해졌다가 어떤 때는 악마의 말에 넘어가기도 하는 거야. 하지만 중요한 건 천사도 아니고 악마도 아니야. " "그럼 뭐가 중요한 거죠?" 고개를 들고 사뭇 궁금하다는 눈빛으로 그는 나를 건너다보았다. "천사와 악마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자기 자신, 그걸 자각하는 게 그 럴 땐 가장 중요해. 왜냐하면 인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결국 인간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이지. " "그럼 지금 나에게 필요한 건 뭐예요?" 이윽고 구원을 얻고 싶어하는 어린 양과 같은 표정으로 그는 물었다. 몇번의 중재 경험을 통해 나는 지금 이 순간, 그러니까 그가 자기 마음 의 문을 열고 나약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을 잘 활용해야만 중재가 제대로 이루어진다는 것도 또한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내가 그와 대화를 나누며 인내심을 발휘한 이유가 달리 무엇이겠는가. "가장 현실적으로 말하지. 영우가 은미에 대해 애증을 느낀다는 건 아직 도 영우가 은미를 사랑하고 있다는 증거야. 왜냐하면 진실로 사랑하지 않 는 사람에게는 화도 나지 않는 법이거든. 무관심해져 버리면 그만인데 싸 우고 자시고 할 필요가 어딨겠어. 문제는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하는냐 하는 건데, 그것을 위해선 두사람 모두 반성해야 할 점이 있어. 은미가 외박하는 건 싫어하지만, 한번이라도 그걸 은미에게 대화로 표현해 본 적 있나?" "아뇨, 없었어요. " "그러면서도 외박을 하고 오면 무조건 자 기 감정대로 행동하겠지? 그것이 왜 싫고 어째서 화가 나는지를 설명하지 도 않은채 무조건 여자를 때리고…, 그래, 때로는 죽여 버리고 싶기도 하 겠지. 하지만 그런 건 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비열한 감정 표현 방 법이야. 폭력이 정말 나쁜 건 상대방을 때리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것이 결국 자신을 해치기 때문이라는 거지. 내 말 무슨 말인지 알겠나?" "그 런게 나쁘다는 건 저도 알아요. 견딜 수 없이 화가 나서 나도 모르게 은 미를 때리지만, 그리고 나면 언제나 내 자신을 죽이고 싶어지거든요. "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진저리가 난다는 표정으로 그는 머리를 흔들어댔다 . "그래, 그럼 됐어. 그러니까 이제부터는 오늘의 일을 생각해 보자구. 어제의 일은 이미 지나간 거니까 말야. " 그렇게 말하고 나서 나는 소파 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코니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놀랍게도 암회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세상에는 촉촉하게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마도 내가 1504호에서 1503호로 건너와 있는 동안에 내리기 시작한 모 양이었다. 문득 70년대 박인수라는 가수가 불렀던 노래, 그러나 90년대 후반에 장 사익이라는 가수가 구성지게 다시 불렀던 '봄비' 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이봐, 내가 여기 있을 테니까 자네는 지금 1504호로 가. 은미가 소파에서 자고 있으니까 자네도 거기 가서 눈을 좀 붙이라구. 그리고 잠이 깨면, 알몸으로 비를 맞는다는 기분으로 대화를 나눠보란 말야. 쉬운 일이 아니겠지만… 그래도 그렇게 해 보라구. " "지금… 가라구요?" 내가 등을 돌리자 그는 멀뚱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 다. "그래, 지금 가. 나도 이젠 혼자 있고 싶으니까 그렇게 하라구. 그리고 , 저기 널려 있던 '베티 블루' 패널은 어디있지?" "그건 왜요?" 천천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며 그는 물었다. "저 울안엠이라는 록 그룹패널을 내리고 그걸 다시 걸어두면 안되겠나 ? 굳이 특별한 이유를 찾아야 한다면 나를 위해서라도 말야. " "다용도 실에 넣어두었는데… 그게 마음에 드시는 모양이죠?" "그래, 난 그게 훨 씬 마음에 들어. 그리고 지상에 아직도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게 다 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하고말야. " "그럼, 그건 이선생님 마음대로 하세 요. 이 록그룹 패널은 사실 은미가 싫어하기 때문에 일부러 걸어두는 거 예요. 은미는 이걸보면 잠도 오지 않는다고 하는데… 지금 바꾸어 걸까요 ?" "됐어. 거건 내가 알아서 할테니 어서 가보라구.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다시 등을 돌려 촉촉한 봄비에 젖는 이른아침의 세상풍경을 내다보 았다. 갓등에서 쏟아져내리는 희미한 백열전구의 불빛, 자옥한 담배연기, 좁은 실내를 끈끈하게 흘러다니는 귀에 익은 선율… 젊은 날의 한때, '봄비' 라는 노래를 듣던 시절이 희미한 흑백사진처럼 뇌리에서 되살아났다. 그래서, 등뒤에서 출입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그가 밖으로 나가는 인 기척이 들렸지만 나는 등을 돌리지 않았다. 언제가는 너도 이런 순간, 네가 지금 무심하게 걸어들어가는 현실을 아 프게 반추하는 순간을 맞이하게 되리라. 독약 같은 사랑의 기억. 십여분 정도 창밖을 내다보다가 나는 벽에 걸린 패널을 예전 것으로 바꿔 걸었 다. 그리고는 다소 몽롱한 기분으로 소파에 누워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마음이 허전하게 느껴져서 다시 몸을 일으키고 탁자 위에 올려진 양주병을 손에 들었다. 한 모금을 마시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한 모금을 마셨다. 그러자 목구멍이 홧홧해지고 이어 뱃속이 저릿저릿해졌다. 하지만 잠시 뒤부터는 그 모든 신체적 반응이 머리속으로 치밀어올라 대 책없는 몽롱상태를 몰고오기 시작했다. 소파에 몸을 눕히고 '베티 블루' 의 패널을 올려다보자 푸른 색감에 에 워싸인 주인공의 얼굴이 내게 아주 익숙한 여자의 것으로 서서히 모습을 바꿔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눈을 감고, 익숙한 존재감을 가슴에 품고 나는 감미로운 잠속으 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이 선생님, 눈 좀 떠 보세요. 빨리요!" 눈을 떴을 때, 내 옆에는 은미 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가 왜 거기 서 있는지, 나는 퍼뜩 그것을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래서 상체를 반쯤 일으키고 생경스런 눈빛으로 실내를 둘러 보았다. 그러자 일정한 시간의 저쪽, 다시 말해 내가 잠에 빠져들기 전까지의 일 들이 비로소 기억 속에서 묵연하게 되살아났다. "이 술, 이 선생님이 마신 건가요?" 빈 술병을 손에 들고 이해할 수 저기, 베티 블루는요?" 고개를 들고 벽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다시 물었 다. "그것도 마찬가지야. 내가 바꿔 걸었어. 은미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영우에게 부탁했더니 선선히 그러라고 하더군. " "망할자식, 내가 바꿔 걸으라고 그렇게 성화를 부려도 말을 안 듣더니… 아무튼 선생님과 전 뭔가가 아주 잘 통하는 것 같아요. 그런 생각 안드세요?" 아주 노련 하게 한쪽 눈을 찡긋하며 그녀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근데 날 왜 깨운 거지?" "어머나, 내정신 좀 봐. 선생님 찾는 전화가 걸려와서 온 거예요. 여자한테 걸려왔는데, 내가 누구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엉겁결에 앞집에 사는 여자라고 했는데… 선생님이 곤란해지면 어쪄죠?" "사실대로 말한 건데 곤란할 게 뭐 있어?" 신경 쓰지 말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으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하영이가 전화를 걸어온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며 서둘러 15 04호로 돌아왔다. 소파에 앉아 있던 영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다소 멋쩍은 표정을 지어보 였다. 둘 사이에 어떤 화해의 과정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들 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평상심을 되찾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지난밤 하영과 나 사이에서 일어났던 찜찜한 일도 그들에게서 처 럼 단순 담백하게 해결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탁자 위에 올 려진 무선전화기를 집어들었다. 하지만 하영일 거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첫순간에 보기좋게 빗나가 버리고 말았다. "안녕하세요?저, 이예린이에요. 전화를 늦게 받으시는 걸 보니 어디 밖 에 나가 계셨던 모양이죠?" "아, 밖이 아니라 앞집에 있었어요. " "이상하네요. 처음에 전화를 받은 여자분은 자신이 앞집 여자라고 했는 데… 선생님은 앞집에 계셨다니, 무슨 미로게임을 하는 사람들처럼 느껴 져요. " 얼핏 듣기에는 농스런 어조 같았지만, 그것의 이면에는 서늘한 냉소가 깔려 있는 것 같았다. "아마 미로게임이 맞을거요. 아침부터 그럴 일이 좀 있었는데…. 그런 거야 뭐 늘 있는 일 아니겠소?이런 게 미로게임처럼 느껴졌다면 이예린 씨도 이미 미로 속으로 들어와 있는 셈이니까 방심하면 안 될거요" 무슨 이유 때문인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앉 은 영우를 돌아보며 나는 적당히 말을 얼버무렸다. "긴장은 내내하고 있어요. 선생님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미로게임을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결코 방심하지 않을 거라구요. 설마, 어젯밤에 약 속하신 걸 벌써 잊으신 건 아니겠죠?" "어느날 저녁, 맥주나 레모네이드 ?" "네, 그거요. 오늘 저녁에 그 약속을 실행에 옮겼으면 좋겠다는 생각 이 들어서 전화 드린건데…. 괜찮을까요?" "오늘 저녁?" 갑자기 의표를 찔린 기분이 들어 나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솔직히 말씀 드리자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없어서 그러는 거 예요. 이달말까지 촬영을 마무리하려면 오늘이나 내일까지는 어떤 식으로 든 결론을 내려야 하거든요. 그래서 무리한 요구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이 렇게 억지스런 부탁을 드리는 거예요. " 더이상 에돌아 말을 할 만한 여 유가 없다, 하는 걸 그녀는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좋소, 그럼 오늘 저녁에 만나도록 합시다. 하지만 이예린씨가 생각하는 결론에 대해서는 내가 아무런 부담도 갖지 않겠다는 걸 분명히 밝혀 두고 싶소. 자칫했다간 만나지 않는 것만 못한 결과가 생겨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요. " "아,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요. 그럼 저녁 여섯시 경에 제가 오피스텔 일층에 있는 커피숍으로 갈 까요?" "커피숍?" "네, 방송국에서 그 오피스텔까지는 그리 멀지 않거 든요. 그리고 거기서 맥주나 레모네이드를 마실 수 없으면 다른 곳으로 옮기죠 뭐. " 전화를 끊고 나서 무슨 할말이라도 있느냐, 하는 표정으로 나는 영우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창백한 낯빛. 퀭하니 가라앉은 두눈으로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기색을 보이고 서 있었다. 은미가 나를 깨우려와 밝은 표정으로 재잘거리던 것으로 미루어 그들 나 름대로의 방식으로 화해를 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가? 그렇게 서 있 지 말고 앉으라는 시늉을 하고 나서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아까, 제가 무례하게 굴었던 거… 정말 미안해요." "무슨 말이야? 영 우가 언제 나에게 무례하게 굴었지?" 그와 마주되게 앉으며 나는 엉뚱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가 어느 부분에 대해 미안하게 생각하는지를 물론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거, 제 스스로 미안하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족한 일 아닌 가. 나는 그가 대단히 영민하고 예민한 감수성의 소유자라는 걸 알고 있 었다. "미안하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서 남아 있었어요. 그리고…. " "그리 고?" "모르겠어요. 뭔가를 말씀 드리고 싶은데 명료하지가 않네요. 지금 제가 처해 있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도 잘 모르겠고….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모든 게 너무 막막하 고 몽롱하게 여겨져서 정말 답답하네요."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발코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비감스런 표정을 나에게 보이기 싫어서 그러는 모양이었다. "은미와 아직 화해를 하지 않은 건가?" "아뇨. 그런 건 조금도 중요하 지 않아요, 진짜 중요한건…. 화해하고 다시 싸우고, 그러면서 우리는 점 점 더 나빠져 가고 있다는 거죠. 은미나 내가 이렇게 사는 건 이제 별로 의미가 없어요. 처음에 그녀와 함께 집을 나올땐 평생 목숨을 걸고 함께 살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 허망하게도 지금은 아무것도 남겨진 게 없 는 것 같아요. " "그래, 좀 심각한 건 사실이야. 뭔가 방도를 찾긴 찾아 야 할 텐데… 선뜻 떠 오르는 묘안이 없어서 나도 안타깝군." 물끄러미 , 나는 철없는 사랑에 모든 걸 걸었으나 이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게 된 스물세살짜리 청년을 건너다 보았다. 사로잡혀 있는 동안에는 불멸을 닮아 있는 것 같은 사랑, 그것에 빠져 모든 걸 포기했던 그는 이제 여자에게 얹혀 사는 기생족 이외에 다른 아 무것도 아닌 것으로 전락한 자신을 끔찍스럽게 비탄스러워 하고 있는 것 이었다. "선생님,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있으신가요?" 퀭한 두 눈을 가늘게 뜨고 그는 문득 나를 건너다보았다. "시간? 오늘 저녁이면… 아, 좀전에 걸려온 전화가 있었잖아. " 뭔가, 그가 심정적으로 상당히 심각한 궁지에 몰려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 면서도 이예린과의 약속이 떠올라 나는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그렇군요. 전, 그냥… 뭔가 인생에 대해 선생님과 대화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뿐이에요. 부담 갖지 마시고, 다음에 언제 시간 이 나시면 기회를 한번 만들어 주세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 그래도 힘 을 얻을 수 있을 것 같거든요. "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서 그 는 1504호로 돌아갔다. 그가 돌아가고 난 직후,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가 나는 하영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전화를 걸어야한다는 생각과 대답할 말을 준비하지도 않은 채 전화는 해서 무엇하겠냐는 생각이 내면에서 첨예한 갈등의 불꽃을 일으 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전화는 걸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무선 전 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명동, 그녀의 패션숍으로 전화를 걸었다. "아, 미스 박? 오랜만이군요. 나, 이본오예요. " "아, 선생님! 정말 오랜만이네요. 어제 아침에 보내주신 서른세 송이의 장미, 제가 먼저 받 았다는 거 모르셨죠?" "그랬군요. 근데 하영씨는 없나요?" 미스 박이 이렇게 호들갑을 떠는 이유, 그것이 하영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같다는 생 각이 들어 나는 물었다. "네, 아직 안 나오셨어요. 집에 전화는 해 보셨나요?" "아뇨, 아직요 . 그럼 집으로 전화를 해보죠 뭐. " "혹시… 어제 이선생님이 생일 축하 를 너무 진하게 해주신 거 아닌가요?"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리고 비내리는 창밖을 잠시 내다보다가 하영의 아파트로 전화를 걸었 다. 하지만 용건을 남기면 자신이 연락하겠다는 부재중 메시지만 공허하게 귓전으로 밀려들었다. 전에 없던 일이 아닌가. 나는 무선전화기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묵묵 한 기분으로 발코니 앞으로 걸어갔다. 촉촉하게 봄비에 젖는 서기2000년 5월, 세상은 탁한 암회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 막막하면서도 잠잠한 풍경을 내다보면서,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사랑 한다는 말 한 마디 들어보지 못한 여자의 심정, 그리고 자신과 결혼할 수 있냐는 물음에 대한 대답을 단호한 거절로 되돌려받은 여자의 심정이 어 떤 것인지에 대해 나는 생각하기 시작했다. 윤하영,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가? 물었지만 나의 내면에서는 아무런 대 답도 떠오르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그런것에 실리는 정신적 무게를 의식한 때문이 아니었다. 문제는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미묘한 정서의 장벽이었다. 하영에 대해 내가 느끼고 있는 감정의 질을 사랑이라고 표현한다고 해서 함량 미달이라고 판단할 근거는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터였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의 감정이라고 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게 하는 알 수 없는 장애감은 나로서도 어쩔수 없었다. 에메랄드 궁전으로 사라진 여자. 문제는 사랑의 원형처럼 내 가슴에 남겨진 그녀가 아니라 그녀에게 행해진 내 두레박질의 원초적 경험이었다 . 그 때, 열여덟의 나이로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는 안간힘을 다 해 내 마음의 우물물을 퍼올렸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상에서 경험하는 최초이자 최후의 두레박질이 되기를 밤낮으로 갈망했었다. 물론 세상에는 눈뜨지 못한 채 내 자신의 감정에 지나치게 충실한 결과 였으리라. 되풀이 되는 두레박질의 경험 같은 것. 지상에 만연한 사랑 이 단지 그런 것일 뿐이라고, 첫사랑 이후의 경험에 대해 나는 별다른 의 미를 부여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왔다. 몇 번의 사랑과 이별이 되풀이 되는 동안, 형식이 달라도 본질은 다르지 않다는 걸 경험한 것이었다. 그래서 세상에 태어나 한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인간이 진실로 사랑한다 고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오직 한번뿐이라는 생각을 굳힌 것이었다. 원초적 경험으로서의 첫번째 두레박질 이후에 되풀이 되는 것은 엄밀히 말해 숙련된 기술이거나 요령일 수 밖에 없다는 판단. 하영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도 섣불리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것은 내 마음 의 불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아무리 온당한 것이라 해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어차피 불구로 취급될 수 밖에 없다, 하는 게 세상에서 통용되는 논고가 아닌가 . 세상의 논고를 두려워하고, 그것에 적응하고 싶었다면 나는 얼마든지 하영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발하고 또한 그녀와 결혼도 할 수 있을 터 였다. 하지만 세상을 마음의 불구로 살아가는 것보다 훨씬 끔찍스러운 일, 그 것은 자신을 기만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일이었다. 그런 자에게 혼자 사는 일 말고 달리 무슨 구원의 방도가 있으랴. 서기 2000년5월, 세상은 여전히 비에 젖고 있었다. 탁한 암회색으로 무겁게 가라앉은 풍경에 내 마음이 이입되고, 그것의 심층에서 농밀한 허무의 안개가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서서히 현실의 윤곽선이 허물어지면서 눈앞이 침침해졌다. 젖을 대로 젖은 풍경의 이면에서 떠오르는 준엄한 경고의 메시지 - 너, 스스로 길을 열지 못하면 더 이상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리라 . 정오 무렵, 나는 '털보네와 짱구네 식당' 으로 식사를 하러갔다. 집에서 뭔가를 만들어 먹을까 잠시 망설이기도 했지만, 기분이 말이 아 니라서인지 아무 것도 먹고 싶은게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일부러 비 내리는 세상으로 나선 것이었다.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을때 선택하는 것 - 그것이 나에게는 외식이 었던 것이다. 식당에는 두 테이블에만 손님이 앉아 있었고, 홀에는 짱구씨가 나와 있 었다. 평소에는 짱구씨가 주방 일을 권장하고 털보씨가 서빙을 담당하는데 어 쩐 일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자리를 잡고 앉으며 짱구씨에게 물었다. "무슨 변화라도 생긴 건가요?" "변화라뇨?" 물컵을 내 앞에다 내려놓 으며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짱구씨는 되물었다. "설마, 털보씨가 여길 그만둔 건 아니겠죠?" "아, 난 또! 그 친군 지 금 시장에 갔어요. 아침부터 호박잎에 쌈을 싸먹고 싶다는 타령을 해대더 니,점심시간 직전에 기어이 시장엘 다녀오겠다고 나갔지 뭡니까. 지금 주 방에서는 호박잎을 데칠 물이 펄펄 끓고 있는 걸요. " 감색 에이프런에 부착된 주머니에다 한손을 찌르고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말세 종교에 빠진 아내 때문에 전재산을 날리고, 이십년 넘게 봉직하던 공무원직까지 포기한 그는 무척이나 소심하면서도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 라서 식당이 문을 열던 초기만해도 얼굴에 짙은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생활의 안정을 회복한 때문인지 표정이 많이 밝아져 있었다. 전재산을 탕진한 아내가 산중의 기도원으로 잠적해버리고 두아이들 교육 까지 도맡게 되긴 했지만, 그나마 길거리로 나앉지 않고 이렇게 안정을 되찾게 된 걸 그는 역설적이게도 '진심으로 하느님에게 감사' 하고 있었 다. 요컨대 진정한 감사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이고 이 선생, 정말 때맞춰 잘 오셨네요!" 내가 주문한 김치찌개 백반이 나온 직후, 뭔지 모를 기대감에 잔뜩 부풀어 오른듯한 표정으로 털보씨가 나타났다. 보기 좋게 수염을 기른 그는 덩치가 아주 크고 다소 호걸스럽게 생긴 인 물이었다. 어느날 갑자기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식당 동업을 권유 , 생계가 막막해진 짱구씨를 지금껏 도와 주는 것만 보더라도 그의 품성 이 얼마나 넉넉한지는 족히 짐작할 만했다. 언제였던가, 식당개업에 드는 비용 일체를 털보씨가 충당했는데도 이익 배당은 50대50으로 한다는 얘기를 나는 짱구씨로부터 전해 들은 적이 있 었다. 그래서 그때, 그들이 자기 세대의 입맛을 중시하는 식당을 경영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아직도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구나 하는 사실을 확인하며 나는 물큰한 감동에 사로잡히지 않을수 없었다. "그래, 호박잎은 사셨습니까?" 숟가락을 들다말고 나는 흥미로운 눈빛 으로 털보씨를 올려다보았다. "아, 물론이죠. 싱싱한 것들로 사왔으니까 이선생도 잠깐만 기다리세요 . 금방 데쳐서 된장하고 내오리다. "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자신이 직접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짱구씨와 호박잎을 데치는 시간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를 주고 받았다. 그리고 칠팔 분쯤 지난뒤, 차분하게 가라앉은 호박잎과 된장을 접시에 담아와 내 테이블에 얹어 주었다. 그리고 나서 사사로운 말로 한껏 기분이 좋아진 듯한 목소리로 털보씨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런 걸 먹으면 말이죠, 그 쌉싸름한 맛에서 물큰물큰한 추억이 배어 나옵니다. 어릴적에 살던 집 텃밭 풍경부터 꺼칠꺼칠하던 할머니 손길까지 기억에 서 되살아나니 밥을 먹는게 아니라 추억을 되새김질 하는 셈이죠. 하지만 요즘 세상에서야 어디 이런 걸 돈 주고 사먹을 수 있나요?돈이 아무리 많아도 추억은 못 사먹는 법이죠. " "덕분에 추억을 되새김질하게 됐군 요. 아무튼 잘 먹겠습니다. " 털보씨는 나머지 두 테이블의 손님들에게도 호박잎과 된장을 서비스 하고, 자신도 식사를 하기 위해서인듯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아주 사소한 것에서 큰 기쁨을 찾아낸 사람처럼 허둥거리는 그로 인해 실내에 의외의 활기가 넘치는 것 같았다. 호박잎 몇장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반짝거리는 온정으로 되살아날 수 있다는 게 사뭇 신기하게 여겨져서, 그래서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 아 있었다. 세상에 아직 이런 사람들이 남아 있다는 것,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김치찌개와 호박잎 쌈으로 식사를 하고 나서 나는 다시 오피스텔로 돌아 왔다. 그리고 한동안 소파에 몸을 묻고 쇼팽을 들었다. 나른한 건반음을 듣고 있노라니 기억의 암층이 슬그머니 열리며 아주 어 린 시절의 기억들이 방싯방싯 고개를 내밀었다. 진달래꽃을 따러가면 문둥이가 간을 빼 먹는다는 말을 듣던 시절, 줄기 째 서리한 콩을 불에 구워 먹으며 입 언저리를 검댕으로 물들이던 시절, 논바닥이 얼면 판자와 철사로 썰매를 만들어 진종일 얼음을 타던 시절… 나른하게 되새기다보니 맙소사, 이게 무슨 원시시대의 추억이란 말인가 , 하는 생각이 들어 화들짝 시계를 보았다. 1시40분. 나는 다시 무선전화기를 들고 하영의 패션숍으로 전화를 걸 었다. 정겹던 진달래 꽃과 콩껍질이 후드득, 논바닥으로 떠져 싸늘한 결빙의 시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예상했던 대로 전화는 하영이 아니라 미스 한이 받았다. "윤 선생님… 지금 부재중이신데요. " 미스한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하영이 패션숍에 있구나, 하는 걸 직감했 다. 오전에 전화를 걸었을 때와 달리 하영의 부재를 알리는 미스한의 목소리 가 사뭇 부자연스럽게 느껴진 때문이었다. 옆에 있지만 전화를 받기 싫다? 그래, 그런 모양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전화를 끊었다. 억지스럽게 그녀가 전화를 받는다고 해도 나로서는 선뜻 할 말이 없어서 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도 나름대로 시간은 필요할 터이고, 그것을 통해 나와 어긋나는 부분을 어떻게든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터였다.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결론이 나든, 이제 모든 결정권은 그녀의 수중으 로 넘어간 셈이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그것을 방해하거나 참견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기다려 보자. 기다려보는 수 밖에 달리 방도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침대에다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무래도 일진이 안 좋은 날인 모양이로구나, 하고 중얼거리며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슬그머니, 이예린과 만나기로 한 저녁 여섯시의 약속이 후회스러 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취소할까, 하고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순간, 전혀 다른 생각 한 가지가 퍼뜩 뇌리를 스쳐갔다. 그래, 왜 진작 그 생각을 못했던가! 나는 뛰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무선 전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114를 누르고 이예린이 근무하는 ABC방송국의 교환 전화번호를 문의했다. 그런 뒤에 방송국 교환번호로 전화를 걸어 이강현PD가 지금 어느 부서에 근무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교환원이 이, 이차장님요? 하고 단박 알은체를 하며 잠시만 기다 리라도 했다. 방송국 내부로 다시 신호가 가는 소리, 이어 수화기 안쪽에서 밀려나오 는 굵직한 바리톤 목소리. "이강현…차장님?" 지난 오 년 사이에 그가 차장이 되었다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 직함이 왠지 익숙하지 않아서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네, 제가 이강현인데, 누구시죠?" 사뭇 사무적인 어조로 그는 무뚝뚝 하게 되물었다. "저, 이본옵니다. 기억나세요?" "아, 이작가님! 이게 어쩐 일이십니까?"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기라도 하듯 그는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이며 반가워했다. 1995년, 그는 소설가 몇 명이 릴레이식 리포터로 참여하는 해외 탐험 프 로에서 함께 일을 하며 알게 된 나와 동갑나기의 프로듀서였다. "그동안 차장이 된 것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요. 아무튼 뒤늦게나마 축 하드립니다. " 말을 하는 동안, 그와 함께 몽고 국경지대의 벌판에서 주먹밥을 먹던 기억이 물큰하게 되살아났다. 말이 좋아 탐험팀이었지, 그런 풍경을 국내에서 연출했다면 보나마나 ' 국내에 떼거지 출현!' 하는 식으로 호들갑스런 취급을 받았을 게 뻔했다 . "명색이 좋아 차장이지, 내막을 알고 보면 옛날의 버스차장만도 못해요 . 그나저나 이작가님이 작년에 절필 선언을 했다고 해서 무슨 일인가 무 척 궁금하게 생각했었는데…. 혹시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뇨. 특별한 일은 없었습니다. 그저 글 쓰는 일이 벽에 부딪친 것 같아서 글을 쓰지 않는 것도 하나의 출구가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것 뿐이죠. 써도 그만 안 써도 그만 인 세상이니 조용히 내 자신에게 파묻히는 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이 들 어 자퇴를 했다고나 할까…뭐 그런 셈이죠." "하, 자퇴라니 정말 부럽네 요. 나도 하루에 열두번씩 이짓거리 그만둘까, 울화가 치밀고 혈압이 오 를 때마다 사표를 꿈꾸고 삽니다. 어차피 한세상 살다가는 거, 도대체 왜 이렇게 정신없이 돌아치며 살아 야하는가, 생각할 때마다 억울하고 어처구니가 없거든요, 정말 이렇게 들 볶이며 살다간 돌연사하기 십상이겠어요. " 모처럼 말이 통하는 동지를 만났을 때처럼 그는 격의 없이 투덜거렸다. "아무렇든 건강 조심하세요. 백야가 있는 나라에 가서도 해가 져야 하 루 일이 끝난다고 자정무렵까지 몰아부치는 게 우리나라 방송인들 근성 아닌가요. " 자정 무렵까지 어둠이 내리지 않는 백야지대의 5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필사적인 강행군을 계속하던 방송제작팀을 지켜보면서 나는 혀를 내두르다 못해 나중에는 그들이 나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란 걸 의심하기까지 했었다. 1995년 그때, 탐험 프로를 진두 지휘하던 이강현 피디의 눈에는 항상 핏 발이 서 있지 않았던가. "하하, 이 작가님, 아직도 그때 일을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그때야 내가 끗발이 없었으니 도리 없었죠. 정해진 제작비 에 정해진 일정, 게다가 땅덩어리가 워낙 넓은 나라였으니 악질이 되지 않고선 달리 방도가 없었던거죠 뭐. 아무튼 지금 돌이켜봐도 그때 정말 대단했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이렇게 몇년만에 전화를 주신 게 설 마하니 그시절의 내 악덕을 나무라기 위한 건 아니겠죠?" "아, 물론 그 런 건 아니죠. 사실은 뭣 좀 알아보고 싶은 일이 생겨서 전화를 드린 겁 니다. 어쩌면 부서가 달라서 모를 수도 있을 텐데…. 혹시 이예린 피디라고 아 시나요?" 묻고 나서 나는 어깨와 턱 사이에다 무선전화기를 끼우고 담배 를 피워 물었다. "아, 이예린 피디! 알죠. 그 친구 공채에서 수석으로 입사하고 얼마 전 에 특집 제작국으로 발령났죠. 근대 이 피디를 어떻게 아시죠?" "아, 별 일은 아닙니다. 얼마 전부터 이예린 피디가 출연제의를 해오고 있느데… 아시다시피 난 절필 선언까지 한 처지라서 전혀 내키질 않거든요. 그것도 다른 게 아니 라 내가 작년에 신문에 연재하다 중단한 소설을 재료로 삼고 싶어하는 것 같아서 말이죠. 듣기로는 다큐멘터리라고 하던데… 혹시 들어본 적 있나 요?" "아, 그럼요. 아다마다요. 그 다큐는 창사 특집으로 제작하는 거라 서 상당히 관심을 많이 기울이고 있어요. 내용은 저도 기획 회의에 참석 해서 알고 있는데, 전체 칠부작으로 나누어서 1900년대의 풍물과 정서, 그런 걸 재미있는 구성으로 되짚어 보게 하자는 것이죠. 간단히 말해 20 00년대를 맞이하는 특집으로 1900년대에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들을 되돌 아 봄으로써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겠다, 그런 게 제작 의도라고 할 수 있겠죠. 전당포라거나 양장점이라거나 대폿집이라거나… 뭐, 그런 것들 있잖습니까. " "그런데, 그런 풍물 특집에 어째서 첫사랑이라는 항목이 들어간 거죠?" "아, 무슨 말인지 이제 감이 잡히네요. 그러니까 이 작 가님에게 바로 그 첫사랑 항목의 섭외가 들어간 거로군요. 그렇죠?" 묻 고 나서 그는 세상 일이 정말 재미있게 돌아간다, 하는 듯이 껄껄 소리내 웃었다. "도대체 첫사랑이라는 항목이 그런 특집 다큐멘터리에 설정된 것도 이 해할 수 없지만, 하고많은 세상 사람 중에 왜 하필이면 나를 찍은 것 일 까, 그런 걸 납득하지 못하겠어서 전화를 드린 겁니다. 오늘 저녁에 이예린 피디를 만나기로 했거든요. " "그래요, 무슨 말인 지 알겠습니다. 애초에 기획 회의를 할 때도 그 부분에 대해 논란이 많았거든요. 철저하 게 풍물로 가자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는데, 첫사랑이라는 항목이 마지막 자리를 차지하게 된 건 전적으로 이예린 피디의 주장 때문이었어요. 그러 니까 이피디의 주장은 1900년대의 풍물을 통해 당시의 일반적인 정서를 되짚어보는 게 기획의도라면, 외면적인 변화만이 아니라 내면적인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줄수 있는 항목도 하나쯤 설정하는 게 마땅하다는 주장 이었죠. 그러면서 제시한 게 첫사랑이었는데… 이 피디의 주장에 상당한 설득력이 있었어요. 1900년대를 살았던 사람들은 첫사랑을 상당히 중요 한 인생의 덕목으로 생각했지만 오늘날의 젊은이들은 첫사랑이라는 말 자 체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산다, 이런게 요지였죠. 다시말해 2000년대 로 접어든 지금, 첫사랑은 이미 사어 (死語) 로 취급받고 있는 거나 다름 없다는 얘기였어요. 첫사랑이라는 관념은 이미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런 요지로 관계자들을 설득했던 거죠. " "이예린 피디도 첫사랑을 중시할 만한 나이가 아닌 것 같던데…. 첫사랑 이라는 관념이 지상에서 사라져버렸다는 주장을 관철시키고, 또한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들어낼 자신이 그녀에게 있었던 모양이죠?" 모든 얘기 가 결국 이예린이라는 인물로 귀결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기발한 아이 디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도 그녀의 주장을 강력하게 지지했 죠. 사실 이 피디의 말마따나 요즘 젊은 애들 중에 누가 첫사랑을 인생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하겠어요. 막말로 사람에 대한 기억도 물화시키 려고 덤벼드는 세상인데, 첫사랑이 얼마나 살 떨리는 경험이고 그것이 음 으로 양으로 인생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걔네들이 무슨 수로 이해할 수 있겠느냐, 그런 얘깁니다. " "무슨 얘기인지 알아듣겠습니다. 그러니까 결국 내 첫사랑을 모델 케이스로 삼아보고 싶다는 얘기인데… . 얘기를 듣고보니 더욱 난감해지는군요. " 미간을 찌푸리고 나는 피우 던 담배를 재떨이에다 비벼 껐다. "글쎄요, 이예린 피디가 이 작가님을 대상 인물로 선정하게 된 배경은 잘 모르겠지만 가능하면 협조를 해주시죠. 그 친구, 내가 보기엔 허투루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적당한 추측만으로 이 작가님을 섭외하려고 덤비지는 않을 거라는 거죠 . " "본인 얘기로는 내가 작년에 신문에 연재하다 중단한 소설을 읽었다 고 하던데…. 동기야 어찌됐건, 재능과 의욕을 지닌 젊은 사람에게 막무 가내로 거절을 하려니 그것도 쉬운 일만은 아닌 것 같군요. " "허어, 이 작가님, 자꾸 이러시면 이 피디가 아니라 내가 직접 섭외하려고 나설 겁 니다. 탐험 프로 만들면서 같이 죽을 고비를 넘겼던 기억 안 납니까? 해발 1천 7백미터에서 전복사고를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함께 살아난 사람이 부탁하 는데, 그래도 안 들어줄 수 있겠어요? 하하, 이건 농담이고…. 아무튼 좋 은 결과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언제 시간 나면 1995년을 회상하며 진하게 보드카나 한잔 하죠.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소파에 길게 몸을 눕혔다. 이강현 차장과 주고받았던 말들, 특히 1995년의 기억이 기이한 환각처럼 잠시 허공을 부유하다 맥없이 스러져갔다. 그리고는 오직 한 가지, 나도 모르게 의식이 한 사람의 자연인 쪽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이예린이라는 방송국 프로듀서가 아니라 이예린이라는 젊은 여성, 그녀 에 대한 관심에 미묘하면서도 날카로운 초점이 생겨나는 걸 느낄 수 있었 던 것이다. 이예린이 아니라, 이예린이라는 여자. 여섯시 십분전, 나는 오피스텔 일층의 커피숍으로 내려갔다. 습도와 밀도가 동시에 느껴지는 눅눅한 세상, 커피숍의 넓직한 공간에는 손님이 별로 없었다. 정원을 내다볼 수 있는 대형 창유리 옆쪽으로만 띄엄띄엄 몇명의 손님이 앉아 있었는데, 낯설고 먼 이방으로 떠나려는 사람들처럼 그들은 한결같 이 혼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커피숍이 아니라 열차를 기다리는 대합실 풍경을 떠올리며 나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옆 모습이 눈에 익은 한 남자, 담배를 태우며 안개비 내리는 창밖을 망 연히 내다보고 있는 오기욱의 모습이 불현듯 시선 끝에 닿았다. "어때, 술 마시기 좋은 날이지?" 옆으로 다가가서 나는 선 채로 입을 열었다. 그러자 놀란 듯 고개를 돌리고 그가 다소 몽롱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술이 아니라 식곤증을 다스리는 중이에요. 좀전에 식사하고 올라왔거 든요. 근데 여긴 어쩐 일이에요?" "누굴 좀 만나러 왔는데… 아직 안 왔 군. " 아직 이예린이 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그의 맞은편 에 앉았다. "누구…여자예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그가 비로소 말 똥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방송국 피디야. 며칠 전부터 해골 복잡하게 만드는 프로에 출연해 달 라는 제의를 하고 있는데… 오늘 만나서 확실하게 카운터 펀치를 먹일 참 이야. " "여자에게 카운터 펀치 먹일 일도 생기고… 이래저래 형은 심심 하지 않아서 좋겠수. " "그래, 요즘은 어떨게 지내냐?" 주문을 받으러 온 아가씨에게 좀 있다가 한 사람이 더 올 거라는 말을 건네고 나서 나 는 물었다. "사하라 사막을 맨발로 걷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 "사하라?"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이냐, 하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담배를 피워물었다. "사막 같은 나날을 산다, 그런 거죠 뭐. 혹시 배낭 여행 떠날 생각 없 어요?" "어디, 사하라 사막으로?" "아뇨, 기간도 정하지 않고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돌아다니는 배낭 여행요. 우리 같은 사람들, 돌아다니다 죽 는다고 해도 별로 억울할 건 없잖아요?" 지금처럼 사는 것보다 못할 게 뭐가 있느냐, 하는 표정으로 그는 말을 하고 나서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 었다. 여행이 아니라 현실에 대해 그는 진저리를 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식의 여행이라면 나는 동반자가 되기 어렵겠군. " "길에서 죽기 는 싫다, 그런 말인가요?" 고개를 갸우듬하게 기울이고 그는 나를 건너 다 보았다. "죽는 장소를 가리겠다는게 아냐. 문제는 아무곳으로 떠나는 것보다 아 무곳에나 눌러 앉고 싶다는 생각이 훨씬 더 강하다는 거지. 정말이지 이 젠 아무곳에나 눌러앉아서 죽을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지낼 수 있었으 면 좋겠어. 지친 건가?" "흠, 그렇다면 지금 형에게 필요한 건 딱 한가 지 겠네요. " "말해 봐. " "결혼. " "모든 정착 욕구가 결국 결혼으로 귀결된다는 건가?결혼은 남자들의 정착 욕구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아 주 동떨어진 도피책일지도 몰라. 결혼을 하고도 정착하지 못하고 끝없이 떠도는 영혼들은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아니면 무덤이죠 뭐. " 말을 하고 나서 킥, 그는 소리내 웃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연두빛 비닐 레인코트를 입은 이예린이 커피숍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오기욱은 다소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 와 이예린을 번갈아 보았다. "미안해요, 선생님, 제가 늦었죠?" 손목시계를 보고 나서 그녀는 담담 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아뇨…늦긴요. 나도 좀전에 내려온 걸요. " 반들반들한 연두빛 레인 코트와 그녀의 흰 얼굴, 그리고 숏커트의 머리 모양새가 한데 어울려 기 이한 신비감을 조성하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깜빡, 나는 일상의 흐름 을 놓치고 그녀에게 빠져들고 말았다. 만약 그 순간에 오기욱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면 한동안 그런 상태 로 넋나간 인간처럼 그녀를 바라보고 서 있었으리라. "음, 이럴게 아니 라 서로 인사부터 나누는 게 낫겠군요. "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게 다소 어색하게 여겨져서 나는 이예린과 오기욱을 번갈아 보며 일종의 제의를 했다. 그러자 오기욱이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이름을 먼저 말했다 . 잠시 오기욱을 눈여겨 보던 이예린, 그의 소설을 읽은 적이 있다는 말과 함께 자신의 신분과 이름을 밝혔다. 그런 뒤에 그녀는 내 옆자리에, 그러니까 오기욱과 마주되게 앉았다. 두 사람과 마주앉게 되어서인가, 다소 초조한 안색으로 오기욱은 담배 를 피워물었다. 그리고는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문득 고개를 들고 이예린에게 아주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예린씨… 정말, 피디 맞나요?"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 듣겠군요. 말씀을, 아니 알고싶은 내용이 뭔지 를 정확히 물어 주세요. 그럼 분명하게 대답해 드리죠. " 오기욱의 엉뚱 한 질문을 그녀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없이 냉랭한 어조로 되받아쳤다. "내 질문에 여러가지 뜻이 내포된 것 같다, 그런 말이요?" "모르시겠 다면 제가 정리해 드리죠. 정말 피디가 맞냐는 질문은 제가 피디처럼 생 기지 않았다는 뜻인가요, 아니면 피디의 생김새가 정형화돼 있다는 뜻인 가요? 그도 저도 아니면 제가 신분을 위장하고 피디로 행세하는 사기꾼처 럼 보인다는 뜻인가요?" "세가지 다 아니요. 내가 알고싶은 것은 오직 한가지, 이예린씨가 정말 피디인가 아닌가하는 것뿐이요. 난 극도로 단순 하게 물었는데, 얘길 듣고보니 사유 구조가 상당히 콤플렉스형인 것 같군 요. 단순한 질문엔 단순한 대답이 가장 적절한 것 아닌가요?"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는 의도적으로 이예린에게 약을 올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쳐놓은 그물에 그녀의 요체가 걸려들기 를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그런 대답이라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겠군요. 그런 궁금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 그런건 오선생님의 소설에 나오는 대화 한 구절을 인용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테니까요. " "내 소설?" 자세를 고쳐앉으며 오 기욱은 순간적으로 긴장하는 표정을 보였다. "알아서 무엇하나, 지나가는 인연이려니… '붕새' 라는 단편소설에 그 런 구절이 있었죠. 본인이 직접 쓰신 건데, 기억나지 않으세요?" 꼿꼿한 자세로 이예린은 오기욱을 노려보았다. "흠, 엉뚱하게도 내가 놓은 덫에 내가 치이게 되는군. " 피우던 담배 를 재털이에 비벼끄며 오기욱은 혼잣말을 했다. 그러고 나서 그때까지와 달리 아주 흔쾌한 표정으로 이예린을 건너다보 며 또다시 엉뚱한 말을 했다. "이예린씨와 대화를 하니까 기분이 무척 좋아지는군요. 이런 스릴은 참 오랜만인데…. 두분이 약속을 하셨다니 난 이쯤에서 그만 물러나죠. 하 지만 두 분이 얘기를 나누다 무료하거나 따분하다는 생각이 들면 아무 때 나 연락하세요. 술 한잔 사고 싶군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담백한 표 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제서야 나에게 시선을 주며 미묘한 표정으로 물었다. "여기, 아니면 어디죠?" "여기, 아니면 '잃어버린 지평선' 이지 뭐. " 여기, 아니면 '잃어버린 지평선' 이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말이냐고 , 오기욱이 커피숍을 빠져 나가자마자 이예린은 물었다. 그래서 아마 이예린씨가 생각하는 그대로일꺼요, 하고 나는 다소 눅눅한 어조로 대답했다. 어째서 오기욱이 이예린에게 그런 태도를 보였을까. 그런게 나도 모르게 마음 한 구석을 찜찜하게 만드는 것 같아서였다. 여자를 대하는 그의 단순직설적인 태도를 모르는 바 아니었지만, 그럼에 도 불구하고 그가 이예린에게 보인 태도에서는 왠지 모르게 극단적인 느 낌이 가시질 않았다. 그는 단순직설적으로 여성을 깔보는 인간형이었지만, 이예린에게 보인 태도에서는 외형적인 무례함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과 전혀 다른 무엇인가 가 직감적으로 느껴졌던 것이다. 위악적인 관심이랄까, 뭐 그런 것. "기분이 얼떨떨하지 않소?" 그녀에 게는 레모네이드, 나에게는 작은 맥주 한병이 날라져 온 뒤에 나는 물었 다. "음, 오기욱 선생님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기욱이 아니라, 오기욱 이 던진 말때문에 기분이 상하지 않았냐는 거요. " 맥주병을 들어 한 모 금 마시고 나서 나는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리고 그녀를 물끄러미 건너다보며 팽팽한 젊음의 긴장감과 군더더기라 곤 털끝만큼도 없어보이는 담박한 외모를 완상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면에서는 그냥 아름답다, 하고만 말할수 없게 만드는 또다른 미적 요소가 신비스럽게 숨을 쉬고 있는 것 같았다. 내게 아주 특별하게 느껴지는 미적 분위기, 이런 것을 오기욱도 간파한 것일까. "오 선생님 말씀이 다소 선정적이긴 했지만… 저에겐 구태의연 하고 따분한 말보다 그렇게 선정적인 말들이 훨씬 상큼하게 느껴져요. 예 상할 수 있는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가 제일 견디기 힘들거든요. " "흠, 이건 정말 뜻밖의 얘긴데… 본능적으로 동족을 알아보고 서로 교신을 했 다는 말처럼 들리니 갑자기 소외감이 느껴지는군요. " "제가 드린 말씀 에는 다른 뜻도 포함돼 있는데, 그냥 소외감만 느껴지세요? " 스트로로 레모네이드를 빨아들이고 나서 그녀는 함초롬히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나 를 건너다 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말은 결국 나에게 방책을 치는 얘기로구만. 예상할 수 있는 대화를 주고받는 경우가 제일 견디기 힘들다는 건, 보나마나 지 금부터 내가 이예린씨와 주고받을 대화를 염두에 두고 한 말 아니겠소. 간단히 말해 이예린씨가 지금 나에게 미리 선수를 치고 있다는 얘기… 내 가 잘못 짚은 거요?" 아마 잘못 짚은게 아닐 거다, 하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아무튼 저는 이선생님께 출연 승낙을 받으러 왔고, 그 부분에 대해 구 태의연한 대답을 듣고 돌아가고 싶진 않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예스, 하 고 한마디만 대답해 주시면 너무너무 좋을텐데… 제가 너무 성급한가요? " 함초롬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그녀는 물었다. "보다시피 이예린 PD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나는 맥주를 마시고 있으 니 일단 나로서는 어제의 약속을 지킨 셈인데… 오늘은 또 예스라는 대답 을 해달라 그런 말이요?" "네, 그런 말이예요. 이선생님이 실수로라도 예스, 하고 발음을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그것이 설령 실수라고 해도,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려는 사람들 이 있거든요. 이건 일종의 직감 같은건데… 이선생님이 그런 분 같아요. " "그러니까 더더욱 섣불리 대답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거요. 근데, 이 PD는 사랑을 해본적 있소?" 문득 떠오르는 궁금증을 나는 여과없이 그 대로 입밖으로 꺼냈다. "아뇨… 아직요. 근데 그런 건 왜 물어보시는 거죠?" 다소 경직된 표 정을 지으며 그녀는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첫사랑 경험도 없다는 거요?" "없어요. " 굳은 표정으로 그녀 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 창사 특집 다큐멘터리에다 굳이 첫사랑이라는 항목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뭐요?" "그걸… 제가 그걸 주장했다는 걸 어떻게 아셨죠?" 너무 놀랍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벙그렇게 입을 벌렸다. "정보가 필요하다면 나도 그정도쯤은 얼마든지 알아낼 수 있는 거요. " 굳이 이강현 차장과 통화했다는 얘길 꺼낼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 각이 들어 나는 빙그레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방송국에, 누구 아시는 분 계신가 보군요. " "아무튼, 그런 건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니까 내 궁금증부터 먼저 풀어줘요. " "첫사랑 경험과 방송프로제작에 관한 아이템은 전혀 별개예요. 그래도 굳이 이유를 밝히 자면… 제가 그것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이본오 선생님때문이라 고 말할 수 있을 거예요. " "나?" 너무 놀랍다는 표정으로 이번에는 내 가 벙그렇게 입을 벌렸다. "왜 그렇게 놀라세요? 제 말은 이 선생님이 신문에 연재하다 중단한 그 소설…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그 소설을 읽으면서 첫사랑이라는게 한 사람의 인생에 이렇게 지대한 영 향을 미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처음했고… 중단된 이후의 얘기가 너무너무 궁금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나를 사로잡 았던 것은 에메랄드 궁전이었어요. 그거,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녹 색 궁전 맞죠?"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그녀는 물었다. "환상이 유지되는 궁전과 환상이 깨지는 궁전… 맞아요. " 환상이 유 지되는 궁전의 녹색 지붕, 녹색 담장, 녹색 문, 녹색 방, 녹색 천장, 녹 색 마루를 머리속으로 그리며 나는 머리를 끄덕였다. 내 마음의 에메랄드 궁전, 그것은 아직도 환상이 유지되는 마법의 궁전 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내 가슴에 아로새겨준 여자는 자기 인생의 마법을 물리치 기 위해 스스로 환상이 깨지는 에메랄드 궁전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 여자, 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생겨난 내 영혼의 첫번째 상처가 아니었 던가. "저는 첫사랑을 잘 모르는 세대이지만… 선생님이 중단하신 그 궁 전을 꼭 제 손으로 완성하고 싶어요. 프로그램 타이틀까지 다 구상해 놓 았으니까 절대로 노, 라고 말씀하시면 안된단 말예요. 아셨죠?" "타이틀 ?" "네, 이런 거예요. '첫사랑…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 뭔가, 아릿 한 정서가 떠오르지 않나요? 지금 제 머리 속에서는 벌써 촬영이 진행되 고 있어요. " 자신에게 필요한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재빨리 말머리를 돌렸다. 내가 오기욱에게 말한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장소를 옮겼으면 좋겠다 는 말을 꺼낸 것이었다. 그리고 덧 붙이기를, 출연자의 성향을 파악하는 것도 연출자의 몫이라고 했다. 도리 없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그러자고, 나는 그녀의 제의에 동의했 다. 하지만 예스와 노, 그런 것에 대해 나는 여전히 아무런 마음의 결정도 내릴 수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만드는 미묘한 마음의 딜레마…. 이예린의 특 정 부분에 내가 은밀하게 결속되고 있는 것 같다는 감정이 점점 더 농밀 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얼라리오?" '잃어버린 지평선' 으로 들어서자 정마담이 눈을 휘둥그 렇게 뜨고 나와 이예린을 번갈아 보았다. 궁금증과 놀람과 은근한 비아냥거림까지 함축한 말, 그것이 그녀 특유의 입버릇인 '얼라리오' 라는 걸 내가 모를 리 없었다. 어제는 하영이를 데리고 오더니 오늘은 또 다른 여자냐? 하는 듯한 눈빛 으로 그녀는 나와 이예린을 훑어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평상시처럼 바에 앉지 않고 홀의 가장 구석진 테이블 앞으로 갔다 . 그리고 이예린은 벽을 향해 앉게 하고 나는 벽을 등지고 앉았다. 낯선 공간을 처음 경험하는 사람에게는 가시권이 좁은 방향을 권하는게 일종의 예의라는 생각, 그리고 정마담의 쓸데없는 눈길을 피하게 해 주 고 싶어서였다. 세상만사 온갖 것에 시시콜콜한 관심을 나타내는 그녀의 눈빛에는 언어 이상의 기운이 깃들어 있어서 이예린처럼 젊은세대들은 자칫 오해를 하 기 십상 일 터였다. 아니 말을 바꾸면, 그것은 이예린과의 동행으로 내가 이미 정마담의 눈 빛을 의식한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피디가 아니라 여자, 비즈니스가 아니라 사적인 만남을 갖고 있다는 은 밀한 심사. "제가 오늘 대답을 들을 수 있을까요?" 작은 맥주병을 들어 건배를 제안하며 이예린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예스냐 노냐, 그거 말이요?" "노는 없어요. 제게 필요한 대답은 오직 예스뿐이에요. 어떤 인내심을 발휘해서라도 반드시 대답을 듣고야 말겠 어요. " 오피스텔 커피숍에서와 달리 그녀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이예린 피디의 의지 때문에 맥주가 얼어버리겠네. 지금 필요한 건 얼리는 게 아니라 녹이는 거 아뇨?" "앗!정말 그렇군요. 그럼 일단 드 세요. " 장난스런 표정을 지으며 그녀는 맥주병을 부딪쳤다. "그런데… 아직 사랑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다는 말은 정말이요?" "네 . " 문득 의표를 찔린 사람처럼 그녀는 또다시 표정이 굳어졌다. "우스꽝스런 질문 같지만…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거요?" "아뇨 . 아직 이 선생님 같은 분을 못 만나서요. " 자신의 경직된 표정을 의식 한 때문인가, 그녀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였다. "나 같은 사람을 만나지 못한 건 세상에 나보다 못한 사람이 없기 때문 일 거요. 그런 말은 유머가 아니라 욕이니까 참고할 것. " "아뇨. 이건 진심이에요. 자신의 첫 사랑을 이렇게 평생 가슴에 묻고 사는 사람이 있 다면… 난 그게 누구이든 사랑에 빠졌을 거예요. 요즘 세대들에게는 그런 가슴이 없거든요. 사람도 사물의 일종으로 대하니까 정서적인 교류도 하 기 힘들어요. 그래서 나는 내가 속한 세대를 빙하세대라고 불러요. 인간 적인 측면에서는 정말 을씨년스럽거든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실제 로 한기를 느끼는 사람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내가 이 집의 미네르바인데 어째서 나에게 이 요정처럼 생긴 아가씨를 소개시켜 주지 않는 거지?" 맥주를 예닐곱 병쯤 마셨을 때, 정마담이 특별 서비스라며 햄치즈 한 접시를 직접 들고왔다. 그리고는 이예린을 자신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은 걸 사뭇 못마땅하게 여 기고 있었던 듯한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래서 풋, 하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나는 그녀의 불만을 되받아 쳤다. "지혜의 여신이 요즘은 노망이 들은 모양이야. 아직 남들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나는 속일 수 없지. " 공교롭게도 그때 서빙하는 아가 씨가 다가와 내게 전화를 받으라고 했다. 누군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하며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 잘됐다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리고 내가 전화를 받고 올 동안은 자신이 요정아가씨를 대접해 주겠다 며 능갈맞은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즐거운가요, 지금?" 전화를 걸어올 사람이 달리 없으리란 생각으로 수화기를 들었는데, 예상대로 오기욱이었다. "나도 즐거웠으면 좋겠는데 쉽지 않다. 뭐하고 있냐?" "나요?… 흐, 지금 보드카 마시고 있어요. 인생처럼 술 맛 한번 진탕 쓰네요. " 취기 때문인가, 평상시의 나른함이 도발적인 객 기로 변해 있는 것 같았다. "혼자 마시는 거야?" "혼자 마시잖으면, 내게 누가 있겠어요? 형이 노 는 계집이라도 하나 불러줄래요?" 은근히 노기를 품은 듯한 어조로 그는 이기죽거렸다. "빌어먹을, 혼자 청승 떨지 말고 일루 기어내려와!" "후, 기어내려 오 라구요? 걸어가고 싶은데… 그 여자는 아직 있나요?" "맙소사… 그래서 전화한 거냐?" 그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나는 다소 당황한 어조로 되물었다. "그럼요, 형 보다야 맘에 드는 여자가 우선이죠. 내가 내려가도 정말 괜찮겠어요?" "내려와서 무슨 짓을 할 작정인데?" 그가 여자에 대해 기 질적으로 지니고 있는 맹목적인 저돌성과 파행성, 그리고 지난번의 가면 무도회를 떠올리며 나는 은근히 걱정스런 어조로 물었다. 하지만 동문서답. "형, 생각보다 훨씬 심각하게 됐어요. 내 영혼의 휴 화산이 갑작스럽게 활동을 시작했다 이런 말이라구요. 그러니 잠시뒤면 '잃어버린 지평선' 도 뜨거운 용암으로 뒤덮일 거에요. 이 일을 어쩌죠? " 전화를 끊고 자리로 돌아오자 내 자리에 앉았던 정마담이 굼뜨게 자리에 서 일어났다. 이예린과 주고받던 대화를 마무리 지으려는듯 아무튼 웃겨요, 웃겨, 하 면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는 허리를 곧게 펴고 비로소 정황을 알만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 았다. 보나마나 이예린의 정체, 그리고 그녀가 나와 동행하게된 정황을 물어보 고 알아냈으리라. "웃기는 마담, 이제 그만 원위치 하시지. " 사뭇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턱을 들어 바를 가리켰다. 하지만 지난밤, 그녀가 하영에게 쓸데없는 말을 지껄임으로써 그녀와 나 사이에 문제가 생겼다는걸 알 턱이 없는 그녀는 여전히 넉살 좋은 표정 으로 입을 놀려댔다. "요정 같은 아가씨를 만나더니 완저히 안면을 바꾸는구만. 이놈이나 저 놈이나 그놈이나…하여튼 남자놈들이란 이래서 대책이 없다니까, 대책이 없어. " 투덜거리면서 정마담은 바가 있는 쪽으로 걸어나갔다. "저분, 정말 미네르바 같아요. 음, 짧은 동안 얘기를 나누면서 저는 내 내 거미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이예린이 기다렸 다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은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거미?" "왜 있잖아요. 미네르바와 베짜기를 겨루다가 벌을 받아서 아 름답던 모습이 끔찍스런 거미로 변하고, 몸에서 빠져나온 실에 평생 매달 려 있게된 아라크네라는 아가씨 말예요. 미네르바가 그 아가씨에게 내린 벌은 정말 지혜롭지 못해요. " 생각만 해도 오싹하다는 표정으로 그녀 는 어깨를 움찔했다. "흠, 제법 사람보는 눈이 있네요. " "그래서 내가 마음 속으로 무슨 주문을 외웠는지 아세요?" "주문이라니…신통한 마법이라도 부릴 줄 안 단 말이오?" 맥주병을 들어 올리다 말고 나는 동작을 멈추었다. "에페 푸페 카케!히로 호로 헤로!지지 사크 자크!" "……" 양손의 검 지를 세우고 귀염성이 느껴지는 동작으로 주문을 외는 그녀를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온몸이 나른해지는 걸 느꼈다. 어떻게 그녀가 저런 걸 외고 있단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열여덟살이 되던 해부터 앉으나 서나 자나 깨나 내 마음의 간절한 기원 을 실어보내곤 하던 그 주문 - .그것은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주문 이었고 등에 날개가 달린 원숭이를 부를때 사용하는 주문이었고,에메랄드 궁전을 내 마음에 아로새겨준 여자가 가르쳐 준 주문이었다. "이예린씨… 더이상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지 말아요." 그녀를 건너다보 며 사뭇 몽롱한 표정으로 나는 중얼거렸다. 날개 달린 원숭이를 부를 때 사용하는 주문을 그녀가 의도적으로 외고 왔건 아니었건, 결과적으로 그녀는 나의 과거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그런 주문을 그녀가 외고 있을까. 아무리 머리가 비상하다고 해 도 정말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단하죠. 예스, 하고 대답해 주시면 더이상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 께요. " "… 오기욱이 올거요. " "설마, 일부러 오라고 하신 건 아니겠 죠?" 미간을 찌푸리며 그녀는 물었다. "간단히 말합시다. 지금 나로서는 도무지 이예린씨에게 예스라고 대답할 수 없어요. 그런데 도 이렇게 함께 앉아 술을 마신다는거… 이런 모순이 나를 혼란스럽게 한 다는 거요. 명쾌하고 분명한 게 좋은데, 이상하게도 이예린씨에게는 감정 이 애매해지는군요. " "그런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분명하니까. " 축축하게 습기가 느껴지는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보았다. "어떤 식으로 분명하다는 거요?" "…" 나의 물음에 그녀는 아무런 대 답도 하지 않았다. 맥주병을 손에 들고 다소 몽환적인 표정으로 재클린 오나시스와 헵번의 패널이 걸린 검녹색의 우측 벽면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을 뿐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그 두명의 여자는 정마담이 특히 좋아하는 인물들이 었다. 재클린 케네디였다가 재클린 오나시스가 된 여자, 그리고 '로마의 휴일 ' 에 등장한 순진무구한 공주의 이미지를 평생 유지한 여자. 그것은 서로 상반된 두개의 이미지가 기이한 조화를 나타내는 경우였다. 그래서 어쩌다 한번씩 그 패널들을 올려다볼 때마다 나는 극과 극이 조 성해내는 신비스런 조화의 세계를 감지하곤 했다. 아득한 이쪽과 아득한 저쪽의 교류. 그래, 세상에는 언설로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든지 있는 법이었다.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도 나는 환상이 유지되는 에메랄드 궁전에 살고 있 지만, 환상이 깨지는 에메랄드 궁전으로 떠난 여자를 불화의 감정으로 생 각해 본적이 단 한번도 없었다. 살아서 두번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거리에 그녀의 궁전이 있다고 해도 마 찬가지, 그녀와 나 사이의 결속감을 단 한번도 부정적으로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과거는 과거, 현실은 현실이라는 식의 이분법적 발상으로 마음 을 정리할 필요도 없었다. 사막한 세상을 견디게 해주는 기억의 궁전, 그런 것이라도 없었다면 어 떻게 예까지 사람답게 흘러올수 있었을까. 검은 잠바에 검은 선글라스를 쓰고 손에는 붉은 장미 한 송이를 든 남자 가 실내로 들어섰다. 장님도 아닌데 오밤중에 무슨 선글라스인가 싶어 나는 실내를 두리번 거 리는 그에게 뜻없는 시선을 주었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을 받고 서서 사내는 잠시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하며 손에 들린 장미를 가볍게 흔들어 보였다. 그가 바로 오기욱이라는 걸 알아 차리고 나는 실성한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 하느님 맙소사. "내가 분위기 깨는 거 아닙니까?" 내 옆자리에 앉 아서야 그는 비로소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는 들고온 장미 한 송이를 불쑥, 이예린 앞으로 내밀었다. "이게 뭐죠?" 장미를 받지 않고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이예린이 물었 다. "이건…보다시피 꽃이죠. 장미입니다. 꽃집 앞을 지나다가 문득 사게 됐어요. 하지만 아무런 뜻도 없이 산 건 절대 아닙니다. " "그 뜻이 뭔지를 알아야 받든가 말든가 하죠." "관심입니다. " "이성적인 관심인가요?" "물론이죠.""무시당하는 것보단 낫겠군요. 암튼 고마워요." 이예린은 선선히 꽃을 받아 옆자리의 핸드백 위에 올 려 놓았다. "난 장미를 팔러온 장님인 줄 알았는데…한밤중에 무슨 퍼포먼스냐?" 오 기욱 앞으로 맥주 한병을 밀어주며 나는 다소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 방심하다가 보기좋게 한방 얻어맞은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지금 기분이 굉장히 좋아요. 심계 항진이 일어나는 게 느껴질 정도라니 까요. 그나저나 두분 사이의 대화는 끝난 건가요?" "아뇨, 아직 진행중 이에요. " 내가 해야할 대답을 이예린이 대신했다. "오호라, 그럼 내가 부담스럽게 느껴진다. 그런 말씀인가요?" "아뇨. 이 선생님이 딱 한마디로 된 대답만 하시면 되니까 오선생님과는 상관 없어요. " "딱 한마디로 된 대답이라…예를 들자면 예스냐 노냐, 그런거요?" "네, 정확하게 맞추시는군요. " 맥주 병을 만지작거리며 이예린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도 결정을 못 내렸어요?" 오기욱이 나에게 물었다. "쉽지 않아. " 담배를 피워물며 나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형답지 않은 갈등이네. 이젠 직관이 무뎌진 거요?" "직관의 문제가 아냐. 문제의 본류에서 벗어나서 오류가 발생하고 있는 거지. " 구체적 인 대답은 아니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이예린에 대한 내 사적인 감정이 오류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오류가 아니라 뭔가를 두려워하시는 거 아닌가요?" 눅눅한 습기가 느 껴지는 눈빛으로 이예린은 나를 건너다보았다. "아무튼 이예린씨, 이건 정말 무책임한 대답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나 에게 좀더 시간을 주면 안되겠소?" "정 그러시면… 내일까지요. 그이상 은 정말 곤란하거든요. " 다소 실망스런 표정으로 대답을 하고 나서 그 녀는 또다시 오드리 헵번과 재클린 오나시스의 패널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오기욱이 기다렸다는 듯 자세를 고쳐 앉으며 입을 열었다. "이예린씨, 내가 웃기는 얘기 한가지 할까요?" "제가 웃지 않아도 상 관없나요?" 담담한 표정으로 이예린은 응대했다. "그럼 말을 바꾸죠. 정말 우습지도 않은 얘긴데… 나, 이예린씨에게 빠 져버렸어요. " 맙소사, 하는 표정으로 나는 오기욱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예린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나를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 보드카를 혼자 얼마나 마시고 왔길래 이렇게 미친 소리를 지껄여대는 건 가, 감정적인 당혹감이 이내 불쾌감으로 변해 나는 눈살을 찌푸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놓고 덤비는 형국 아닌가. "운명의 그림자라도 밟으신 모양이죠?" 사뭇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이예린은 오기욱을 보았다. "나는 대상을 있는 그래도 보고 느껴요.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때 일체 의 가식이나 수식을 사용하지 않아요. 간단히 말하자면 형식을 부정하고 본질을 존중하는 거죠. 이예린씨를 처음 본 순간, 거의 몇초만에 나는 본질적인 힘에 사로잡혀 버렸어요. 오늘 오후까지만 해도 심장을 도려내 고 싶을 정도로 외로웠었는데… 지금은 삶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어 요. 이런거, 정말 놀랍지 않은가요?" "아뇨, 전혀 놀랍지 않아요. 저와 상관이 없는 일… 그냥 오선생님에게만 생겨난 특별한 일인 것같다는 생 각이 드네요. 그런게 정말 놀라운 일이 되려면 저에게도 그런 감정이 생 겨나야 하니까요. " 별일도 아니라는듯, 이예린은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오기욱의 감정고 백을 물리쳤다. 잠시 할말을 잃고 앉아있던 오기욱은 사뭇 자조적인 표정으로 풋, 하는 입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맥주병을 입에 물고 벌컥벌컥 소리가 날 정도로 그것을 마셔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반병이상 남아 있던 맥주를 말끔히 비워내고 나서 그는 아주 흔 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무튼 감정표현을 하고 나니 속이 시원하군요. 나쁠건 없겠죠?" "글 쎄요, 지나치게 일방적인 감정표현… 그런 것도 일종의 폭력 아닌가요?" 말을 하고나서 이예린은 핸드백을 들고 상큼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 나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선생님, 장미가 술에 취하면 어떻게 되는지 그것도 내일 알려 주세 요. 예스, 하고 대답하신 뒤에 말예요. " 오기욱은 담배를 피워물고 나 는 이예린이 걸어 나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그녀가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간뒤 나는 종업원 아가씨를 불러 위스키 스트레이트를 더블로 달라고 했다. 그러자 오기욱이 비로소 나를 돌아보았다. "형, 기분 나빠요?" "혼란스럽다. " "장난이 아니란 건 알겠죠?" "그래, 돌개바람도 울고 가겠다. " "형, 이럴게 아니라 우리 오늘 완전히 돌아버립시다. " 오기욱이 담배를 입에 물고 맥주병 마개를 열때, 출입문이 열리고 체 격이 건장한 삼십대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뒤를 이어 니트 슬립 원피스 위에 노란색 프린트셔츠를 덧입은 날씬한 몸매의 여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날라져온 위스키가 내 앞에 놓이던 그 순간, 공교롭게도 여자와 나의 시 선이 마주쳤다. 그녀, 1503호의 은미였다. 밤에 피는 장미. 이예린이 맥주병에 꽂아놓고 간 장미꽃 너머에서 은 미는 사뭇 불안정한 동작을 보이고 있었다. 나를 향해 어설픈 표정을 짓다가 도저히 안되겠다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남자의 양복 소매를 잡아당겼다. 남자가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인상을 찡그리며 뭐라고인가 남자에게 말을 건냈다. 그러자 남자가 실내를 전체적으로 한바퀴 둘러보고는 그녀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 오빠, 여기 맘에 안들어. 다른데로가. - 그래? 그럼 그러지뭐. 은미와 사내가 주고받았을 말을 상상하며 나는 물끄러미 그들이 빠져나 간 출입문을 바라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은미가 왜 다른 사내와 이곳에 나타난 것일까, 하는 궁 금증을 같은 것도 생겨나지 않았다.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깡말라 있던 영우에 대해서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그들의 철없는 첫사랑, 그런게 한심스런 파행의 구렁텅이로 빠져 들어가 거나 말거나, 그런게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랴 싶었다. 한마디로 말해 감정 상태가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본오 형, 인간은 말요, 아주아주 미쳐야할 필요가 있어요. 평균치의 성실성 같은 건 죽었다 깨어나도 이 세상을 구원하지 못한다 이거요. 형 에게 내가 가장 불만스러워하는 것, 그게 뭔지 아쇼?" 보드카에 맥주를 섞어 마신 탓인가, 오기욱의 눈빛은 이미 많이 흐려져 있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종업원 아가씨에게 다시 한 잔의 위스키 스트레이트 더블을 주문했다. 그러자 취흥이 극도로 고조된 사람처럼 어깨를 흔들어대며 오기욱이 다 시 입을 열었다. "나는 형이 자신의 감정을 조절하는 능력이 아주아주 불만스러워요. 인 간이 말요, 그래, 하물며 인간이 어떻게 설계 도면대로 지어진 건축물처 럼 감정을 구사할 수 있겠소?설령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우리같은 인간들 은 끝없이 실패하고, 자신의 감정을 매번 무허가 건축물로 규정해야 한다 , 이런 말이요.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주거부정의 정신상태를 유지해야 한 다…그런말인데 젠장, 지금 내 말을 듣기나 하는 거요?형이 절필하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그 건축물 같은 사고 방식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말이요. " "계속해봐. " 위스키 잔을 손에 들고 맥주병에 꽂힌 장미를 노려보며 나는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내 영혼의 활화산에서 이예린이 불타고 있어요. 내가 믿는 건… 흠, 내가 그녀를 사랑하면 그녀도 나를 사랑하게 될 거라는 거죠. 그리고 이런 신념은 종교를 뺨칠 만큼 순수하고 지고해요. 이런 감정, 형도 알 죠?" "……"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나는 손에 든 위스키 잔을 단숨에 비워냈다. 그리고는 속깊은 곳에서 연기처럼 치밀어 오르는 취기를 느끼며 맥주병 에 꽂힌 장미를 향해 슬그머니 손을 뻗었다. 꽃잎의 부드러운 감촉 속에서 이예린의 모습이 아련한 향기처럼 되살아 났다. 하지만 마법의 주문을 외울 줄 아는 그녀,에메랄드 궁전의 신비를 알고 있는 그녀에게 술에 절은 장미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단호하게 꽃을 꺾어버렸다. 그리고는 빙그레 웃어보이며 오기욱에게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래, 네 말대로 오늘은 완전히 돌아버리자. " 모든 것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 넓지 않은 골목 이쪽에서 저쪽까지, 형형색색의 네온사인이 춤을 추듯 너울거리고 있었다. 그 종말적인 불빛은 온갖 풍경을 흔들리게 하고 종내에는 제 스스로 흔 들리는 듯하지만, 기실 그것이 그렇게 보이는 것은 바라보는 자의 시선이 흔들리기 때문일 터였다. "그래, 이건 중심의 문제가 아니야. 빌어먹을 세상, 도대체 중심이 어 디 있다는 거지?" 보얗게 안개 끼어 있는 듯한 골목길을 거의 마지막 지 점까지 걸어들어가면서 나는 몇번이나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알 수 없는 분노와 오기와 짜증을 견디면서 나는 두 눈을 부릅뜨고 오기욱을 뒤따라 걸었다. 걸은게 아니라 흔들렸고, 흔들린게 아니라 휘청거린 것이었다. "여기가 맞는데… 쓰펄, 방향이 전부 뒤틀려 있잖아. 도대체 어디로 간 거지?" 녹색 네온사인이 나붙은 모텔 뒤편의 붉은 벽돌건물 앞에서 오 기욱은 사방을 두리번 거렸다. "뭘 찾고 있는 거냐, 지금?" 건물 담벼락에다 등을 기대고 희붐한 허 공을 올려다보며 나는 물었다. "언제나 이런게 문제인데말요… 난 술에 취하면 방향감각이 없어져 버 려요. 동서남북을 가늠하기 어려운 사막에 버려져서 살껍질이 바짝바짝 타들어가는 것 같단 말예요. 하지만 이 건물 어딘가에 틀림없이 안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있을 거예요. 저저… 저 파라볼라 안테나 보이죠?" 건 물 옥상에 설치된 포물면꼴의 은빛 안테나, 그것을 손으로 가리키며 그는 위태롭게 흔들거렸다. "어디, 외계인이라도 만나러 가는 거냐?" 눈을 가늘게 뜨고 안테나가 아니라 탁하게 내려앉은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이기죽거렸다. 그러자 그가 흐, 하고 괴기스럽게 웃어보이며 나를 노려 보았다. "형, 우린 지금 악마의 소굴을 찾고 있는거요. 그리고 그곳에서 우리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넘기고 그 대가로 환락을 얻게 될 거요. 계율과 조 건의 세계를 망각하게 하는 환락의 평화… 그 완벽한 자유가 목마르게 그 립지 않소?" "만약 지금과 같은 기분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면… 너 같은 놈들은 하루에도 수십명씩 죽일 수 있을 것 같다. 한번은 머리를 잘라 죽이고, 한번은 심장을 도려내 죽이고, 한번은 사지 를 절단해 죽이고… 그런 식으로 버라이어티 쇼를 하듯 응징의 쾌감을 맛 볼 수 있을 것 같단 말이다. 너, 죽고 싶으냐?" 내 두 눈에 가득한 살의, 세상에 대한 혐오의 빛 - 그것을 확인해 보라는 식으로 나는 올곧게 그를 노려보았다. "호호, 정말 오랜만에 형의 입에서 영혼의 소리가 밀려나오는군. " 머리를 세차게 뒤흔들고 나서 그는 다시 한번 건물 옥상에 설치된 파라 볼라 안테나를 쳐다 보았다. 그런 뒤에 건물 우측으로 다섯 걸음쯤 걸어 나갔다. 그러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고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아냐, 아냐, 하고 혼잣말을 했다. 건물 윤곽이 두개 세개로 분열되는 걸 그의 배경으로 지켜보며 나는 담 벼락에 등을 기댄 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래, 니미랄! 오른쪽 아니면 왼쪽이겠지!" 욕을 내뱉고 나서 오기욱 은 몸을 돌려 건물 왼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몽롱한 취기 속에서도 나는 비로소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건물은 아무리 살펴보아도 유흥업소 건물이 아니었다. 얼핏 올려다보아도 4층 높이는 족히 될 것 같았지만, 건물의 어느 곳에 도 네온사인 따위는 나붙어 있지 않았다. 유흥업소 건물도 아닌 곳, 그것도 출입구가 아니라 외곽을 뱅뱅 돌아치 는 이유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웃기는 자식아, 지금 마법의 문이라도 찾고 있는 거냐?" 뒤쪽의 모텔 옥상에서 쏟아지는 네온사인의 녹색 기 운을 눈여겨 보다가 나는 세차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건물 왼쪽으로 걸어가던 그의 모습은 어느새 사각지대의 어둠 속 으로 파묻혀 버린 뒤였다. 방향치 같은 놈 하고 중얼거리며 나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때 건물 왼편의 어둠 속에서 오기욱이 튀어나오며 사뭇 흥분한 목소리 로 나를 불렀다. "형, 찾았어!드디어 입구를 찾았다구!"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에 문 채 나는 건물 왼편으로 걸어갔다. 담장과 건물사이. 둘이 걸어들어가기에도 협소한 공간이 뒤편으로까지 이어져 있었다. 하지만 불빛 한 점 없어서 그 뒤편에 무엇이 있으리라고는 저승 사자도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젠장, 이런 곳에 도대체 뭐가 있다는 거야?" "으르렁거리지 말고 기 다려 보기나 해요, 형. " 건물 뒤편으로 거의 마지막 지점에 이르러 그 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건물 뒷벽 쪽으로 난 희끄무레한 철문 주변을 더듬거렸다. 잠시 뒤, 그래, 여기 있구나, 하고 그가 어둠 속에서 낮게 중얼거렸다. 곧이어 삐이, 하고 안쪽으로 인터폰 들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몇초 뒤, 인터폰에 부착된 작은 스피커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밀 려나왔다. "어디서 오셨나요?" "부에노스 아이레스" 망설이지 않고 오기욱이 대 답하자, 잠시만요, 하고 여자가 말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가 도대체 무슨 암호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인간과 인간사이의 소통방식이 이런 식으로 은밀해지고 난해해지고 있다 는 것. 그런건 이제 조금도 놀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몇초가 지난뒤, 여자가 다시 스피커 폰으로 물었다. "부에노스 아이레스… 오기욱씨?" "오케이!" 비로소 원하는 접속이 이루어졌다는 목소리로 오기욱이 흔쾌 히 대답했다. 곧이어 철문이 열리고 푸르스름한 불빛이 밀려나왔다. 오기욱이 내손을 잡아끌며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가슴 부분이 깊게 팬 검정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 부분에는 고양이를 상징하는 듯한 가면이 씌워져 있어 서 얼굴을 식별할 수 없었다. "두분인가요?" "둘. " 감정이 배제된 듯한 여자의 물음에 오기욱이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따라 오세요, 하고 말하고 나서 여자는 검푸른 조명이 밝혀진 좁 은 통로를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곧게 이어진 좁은 통로 양옆으로는 즐비하게 방들이 이어지고 있었고, 검게 도장된 방문 위에는 '판도라' , '다프네' , '아르테미스' , '에오스 ' ,…등등의 이름이 나붙어 있었다. 희랍 신화에 등장하는 여신과 요정의 이름을 아마도 호실 명칭으로 사용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렇든 그곳은 지나치게 낮은 조명과 괴기한 정적으로 인해 악마적인 분위기가 절로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들어가세요. " 여자가 오기욱과 나를 안내한 곳은 '헤라' 라는 이름 이 나붙은 방이었다. 헤라, 질투심 많은 제우스의 아내가 도대체 이 방과 무슨 연관이 있는가 . 정말 웃긴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무지 웃을 만한 분위기가 아니라서 나는 입구에 선 여자를 힐끗 훔쳐보고는 오기욱을 따라 방으로 들어갔다 . 그러자 여자가 밖에서 문을 닫았다. 헤라의 방. 그리 넓지 않은 원룸형의 실내 중앙에는 편안한 소파와 탁 자가 놓여 있었고, 천장에는 바둑판 무늬처럼 만들어진 여러가지 색상의 조명판이 부착돼 있었다. 내가 길을 잃은 아이같은 표정으로 멍청하게 서 있을 때, 오기욱은 어느 새 소파에 앉아 탁자 위에 올려져 있던 은빛 리모컨을 손에 들었다. "이거 하나로 비디오, 오디오… 그리고 천장에 부착된 조명판의 색상까 지 선택할 수 있어요. 비디오는 프로노부터 스포츠, 레이싱, 영화까지 있 고, 오디오로 말하자면 장르별 음악이 다 있으니까 뭐든 원하는 대로 말 해봐요. " 득의만면한 표정으로 그는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그가 리모컨으로 지시하는 방향, 그러니까 출입문 맞은편 벽쪽에 벽걸이 형 액정 모니터와 스피커가 부착돼 있었다. 잠시 멍한 표정으로 서 있다가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입을 열었다. "다 필요 없으니까 조명이나 녹색으로 바꿔. " "사랑이라는 거, 어차피 심리적인 게임 아닌가요? 그런 걸 통해 불멸을 꿈꿀 작정이 아니라면 차라리 게임의 논리로 받아들이는게 훨씬 더 인간 적일 수 있다는 게 내 생각이라는 거죠. 그리고 형에게는 말이죠, 사랑을 지나치게 성화 (聖化) 시키려는 정신적인 고집같은 게 있어요. 하지만 난 그런 걸 일종의 왜곡으로 생각해요. 간단히 말해 형과 나는 인생과 사 랑을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태도가 다르다, 이런 말이라구요. " 오기욱이 뭔가를 더 말하려고 양손을 들어올려 열정적인 제스처를 취할 때, 출입 문이 열리고 얼굴에 가면을 쓴 여자가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안으로 들어오지는 않고 출입문 바깥쪽에 서서 오기욱에게 이렇 게 물었다. "어느 분이시죠?" "나요. " 대답을 하고 나서 오기욱은 소파에서 몸 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콧살을 찡그리고 나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형, 아무렇든 문제가 좀 우습게 되긴했지만…. 나머지 얘긴 내일 나누 기로 하고 어쨌거나 여기서 즐거운 시간 보내요.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감각을 열어놓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 여기에서도 얼마든지 천국을 경험 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형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런 경험이 필요하다는 거, 잊지마쇼. " 경험이 풍부한 선배가 후배를 타이르는 듯한 표정으로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방을 나갔다. 출입문 앞에 서서 기다리던 여자와 함께 그가 사라진 직후,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피워물고 망연한 표정으로 녹색의 기류가 느리게 굼실거 리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처음과 달리, 열여덟 시절의 내 자신이 명징하게 되살아나는 듯 하던 기분은 더이상 들지 않았다. 온갖 세속에 물들어 탁하고 혼미해진 영혼의 소유자, 마흔셋의 퇴락한 심신이 밤과 취기의 미혹으로 깊이깊이 빠져드는 것 같았을 뿐이었다. 잠시뒤,가벼운 노크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출입문이 열렸다. 그리고 처음의 여자와 차림새는 동일하지만 몸매가 몹시 가냘프게 보이 는 여자 하나가 철제 캐리어를 앞세우고 조용한 동작으로 안으로 들어섰 다. 캐리어에는 양주와 생수, 음료수, 컵과 안주 따위가 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헤라의 방에 오신 걸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 탁자 옆까지 캐리어를 밀고온 여자, 양손을 앞으로 모으고 다소곳한 자세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다소 당황스런 기분이 들어서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물끄러미 여 자를 올려다보았다. "이곳에는 처음 오신 모양이죠?" 캐리어에 실린 것들을 조심조심 탁자 위로 옮기며 여자가 물었다. "그렇소, 이렇게 묘한 분위기의 술집은 난생 처음이요. " 녹색 조명에 물든 여자를 아련한 눈빛으로 건너다보며 나는 대답했다. 눈 부분을 가면으로 가리긴 했지만 오똑한 콧날과 단정한 턱선, 그리고 도톰한 입술선이 한데 어울려 은근한 미감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무도 이곳을 술집이라고 부르지 않아요. 뮤즈의 낙원, 그렇게 부르 거든요. 근데 이 조명은 선생님이 선택하신건가요?" 내 잔에다 양주를 따르며 여자가 물었다. "그렇소, 내가 선택한 거요. 이상하게 느껴지나요?" "아뇨, 이상하지 않아요. 그냥, 녹색 조명을 선택하신 분이 처음이라서요. 대부분 블루가 아니면 핑크, 그런 걸 좋아하거든요. " "혹시 '오즈의 마법사' 를 읽어 본 적 있소?" 제발, 하는 심정으로 나는 간절하게 물었다. "네, 어릴 때 읽었어요. " "그럼 오즈의 마법사가 사는 에메랄드 궁전 도 알겠군요. 모든 것이 녹색으로 된 궁전. " "네, 물론 생각나요. 집도 사람도 모두모두 녹색인 궁전…, 거기선 과자도 녹색이었죠. " "고맙소 . " 깊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불쑥,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입밖으로 튀 어나갔다. 양주병을 들어 나는 그녀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그리고는 다시 한번 아련한 눈빛으로 그녀를 건너다 보았다. "에메랄드 궁전에 얽힌 사연이 있으신가보군요. " 차분하게, 내 표정 을 통해 뭔가를 감득해낸 듯한 목소리로 여자는 말했다. "사연이 아니라 상처. " "그럼 선생님은 정말 이곳에 잘 오셨군요. 뮤 즈의 낙원은 바로 그런 상처를 위로 받을 수 있는 곳이거든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내가 들어올린 잔에다 자신의 그것을 조심스럽게 갖다 댔다. 가벼운 입맞춤처럼 잔이 맞닿을 때, 왠지 모르게 그녀가 깊은 이해심을 지닌 여자처럼 느껴졌다. "쾌락을 통해 상처를 위로한다, 그런 말이요?" "아뇨, 쾌락은 아닐 거 예요. 설령 쾌락이라고 해도 그것이 인간에 대한 사랑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 얼마든지 그 이상의 것이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저는 이런 일에 종사하는 것 조금도 이상스럽게 생각하지 않아요. 인간들은 서로서로 상 처를 주지만, 그걸 위로하고 치료해 주려고 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거든요 . 그래서 세상이 지옥 같아지는 거 아닌가요?" "오, 지옥같은 세상의 천사가 바로 이곳에 있었군. 그런데, 천사가 자신 의 얼굴을 가리는 이유는 뭐요?" 그녀가 따라주는 잔을 다시 받으며 나 는 물었다. "그건 손님들에게 환상을 주기 위해서예요. 예를 들어 말을 하자면…… 음,에메랄드 궁전과 선생님 사이에 아픈 사연이 얽혀 있다고 가정하면, 선생님이 저를 그 사연의 대상으로 상상할 수도 있다는 거예요. 가면과 술, 뭔가 잘 맞아떨어지는 것 같지 않나요?" "일종의 사이코 드라마로 군. 정신병을 치료하는 방법으로 환자들이 직접 자기 불행의 주연 역할을 하는 연극 말이요. " "네, 원리는 비슷한 거죠. 누구나 상처받고 영혼 이 병들어가는 과정, 그게 또한 인생 아닌가요?" 녹색으로 물든 입술을 동그랗게 오무리며 여자는 물었다. "근데, 헤라. 당신은 어떻게 그렇게 말을 조리정연하게 잘하는 거요? 혹시, 이런 질문이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당신의 학력을 알고 싶소. " "죄송해요. 여기서는 손님들에게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절대 언급할 수 없어요. 신상명세가 노출되면 가면이 무의미해지고…… 게다가 환상이 깨 어지거든요. " "그럼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환상으로 빠져드는 일과 술을 마시는 일, 그리고 또 뭐가 있소?" 다시 잔을 비우고 아슴한 눈빛으로 그녀를 건너다보며 나는 물었다. 취기 때문인가, 그녀의 피부를 적시는 녹색 조명이 흥건한 수분처럼 선 정적으로 보였다. "무엇이든, 선생님이 원하시는 건 다 할 수 있어요. " "다?" 지나치 게 모호한 느낌과 지나치게 뚜렷한 느낌이 동시에 들어서 나는 물었다. "선생님은 남자고 저는 여자예요. 그리고 여기는 녹색 조명으로 채색된 뮤즈의 낙원이예요. 저는 선생님이 상상하는대로 변할 수 있는 여자이고 , 선생님이 원하시는대로 응할 수 있는 여자예요. 오늘밤, 선생님이 낙원 의 주인공이라고 생각하시면 되는 거죠. " 미묘한 신비감을 느끼게 하는 어조로 여자는 차분하게 말했다. "결국 모든게 나를 위해 존재한다, 그런 말이로군요. " "네, 원하시면 언제든 저를 가지실 수 있어요. " 그녀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온 순 간 나는 뭔가가 섬뜩하게 뒷덜미를 만지는 것 같아서 어깨를 흠칫했다. 하지만 다소 초조한 표정으로 다시 한잔의 술을 마신 직후부터 나는 참 으로 예사롭지 않은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것의 일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녀도 말없이 나의 주시를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내가 지닌 환상의 실체. 괴괴한 정적과 끈끈한 녹색 기류가 뒤섞이는 동안, 나의 시야에서 여자는 서서히 모습이 뒤바뀌기 시작했다. 일체의 생각을 버리고 감각을 열어놓고 있으면 만사 오케이라던 오기욱 의 말이 맹렬한 독기운처럼 혈관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여자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더 이상 나의 눈에는 가면이 보이지 않았 다. 아니 가면이 보여도 가면 뒤의 얼굴이 누구인지를 나는 확실하게 알고 있다고 단정하고 있었다. 오, 이런 신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나는 환상이 깨어진 에메랄드 궁전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리고 비탄과 시름으로 나날을 보내는 가련한 한 여자와 조우하고 있었 다. 오랜 세월동안 내가 그토록 궁금해하고 목말라하던 그녀 인생의 미지 ( 未知) , 그것이 이제 내 목전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었다. 가슴이 저리고 사무쳐서인가, 나도 모르게 서서히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 했다. 그래서 거푸 두 잔의 술을 마시고 나서 나는 가까스로 이렇게 입을 열었 다. "결국 이런식으로라도 언젠가는 만나게 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이건 내가 꿈꾸던 방식은 결코 아닙니다. " "날 원망하고 있나요?" "원망이 아니라 당신에 대한 연민 때문에 난 너무 일찍 늙어버렸는지도 몰라요. 갓스물부터 지금까지 마음에 두 개의 서로 다른 궁전을 지니고 살아왔으니 그 버거움을 말해 뭣 하겠어요. 난 지금도 환상이 유지되는 에메랄드 궁전에 살고 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연스럽고 행복한 삶이 아니라 갇혀 지내는 삶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어 요. " "…생각해 보면 누구나 갇혀서 사는 거죠. 연민을 지니고 있으면 마음의 성벽이 더욱 견고해지는 법이예요. 진정 날 사랑했다면, 나로 인 해 자신을 가두지 말고 나를 위해 자신을 풀어주세요. " "난 환상이 깨 진 에메랄드 궁전에서 당신이 날마다 슬픔과 비탄에 젖어 나날을 고통스 럽게 보낼 거라는 생각을 하며 젊은날을 보냈어요. 그리고 녹색 피톨이 뛰던 젊은날은 이제 스러졌지만, 그래도 나는 내 정신의 본향처럼 지금도 여전히 당신을 목말라하고 있어요. 이제 그만 환상이 깨진 당신의 궁전 을 포기하면 안되나요? 그리고 죽기전에 한번만이라도, 당신과 내 영혼의 결핍을 메우기 위해 살아가면 안되나요?" "…모든게 안타깝고 아쉽다고 해도, 그래도 돌이킬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렇게라도 만날 수 있다는 거, 이런 환상을 다행스럽게 생각하세요. 인생은 너무 건조하고, 인간들은 너무 메말라 있어요. 하지만 이제 모든 상처를 잊고 나를 느껴 보세요. 이렇게 환상이 유지되는 공간에서는 내가 당신을 얼마든지 촉촉 하게 적셔줄 수 있어요. 그러니 지금, 아무것도 망설이지 말고 나에게 오 세요.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대로 나를 느껴 보세요. " 온몸이 녹색으로 물든 여자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가 앉아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녹색 손을 들어 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뒤로 쓸어넘겼다. 그런 뒤에 녹색 입술로 내 이마에 입맞춤을 했다. 그녀의 가슴에 무너지듯 안기며 나는 정신이 점점 더 혼미해지는 걸 느 꼈다. "나는 추억을 그리워하는 게 아니예요. 다만…" 그녀의 젖무덤에 얼굴 을 묻고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가락 하나를 나의 입술에 갖다대며 쉿, 하는 소리를 냈 다. 깊은 현기를 느끼며 나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온몸이 지층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현기를 느끼면서도 나는 안간힘을 다해 그녀의 입술을 찾았다. 그리고 아침이슬에 젖은 풀잎처럼 촉촉한 감촉을 느끼며 오래오래 그녀 의 입술을 탐닉했다. "나를 원하세요?" 나의 귓전에다 그녀는 젖은 입김을 불어넣었다. 말없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가 소파의 등받이에다 나를 기대게 하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 어났다. 그리고는 내게 등을 보이고 검정 원피스의 뒷부분에 달린 지퍼를 내려 달라고 했다. 자세를 고쳐 앉으며 나는 손을 들어 지퍼를 내렸다. 그러자 주르륵, 물이 흘러내리듯 원피스가 한순간에 밑으로 흘러 내렸다 . 놀랍게도 여자는 원피스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녹색의 알몸. 나는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녀의 알몸을 올려다보았 다. 몸매의 윤곽선 안쪽에서 부드럽고 자연스런 음영이 생겨나 팽팽한 탄력 과 질감을 느끼게 햇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그녀의 젖가슴에 갖다댔다. 그러자 아, 하는 탄성을 터뜨리며 그녀가 선 채로 고개를 뒤로 젖혔다. 살아서 출렁거리는 물결처럼 그녀의 온몸이 굼실거리는 것 같았다. 그 부드러운 율동을 따라 나의 심신은 빠르게 가열되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마. 제발 움직이지 말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기원하며 그녀의 온몸을 애무해 나갔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몰두하고 있는 한없는 얇은 환상의 피막을 본능적으 로 두려워한 것이 었다. 하지만 어느 한 순간, 부주의한 동작 하나로 인해 그녀의 실체가 연기처 럼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는 극도의 긴장감 때문에 나의 흥분은 더욱 고 조되기 시작했다. "이제 그만 가면을 벗고 싶어요. 불으 끄면 안될까요?" 어느 순간인가 , 그녀가 나의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안돼. 그러면 모든게 사라질 거야. 그러니까 가면도 벗지 말고, 불도 끄지마. " 고개를 들고 그녀를 올려다보며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 다. 눈을 떴을 때 나는 혼자 누워 있었다. 검정 원피스와 가면 차림의 여자, 다시 말해 섹스를 나눈 여자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술병과 잔, 안주접시가 올려져 있던 탁자도 말끔히 치워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명도 처음 방으로 들어서던 때처럼 검푸르스름한 상태로 바뀌어 있었다. 잠시 눈을 껌뻑거리다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나는 침대에서 내려와 탁 자위에 올려진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4시20분. 지난 몇시간 동안 파란만장한 꿈을 꾸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 이 이를데 없이 산만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탁자 위에 반듯하게 개켜진 옷을 서둘러 입고 밖으로 나갈 채비 를 했다. 갈증도 나고 끽연 욕구도 느껴졌지만, 일단은 밖으로 나가고 보자는 생 각으로 나는 황급히 출입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지하 무덤 같은 정적. 지난 밤 취중에 걸어 들어왔던 복도는 깊은 어 둠에 파묻혀 있었고, 실내의 어느 곳에서도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 얼핏 오기욱의 행방이 궁금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도 역시 마찬가 지, 일단은 여길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총 총히 복도를 걸어나갔다. 그리고는 복도가 끝나는 지점의 신발장에서 구두를 찾아 신고 곧바로 철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무슨 징크스인가. 지난번 오기욱을 따라갔던 가면무도회장에서 혼자 도망쳐 집으로 돌아올 때처럼 밖에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지난 밤, 그와 함께 이곳으로 올 때까지만 해도 멎어있던 비가 내가 취 기와 환상에 빠져있던 지난 몇 시간 동안 다시 내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 아무렇든 기분이 몹시 불유쾌한 새벽, 비라도 내리는 게 차라리 다행스 럽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대로가 있는 곳까지 총총히 걸어나와 지나가는 빈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물먹은 솜처럼 가라앉아가는 육신과 가시지 않은 취기를 견디 기 어려워 목적지를 말하고 나서 곧바로 의자의 등받이에다 깊숙이 몸을 묻고 눈을 감아버렸다. 무슨 생각을 할 수 있으랴. 정말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눈을 감고 있어도 뇌리에 떠오르는 것들, 생각을 하지 않아도 저절로 뇌 리를 스쳐가는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방치한 채 나는 반주검 상태의 인간처 럼 달리는 가속력에 모든 걸 실어버렸다. 비 내리는 신새벽, 아직 차량의 소통이 그리 많지 않아서인지 택시는 엄 청나게 빠른 속도로 달려나갔다. 눈을 감은 채 온몸으로 그 가속력을 느끼자니 차량이 질주하는 향방을 전혀 자각할 수 없었다. 특정한 목적지가 아니라 내가 상상으로도 꿈꿀 수 없는 공간, 어쩌면 이 미 현실이 아닐 수도 있는 공간을 미친 듯 질주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무슨 일인가. 내가 탄 택시가 제법 빠르게 좌회전을 하는게 느껴지고 이어 왜엥, 왜엥, 왜엥, 하는 구급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귓문으로 밀려 들기 시작했다. 혼몽한 상태에서도 구급 사이렌 소리가 상당히 빠른 속도로 나에게 가까 워지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꼼짝 않고 그것을 듣고 있자니 마치 내 자신이 지금 구급차에 실려 어디 로인가 위태롭게 이송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급하게 울려대는 구급 사이렌 소리를 듣다 못해 나는 가까스로 눈을 뜨고 비내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전방 칠팔미터쯤 앞, 희붐하게 젖은 어둠속에서 이제 막 119구급차량이 언덕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황급히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피니 불이 꺼지고 셔터가 내려지긴 했지만 아주 익숙한 동네라는 걸 단박 알아차릴 수 있었다. '잃어버린 지평선' 과 '짱구네 식당' 이 있는 동네, 바로 그 지점을 나 는 지나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 망연한 표정으로 나는 다시 전방을 내다보았다. 다른곳에서가 아니라 내가 살고 있는 오피스텔 건물에서 구급차가 내려 오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다. 내가 취기와 광기에 사로잡혀 있던 지난밤, 누군가 생사를 다투는 고통 에 밤새 시달렸을지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하니 갑작스럽게 등골이 서늘해 졌다. 누군가 죽음의 고통과 싸우는 순간에 쾌락과 환상의 난 바다를 부유하고 있었다는 것… 죄스러워라. 집으로 돌아와 옷을 벗어던지고 나는 곧장 욕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고는 좌변기에다 머리를 처박고 무엇인가를 토해내기 위해 목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밀어넣었다. 하지만 별로 먹은게 없어서인가. 끈끈한 타액 이외엔 아무것도 넘어오느 게 없었다. 굵은 눈물 줄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릴 정도로 목구멍을 들쑤셔댔지만 마 찬가지, 쓰디쓴 위액 이외에 더이상은 아무것도 넘어오지 않았다. "지금 네가 토해내고 싶어하는게 뭔지 알기나 하냐… 이 한심한 영혼아 . " 눈물을 질금거리며, 변기통에다 머리를 처박고 나는 쥐어짜는 소리 를 뱉아냈다. 그렇게 몇분쯤 더 앉아 있다가 간신히 몸을 일으켜 입을 헹구고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추어블 정제로 된 아스피린 두 알을 씹어먹고 던지 듯 침대에 몸을 눕혔다. 하지만 왜엥, 왜엥, 왜엥, 귓전으로 여전히 구급사이렌 소리가 밀려드는 것 같아 도무지 눈을 감고 있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시 눈을 뜨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반쯤 몸을 일으켰다. 안구가 뻑뻑해지면서 깊은 현기가 느껴지는 이런 순간, 인간의 정신이란 얼마나 비정하고 잔혹스런 육신의 가해자인가. 쓰러지듯 다시 자리에 누 워, 그것이 내가 알고 있는 마지막 구원의 방법이라도 되는양 나는 이렇 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에페푸페카케… 히로 호로 헤로… 지지 사크 자크…" 멀리, 푸르스름하게 동트는 지평선 위로 등에 날개가 달린 원숭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수십 수백 마리로 보이는 그것들은 저공 비행을 하는 편대처럼 일정한 대형을 갖추고 날아오고 있었다. 중요한 인물을 호위하듯 중심을 에워싸고 둥글게 둥글게, 이제 막 터져 오르는 박명을 배경으로 장관을 이룬 그것들을 나는 놀라운 눈빛으로 바 라보고 있었다. 지극히 짧은 파장처럼 기대감과 설렘,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이 무시로 교차되는 순간이었다. 아. 거기, 편대를 이룬 듯한 중심부에서 강렬한 광채가 쏟아지는걸 보 면서 나는 깊은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것들이 내가 서 있는 상공을 선회하기 시작했을때, 난 중심부 를 날고 있는 한 마리의 황금빛 원숭이와 그것의 등에 올라앉아 연해 내 게 손을 흔들고 있는 한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이미랑, 하고 나는 다시 한번 탄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그녀가 해맑게 웃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 직후부터 원숭이들의 선 회를 따라 돌며 정신없이 허공을 향해 손짓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찌된 셈인지 원숭이들은 지상으로 내려앉지 않았고, 그것들을 따라 도는 맴돌이로 인해 나는 점점 더 깊은 현기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착시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황금빛 원숭이 등에 올라앉은 여자의 얼굴, 그것이 한차례의 맴돌이가 끝날 때마다 다른 사람의 얼굴로 변하곤 한 것이었다. 이미랑.이예린.윤하영, 그리고 가면의 여자…. 이윽고 어지럼증을 참 지 못하고 나는 선 자리에서 그대로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한동안 모든 것을 체념한 심정으로 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놀랍게도 모든 것은 사라지고 없었다. 날개 달린 원숭이들.이미랑.이예린.윤하영, 그리고 가면의 여자까지, 내 가 올려다보는 허공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 뒤에 나는 1503호, 그러니까 은미와 영우가 동거를 하는 공간에 누워 있는 내자신을 발견했다. 오, 하느님 맙소사! 이제는 내 자신이 한 마리 날개 달린 원숭이가 되 어 1503호의 침대에 누워 있는 나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푸른 줄무늬의 시트가 덮인 침대 위에서 나는 알몸이 된 은미의 몸을 정 신없이 탐닉하고 있었다. 실내의 구석진 어둠 속에서 영우가 표정없는 얼굴로 은미와 나를 지켜보 고 있었다. 하지만 은미를 안고 있는 나는 그것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날개 달린 원숭이가 된 나는 그것을 전체적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은미는 내 머리를 끌어안고 미친 듯이 몸부림을 치고 있었고, 그것이 내 영혼의 무덤이라도 되는 양 나는 정신없이 그녀에게 굴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구석진 어둠속에 서 있던 영우가 창백한 얼굴로 걸어와 내 등에 손을 댔을때…헉, 하고 기도가 막히는 소리를 내지르며 나는 기급하듯 잠에서 깨어났다. "영원한 사랑의 궁전. " "아니, 불멸을 닮아가는 어리석은 순수. " "그럼 이제 에메랄드 궁전의 문을 열어 보세요. " 누군가. 연해 울려대는 벨소리를 들으며 나는 눈을 뜨고 퍼뜩 고개를 들어올렸다. 얼핏 강렬한 녹색 광채가 섬광처럼 시야를 스쳐갔다. 그래서 아직도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세차 게 머리를 흔들었다. 발코니를 넘어온 햇살이 어느덧 침대를 반쯤 뒤덮고 있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나는 비로소 눈을 뜨던 순간에 내가 얼핏 보았던 녹색 광채의 실 체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현실적인 시간을 직유하는 햇살, 그것이 따갑게 내 눈을 찔러댄 것이었 다. 오후1시40분. 출입문 앞으로 걸어가며 나는 벽시계를 올려다 보았다. 지난 잠의 모든 일들이 전생의 기억처럼 흐리마리하고 덧없이 허전하게 느껴졌다. 그래서 모든게 지겹고 역겹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출입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십줄의 낯선 사내 하나가 물끄러미 문밖에 서 있다가 다소 경 직된 표정으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이거… 정말 죄송하게 됐군요. 주무시고 계신 줄 몰랐습니다. " 내 눈을 올곧게 주시하며 그는 태연하게 말했다. 운동선수처럼 짧고 단정하게 자른 머리모양새, 후줄근한 회색 체크무늬 의 상의와 검정 바지, 그리고 다소 무뚝뚝해 보이는 얼굴 생김새가 한데 어울려 미묘한 긴장감을 발산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구시죠?" 꾸역꾸역 근거를 알 수 없는 노기가 치밀어 올랐지만, 애 써 태연을 가장하고 나는 물었다. 그러자 말없이 그가 양복 안주머니에서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내게 보였 다. "경찰이 왜… 내게 무슨 볼 일이라도 있으신가요?" 그가 내민 경찰 신 분증을 들여다 보고나서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 사실은 1504호가 아니라 여기, 1503호 때문에 온 겁니다. 여기서 오늘 새벽에 일어났던 일 아시죠?" 의식에 푸른 섬광 같은 게 날아와 박히는 걸 느끼며 나는 순간적으로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껏 1503호에서 일어난 일을 모르고 계셨단 말인가요?" 경찰 신분증을 다시 양복 안주머니에다 넣으면서도 그의 눈빛은 지속적으로 나의 표정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럼 1503호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내가 다 알고 있어야 하나요? " 갑자기 그가 짜증스럽게 여겨져 나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양미간을 찌푸리며 그가 다소 당황하는 표정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정색을 하고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거기 살던 남자가 오늘 새벽에 죽었습니다. " "죽었다…구요?" 1503호에 살던 사람이 누구였던가, 그것도 순간적으로 기억이 나질 않아서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순간적인 의식의 공황 상태, 아니면 지나치게 확고한 현실감 때문에 오 히려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아서였다. 1503호, 영우와 은미, 그리고 영우의 추락사 - 그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으며 그것들 사이에는 또한 무슨 연관성이 있다는 것일까. "사인은 추락사입니다. 같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시 나요?" "그럼 영우가 자살을 했단 말인가요?" 출입문을 좀더 열고 안으 로 들어오라는 시늉을 하며 나는 그에게 대답 대신 엉뚱한 물음을 되돌려 주었다. "지금으로선 그렇게 추정하고 있지만 일단 조사를 해 봐야죠. 동거를 하는 여자가 이 시간까지 나타나지 않는 것도 이상하고…그래서 주변 조 사라도 먼저 해 두려고 이렇게 방문을 한 겁니다. 방해가 됐다면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 안으로 들어선 그는 세심한 눈빛으로 실내를 한바퀴 휘둘러보았다. 그러고 나서 내가 권하는 대로 소파로 가 앉았다. 뭘 좀 마시겠느냐고 내가 건성으로 묻자 그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보이 며 묻지도 않은 위궤양 얘기를 꺼냈다. "만성 위궤양이라는데…이 시간만 되면 골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속이 쓰리고 아프거든요. 일종의 직업병이죠. "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어넘 기며 나는 냉장고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거기서 마시다 남겨둔 위스키를 꺼내 병째 두어 모금을 마셨다. 그리고 잠시 멍청한 표정으로 서서 물끄러미 형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소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양복 상의에서 수첩과 펜을 꺼 내들었다. "간단히 몇가지만 묻고 돌아가겠습니다. 불쾌하게 생각하시지 말고 아는 대로만 대답해주십쇼. 1503호에 사는 두 사람과는 평소에 알고 지내던 사이였습니까?"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 도 하지 않고 나는 묵묵히 그가 앉아 있는 소파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와 마주되게 앉고 나서 태연하게 담배를 피워물었다. 그러자 형사, 인내심을 발휘하는 표정으로 묵묵히 앉아서 나의 대답을 기다려 주었다. 하지만 나는 거의 오분 정도, 그러니까 담배 한대를 다 피울 동안 아무 런 말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오직 한마디의 말, 영우가 어제 아침에 나에게 남긴 마지막 말에 요지부 동의 상태로 사로잡혀 있었을 뿐이었다. - 선생님. 혹시 오늘 저녁에 시간 좀 있으신가요? 어제 아침, 나는 영우의 표정과 태도를 완전히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 태연하게 왜곡하고, 그것도 모자라 죽음의 두려 움에 떨고 있는 그의 요구를 단호하게 물리쳐버린 것이었다. 그는 은미의 방탕한 생활과 자신의 무기력한 젊음을 절망한 게 아니라 사랑의 종말, 그리고 거기서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허무에 오랫동안 시달 려온 것이었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손에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에게 시간이 있냐고 물 었던 것인데…. 약속을 앞세워 나는 구원에 대한 그의 갈망을 무심하게 저버리고 만 것이었다. 그리고 환상의 바다를 부유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새벽길, 그의 주검이 실려나가는 앰뷸런스와 산자와 죽은자로서 마지막 조우를 한 것이었다. …은미나 내가 이렇게 사는건 이제 별로 의미가 없어요, 처음에 그녀와 함께 집을 나올 땐 평생 목숨을 걸고 함께 살겠다는 의지가 있었는데… 허망하게도 지금은 아무것도 남겨진게 없어요. 은미가 없는 시간에 오피 스텔에 혼자 남아 있으면… 내가 마치 허수아비가 되어 공중에 매달려 있 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말 한심한 거죠. 단 한번의 사랑에 모든 걸 걸고, 단 한번의 실패로 목숨을 끊어버릴 수 있는 순수를 나는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스물셋, 그는 첫사랑의 실패를 비관한 게 아니라 두번째의 세번째 사랑 의 불가능성을 이미 감지해 버린 것이었다. 인생이 기술이나 요령으로 유지될 수 없다는 건 그가 스물셋이기 때문에 오히려 서른셋이나 마흔셋보다 훨씬 명료하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고 , 그것을 통해 그는 인간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사랑의 기회가 오직 한번 뿐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첫사랑의 성패가 아니라 그것을 통해 눈 뜨게 되는 인생의 무서 운 내막, 다시말해 우리 모두가 막무가내 식으로 도외시하고 지나치는 사 랑의 진실을 그는 한치도 비켜 서지 않고 앙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 "1503호에는 들어가 봤나요?" 피우던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 서 나는 묵묵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형사에게 물었다. "네, 들어가 봤습니다. 혹시 유서 같은 거라도 남겼을까 싶어서 두어시간 가까이 조사를 해봤지 만 특별한 건 아무것도 없더군요. 정황으로 봐서는 자살 같은데…은미라 는 여자의 행방이 묘연하니까 나도 모르게 다른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지 는군요. 세상에는 우리 같은 형사들도 선뜻 상상할 수 없는 고약스런 일 들이 워낙 많이 벌어지니까 말입니다. " "가령, 동거하는 여자에게 정부가 생겨서 영우를 살해했을 가능성이 라거나…혹은 1504호에 사는 사람과 우연히 말다툼을 벌이다 과실치사가 일어났을 가능성 같은 것 말입니까?" 형사들이 추정할 수 있는 모든 가 능성, 다시말해 주변인 전부를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어떤 식으로 극단적 인 상상력을 동원하는지를 익히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기본적인 발상법은 같을지 몰라도 소설가들과 형사들의 상상력에는 분 명한 차이가 있죠. 형사들은 모든 가능성을 다 추정하지만 사냥을 하듯이 그것을 냉정하게 몰아가는 식이고, 그와 반대로 소설가들은 그것을 무한 정 펼쳐가는 식이죠. 그리고 소설가들이 감성에 의존하는 반면, 형사들은 상상력을 직관으로 통제하거든요. 그런게 분명한 차이랄 수 있겠죠. " 그 정도라면 나도 얼마든지 안다, 하는 표정으로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야릇한 미소를 입가에 흘렸다. 내가 누구인지, 그런 것에 대한 기초조사가 이미 끝났다는 뜻으로 그 미 소가 받아들여져서 나는 은근히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그래서 아주 간단히 문제를 해결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나는 망설이지 않 고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알아볼 건 이미 다 알아보고 오셨군요. 그럼 가장 궁금해 하실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 말씀을 드리죠. 지금 은미가 어디 있는지는 저도 모 릅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지난밤 저의 행적이 궁금하시겠죠?" 나의 물음에 형 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밤 저의 행적은 제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 705호에 사는 오기욱이 라는 소설가에게 가서 물어보면 정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술에 취해서 갔기 때문에 거기가 어디인지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있 으니까 말이죠. 그 이외, 더 궁금한 게 있나요?" 양손을 펼쳐보이며 나 는 물었다. "글쎄, 이선생 태도로 보니 내가 뭔가를 묻는다고 해도 친절하게 말씀 을 할 것 같진 않군요. 이곳에 좀 더 앉아 있다간 위 출혈이 일어날지도 모르니 그만 일어서죠. 1503호에 메모를 남겨놓긴 했는데, 혹시 그 아가 씨가 집으로 돌아오거든 경찰서로 좀 나와달라고 전해 주세요. 그것 뿐입 니다. " 담담한 표정으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출입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신발을 신고 밖으로 나가려다 말고 문득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돌아서며 엉뚱한 질문을 내게 건넸다. "이건 업무와 상관없는 개인적인 궁금증입니다만…. 이선생은 이제 정 말 소설을 안쓰실 작정인가요?" "…" 전혀 예기치 못한 질문이라서 나 는 멀뚱한 표정으로 눈을 껌뻑거리며 그를 보았다. "오해하지 마십쇼. 저도 젊은 시절엔 소설가가 되는 꿈을 지니고 있었 거든요. 그래서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신문연재 소설같은 건 지금도 심심 찮게 읽는 편이죠. 나중에 정년퇴직을 하면 그때라도 써볼까, 뭐 그런 가 당치도 않은 꿈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신문에 연재하던 소설도 재미있게 읽고 있었는데…. " "에메랄 드 궁전의 추억을 읽으셨단 말인가요?" 뭔가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게 있어 나는 물었다. "아무렴요. 잠복 근무를 나가서도 읽을 정도였는데, 갑자기 연재를 중단 하고 절필 선언을 하니 독자된 입장으로는 무척 섭섭하더군요. 언제라도 마음이 변하시면 그 소설은 꼭 완성을 해주십사, 이렇게 개별적인 부탁 을 드리고 싶네요. 제 가슴에 아직 첫사랑이 생생하게 살아 있거든요. 암 튼 실례 많았습니다. " 말을 하고나서 그는 어설프게 웃어보이며 밖으로 나갔다. 출입문이 닫힌뒤, 잠시 고개를 숙이고서 있다가 나는 황망스럽게 밖으로 뛰어나가 그를 불러세웠다.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그가 걸음을 멈추고 무척이나 놀라는 표정 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이 친구, 1503호에 살던 영우라는 청년 말이죠. 은미라는 여자가 첫사 랑이라는거 아셨나요?" 손가락으로 1503호의 출입문을 가리키며 나는 물 었다. "아뇨… 그건 처음 듣는 얘기로군요. " "나중에 은미에게 자세히 듣 게 되겠지만… 수사에 별로 도움이 될만한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영우에겐 은미가 처음이자 마지막 사랑이었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런거 이해하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백번의 사랑보다 훨씬 많은 사 연을 담고 있는게 그런 사랑이니까요. 그러고보니… 그래요, 어째서 유서 같은 걸 남기지 않았는지 이제야 알것 같군요. " 후, 한숨을 내쉬며 그 는 고개를 들고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자살로 단정한단 말씀인가요?" 그가 영우의 죽음에 대해 어떤 조사를 어떤 식으로 진행했는지 모르겠지만, 뭔가 앞뒤가 안맞아 떨어지는것 같 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조사와 상관없이 제 직관을 말씀 드리는 겁니다. 그리고 내려가는 길에 705호에 잠깐 들렀다 가겠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아시겠죠?" "그친구, 어쩌면 저처럼 자고 있을지도 모릅 니다. 그리고 자는걸 깨우면 극도로 짜증을 부릴지도 모르니까 불쾌하게 생각 하진 마세요. " "그런덴 이골이 났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알았다는 시늉으로 그는 빙그레 웃음을 지으며 손을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다소 허전한 걸음걸이로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한때 소설가가 되는 꿈을 지녔던 형사, 그리고 첫사랑의 기억을 아직도 가슴에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는 형사, 뿐만 아니라 정년 퇴직을 하고나 서 소설을 써보고 싶다는 희망을 지니고 있는 형사, 그나마 영우의 죽음 이 그런 사람에게서 정리될 거라고 생각하니 무척이나 다행스럽다는 생각 이 들었다. 정서가 메마른 몰지각한 인간에게 가서 함부로 취급당하는 죽음이 되지 않을수 있다는 것, 그나마 다행 아닌가. 밝은 봄빛 속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물무늬, 춤을 추고 있었다. 한줄기 한줄기마다 과거의 기억들이 실타래처럼 치렁치렁 매달려 있었다 . 한순간은 청보라빛으로 밝아졌다가 다른 한순간은 먹보라빛으로 가라앉 아 버리는 생과 사의 극명한 대비. 시간의 진공지대, 기억의 사각지대에 앉아 나는 다만 기억할 수 없는 기억의 난다바를 부유하고 있었다. 죽음이라는 관념의 불가해, 그리고 살아있음을 빈틈없이 포박하는 그것 의 이미지. 형사가 돌아가고 오후 세시가 될 때까지 나는 아무일도 하지 않았다. 발코니를 향해 앉아 있었고, 진공상태처럼 한없이 해맑은 봄날의 대기를 망연한 눈빛으로 내다보았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오기욱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고, 올라가도 괜찮겠냐는 그 의 물음에 그러라는 대답을 건냈을 뿐이었다. 산 자는 올라오고 죽은 자는 내려간다? - 전화를 끊고나자 문득 그런 정 리 (定理)가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형사한테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망할자식, 죽으려면 시간이나 잘 선 택해 죽을 것이지 살아있는 사람들까지 골탕먹이는 시간에 죽을게 뭐람. " 냉장고에 캔음료수 하나를 꺼내들고 소파로 가 앉으며 그는 투덜거렸 다. "골탕을 먹인다구?" 침대 프레임에다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어젯밤에 형하고 내가 같이 갔던 곳, 비밀 클럽이에요. 비공개로 운영 하는 곳인데, 그런 곳에 갔었다는 걸 어떻게 형사에게 말해줄 수 있겠어 요. "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예요. 만약 그 친구의 죽음이 자살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고, 형과 나의 알리바이가 필요할 경우가 발생 한다면 변호사와 상의해서 말하겠다고 했죠 뭐. 근데 형은 언제 집으로 돌아왔죠?" 담배를 피워물고 입가에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그는 물었다 . "새벽에 돌아왔어. 돌아올때… 오피스텔에서 앰블런스가 내려오더라. 하지만 영우가 죽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아까 형사가 찾아왔을 때였어. " "형과는 친하게 지냈나요?" 고개를 갸우듬하게 들어올리고 그는 물었 다. "친했다기 보다는 매번 안타깝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친구였어. 보 기와 다르게 무척 진지한 구석이 있는 친구였는데… 인생살이의 바이러스 에 대한 면역력이 부족했던 거 같애.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허전한 눈 빛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그런데, 동거하는 여자애는 어디로 사라진 거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어젯밤, 우리가 '잃어버린 지평선' 에서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웬 남자하고 그곳에 나타났었어. 나를 보곤 그대로 나가 버렸는데… 아마 어젯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야. " "어젯밤 에도?" 담배를 입에 물고 인상을 찌푸리며 그는 되물었다. "그 전날밤에도 외박을 했었거든. 그래서 어제 아침에 둘이 티격태격 했었는데… 암튼 근래에 들어 둘 사이가 평화롭진 않았어. " "멍청한 자 식… 헤어지면 그만이지 여자에게 배신당했다고 목숨을 끊어?" 한심하다 는 표정으로 비스듬히 허공을 올려다보며 그는 혼잣말을 했다.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냐. 사랑의 문제에 대해, 그렇게 목숨을 걸고 절박하게 생각해 본적 있어?" 영우의 죽음을 시종일관 비아냥조로 받아 들이는 그의 태도가 못마땅하게 여겨져서 나는 다소 노기 어린 목소리고 물었다. "사랑이라는 거, 그리고 여자라는 존재들… 그런 건 그저 지나가는 환 상에 불과해요. 거기에다 목숨을 거는 건 정말 유치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자기 도취라구요. 사랑에 대해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건 일방적인 에고의 결과이고 좀더 냉정하게 말하면 자기기만의 결과일 수도 있다는 거죠. " 말을 하고 나서 그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피우던 담배를 재 떨이에다 비벼 껐다. "그런 주관을 견지하고 살아온 결과가 뭐지?그래서 지금 넌 네 자신에 게 사뭇 만족하고 있는 모양이지?" 무릎에다 턱을 괴고 이를 데 없이 냉 소적인 눈빛으로 나는 그를 노려보았다. "불만스러울 것도 없죠 뭐. 어차피 이렇게 사나 저렇게 사나 고통스럽 긴 마찬가진데, 진지함이라는 포장지에다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뭐가 있 겠어요. 난 그저,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살고 싶고 앞으로도 그럴 작정 이예요. "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잔다는 식으로 여자를 만나고, 그런 식 으로 인생을 살겠다… 그런 말이냐?" 무릎에 얹었던 턱을 들고 나는 탁 자 위에 올려둔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극단적으로 살고 싶어요. 아무 것도 연연하 지 않고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렇게 거침 없이 말예요. 그래서 규범과 제약의 경계를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자유를 얻고 싶다 그거예 요. " "그게 자학이지 자유와 관계된 문제라고 생각하냐?설령 그것이 너 의 개인적 자유와 연관된 것이라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야. 너의 개인적 자유 때문에 본의 아니게 피해를 받게 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 로 설명할 거냐?" 묻고 나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천천히 발코니가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영우의 죽음과 오기욱의 사랑관, 그 사이에서 파생한 문제가 죽음의 본 질을 압도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쳐갔다. 하지만 단순하게 발생한 문제가 아니라고, 오랫동안 오기욱과 나 사이에 서 은밀하게 곪아온 환부가 비로소 터져버린 거라는 생각을 되풀이하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오의 날빛 속으로 차분하게 가라앉은 세상을 내 려다 보았다. "형, 난 말이죠, 남에게 피해를 주지 못하기 때문에 부자유스럽게 사는 인간이예요. 내가 사랑이라는 환상의 토양에다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이 리저리 방황한다고 해서 그게 곧 남에게 피해를 주는 거라고 단정하는 건 지나친 비약이 아닌가요?" "난 영우의 죽음을 말하는 거야. 사랑 문제 를 떠나서 말한다 해도 그의 죽음에는 진지한 자아가 있어. 너나 내가 잃 고 살아가는 것, 아니 마주보기를 두려워하는 문제를 그 젊은 영혼은 처 절하게 응시하고 있었을 거라는 거지. 어젯밤, 너와 내가 자아를 망각하 기 위해 그곳에서 환상의 바다를 떠다니고 있을 때… 그때 영우는 더이상 비상할 수 없게 된 자신의 날개를 어둠 속에서 아프게 매만지고 있었을 거야. " "오, 날개라구요?" 가당치도 않다는 어조로 그는 되물었다. "인생을 통틀어 인간에게는 단 한번의 사랑밖에 주어지지 않아. 인간의 의지는 그것을 보기좋게 묵살하지만… 그것을 인정하면 모든 사랑의 문 제가 지극히 단순한 본질을 무시하는데서 생겨난다는 걸 알게 된다는 거 지. 두번째 사랑, 세번째 사랑… 그래, 백번째 사랑도 얼마든지 가능하겠 지.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첫번째를 완성하지 못하는 데서 생겨나는 본능 적인 원형 상실감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구. 영우는, 그가 스물셋이 긴 해도 뼈저리게 그것을 감지했을 거라는 거지. 우리가 그의 죽음을 함 부로 대할 수 없는 이유…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바로 그런거야. " 오기 욱에게 등을 보이고, 그것이 마치 내 자신에게 건네는 말인 것처럼 나는 발코니 바깥쪽의 풍경에다 시선을 고정시키고 중얼거렸다. "막연하게 그런 생각은 해오고 있었지만… 아무렇든 형하고 난 본질적 으로 엄청나게 다른 인간형이로군요. " "인간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아 . 너, 지금 여기 올라온 이유가 뭐지?" 돌연 등을 돌리고 나는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내가 여기 올라온 이유요? 그거야 뭐… 평상시처럼 그저 심심해서 올 라온 거죠 뭐. " 당황한 낯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너, 이예린 때문에 여기 올라온 거 아냐?" 비수를 찌르듯 이를 데 없 이 냉랭한 목소리로 나는 다시 물었다. "그래서 내가 이예린과 사귀는 걸 반대하겠다, 그런 말인가요?" 갑자기 두 눈을 부릅뜨고 그는 노여운 표정을 지었다. "이봐, 내가 누군데 그런 걸 반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난 이예 린과 오기욱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참견하거나 간섭 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내가 그녀를 만나게 된게 전적으로 그녀의 비 즈니스 때문이었다는 걸 몰라서 하는 말인가?" "좋습니다. 그 말을 믿고 지금 이 순간부터는 그녀와 나의 문제로 돌리죠. 그러니까 그녀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형은 참견하지 마세요. 그 것까지 관찰 대상에 포함시켜서 나의 인격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듯이 말 하지 말아 달라, 그런 말입니다. 아시겠어요?" 말을 하고 나서 그는 벌떡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잠시 나를 노려보았다. "한 마디만 덧붙이지. 우리는 누구나 문제를 안고 살아가. 하지만 그런 문제는 결코 자랑삼을 만한게 못돼. 개중엔 자신의 정신적 문제를 오히 려 소설가의 특징이라도 되는양 행세의 근거로 삼고 싶어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그런 인간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소설과 인생 사이에 가로놓인 깊은 심연을 들여다보지 못해. 올곧게 들여다볼 용기도 없겠지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나면 더이상 소설가로 행세할 파렴치한 용기마저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야. " "그래서 형은 절필을 선언한 건가요?" 되묻는 그의 표 정 속에 미묘한 비웃음이 어려 있었다. "소설이 자기 인생과 극단적으로 괴리되면 결국 붓을 꺾게 되는 거야. 소설과 인생을 별개의 것으로 치부하면서 끝까지 놀이 근성으로 문학과 인생을 동시에 욕되게 하는 것보다야 그게 백번 온당한 일 아닌가?" " 그거야 형의 개인적인 생각이죠. 설마하니 그런 걸로 지금 나를 훈계하려 는 건 아니겠죠?" 어깨를 으쓱하고 손을 흔들어 보이며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진지한 걸 그토록 부정하려는 사람 앞에서 훈계라니, 말도 안 될 소리 ! 난 그냥 내 자신에게 화를 내고 있는 거야. 오기욱도 아니고 세상도 아 니고 바로 내 자신… 모든 불화의 발상지가 바로 거기거든. " 아무렇든 형, 정말 세상 피곤하게 사는군요, 하는 말을 나직하게 내뱉고 나서 그 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출입문을 빠져나갔다. 닫힌 출입문을 잠시 바라보다가 나는 문틀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섰던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내 자신이 위악적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느낌, 그리고 근거 를 알수 없는 분노를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내 주변을 에워싼 모든 것들이 난마처럼 뒤엉겨 나의 선택과 아무런 상 관도 없이 극단적인 대치국면을 형성하는 것 같았던 것이다. 한동안 멍청하게 앉아있다가 나는 기분을 바꿔볼 요량으로 샤워를 했다 . 그리고 샤워를 하는 동안 하영을 떠올리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봐야겠 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은 끝끝내 할 수 없었다. 이렇게 기분이 엉망일 때, 다시 말해 맑고 흔쾌하지 못한 상태일 때는 가능한한 모든 문제로부터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는게 좋다는 것 - 그것 이 세상을 살아오며 내가 터득한 자연스런 대처 방식의 일종이라서였다. 무리수란 바로 그런 시기에 인위적인 힘으로 뭔가를 해결하려고 덤벼들 다가 일을 더욱 그르치게 되는 경우를 일컫는 게 아니겠는가. 샤워를 하 고 나와 옷을 갈아입고 CD 플레이어에다 베를리오즈를 걸어놓고 나는 수 화기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하영의 아파트로 먼저 전화를 걸어보았다. 하지만 어제와 마찬가지로 자동응답, 그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명동의 패션숍으로 전화를 걸었다. 은근한 기대감을 부풀리며 버튼을 눌렀는데, 실망스럽게도 전화를 받은 사람은 하영이 아니라 미스 한이었다. "하영씨, 오늘도 없나요?" 그렇게 물을 요량이 아니었는데, 부정적인 질문이 나도 모르게 입밖을 밀려나갔다. "이 선생님, 어제 두 분 사이에 무슨 일 있었나요?" 그렇잖아도 그게 궁금하던 참이었다는 어투로 그녀는 물었다. "왜요?하영씨가 뭐라고 하던가요?" "아뇨, 뭐라고 하시진 않았는데… 아침에 통 잠을 못잔 것처럼 부석부석한 얼굴로 잠시 나오셨다가 몸이 안 좋으시다면서 곧바로 들어가셨어요. " "어디, 집으로 간다고 하던가 요?" "글쎄요, 무슨 일인지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군요. 내가 생각하는 문제가 맞는지, 아니면 다른 문제가 있는 건지… 아무튼 잘 알겠습니다 . " 전화를 끊고나자 기분이 더욱 허전해졌다. 어떤 위안을 꿈꾸며 전화를 걸었던 건 아니었지만, 하영이쪽에서도 문제 가 심상찮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느닷없이 증폭된 때 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게 꼬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 로 실내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박탈당한 사람, 아니면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체념한 사람의 형상이 지금의 나와 같을지도 모르 겠다는 생각이 얼핏 뇌리를 스쳐갔다. 는질거리는 오후의 햇살이 끈끈하게 발목에 엉겨 붙는 걸 내려다보며, 그래서 나는 무척이나 외롭다는 생각을 했다. 죽음이 스쳐간 오후의 허전한 공백. 늦은 하오의 햇살이 눅눅하게 퇴락해가는 시간, 나는 발코니 쪽으로 고 개를 돌리고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머잖아 어둠이 내릴 거라는 단순한 예감 속으로 깊고 절박한 외로움이 스며들어 손끝도 까딱하기가 싫었다. 누군가, 이럴때 아무런 대화도 없이 알몸으로 오래 오래 부둥켜 안고 밤 을 지샐 수 있는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막연한 바램이 명치 끝에 똬 리처럼 딱딱하게 뭉쳐 있는 것 같았다. 절박하게 그리운 사람. 전광이 스러져가는 잠잠한 오후의 허공으로 흑 백사진처럼 희미한 환영들이 명멸했다. 하지만 그 중의 어느 누구도 나로 하여금 사실적인 존재감을 느끼게 하 지는 못했다. 지상에 태어나서 내가 만난 모든 인간들이 깊은 무의식의 그늘로 가라앉 아 형상마저 불분명해진 것 같았다. 오직 한 사람, 내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이미랑이라는 존재마저도 그 럴 때는 허구 속의 등장인물처럼 속수무책의 외로움에 깊이를 더할 뿐이 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도 모를 존재를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는 것 - 그것이 나에게는 외로움의 근원인 동시에 형벌의 그늘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띵똥, 띵똥. 깊은 무력감을 일깨우듯 명징한 소리가 귓전으로 밀려들 었다. 왠지 모를 안도감으 느끼며 나는 재빨리 몸을 일으키고 출입문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누가 나를 찾아왔을까, 하는 데 대한 일말의 의구심도 없이 서 둘러 문을 열었다. 하지만 막상 출입문을 열고 나서 나는 깊은 쇼크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멍청한 표정으로 밖을 내다보았다. "놀라셨죠?" 밝은 표정으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깨를 으쓱해 보 이는 여자 - 짙은 녹색 투피스에 흰 블라우스를 받쳐 입고 선 이예린의 가슴에는 보라빛 종이로 밑둥을 포장한 화분이 안겨 있었다. "이건… 일종의 도발 같군요. " 꿈에서도 상상하지 못한 그녀의 출현 에 턱없이 감동하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하고 나는 말을 더듬거렸다. "도발이란 표현이 저에게는 더욱 도발적으로 들리네요. 근데, 저 여기 계속 서 있어요?" 가슴에 안고 잇던 화분을 내게 내밀며 그녀는 물었다 . "아, 미안…들어와요. 근데, 이건 뭐죠?" 그녀가 건네준 화분을 들여 다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가늘고 긴 칼 모양의 잎사이로 푸른 빛이 감도는 짙은 자주빛 꽃이 세 송이씩이나 피어 강렬한 자태를 과시하고 있었다. "그거, 붓꽃이예요. 붓꽃… 아시죠?" 구두를 벗고 어깨에 메고 있던 검 정 숄더백을 내려 손에 들며 그녀는 나를 보았다. "선물인가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 그리고는 찬찬히, 무엇인가를 말하는 듯한 눈빛으로 실내를 둘러보기 시 작했다. 붓꽃 화분을 손에 들고 나는 말없이 그녀를 지켜보았다. 한번도 맡아 본적 없는 신비스런 향기처럼 그녀의 존재감이 은은하게 실 내에 배어드는 것 같았다. "아, 여긴 전망이 참 좋네요. " 실내를 둘러보고 나서 조심스럽게 발 코니로 나서며 그녀는 탄성을 터뜨렸다. "좋은 건 그것뿐이예요. " 붓꽃 화분을 소파 앞의 탁자 위에다 내려놓 고 나서 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 보았다. "전망 말고… 다른 건 좋은게 아무 것도 없다는 뜻인가요?" 문득 고개 를 돌리고 그녀는 나를 돌아보았다. "혼자 산다는 거… 그걸 말하는 거요. " 나의 대답을 듣고 나서 그녀 는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물상이 없는 허공을 배경으로 선 그녀의 모습을 나는 전혀 다 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내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게 하는 한 여자가 거기 서 있다는 걸 비로소 자각하게 된 것이었다. "오늘은 표정이 무척 우울해 보이네요. 무슨 일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 이윽고 실내로 들어서며 그녀는 걱정스럽다는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내 앞으로 바투 다가왔을때, 나는 아슬아슬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돌연 그녀를 안고 싶다는 충동이 강렬하게 중추를 자극하는 것 같아서였 다. 그래서 지긋이 어금니를 다져물고 나는 내자신을 타일렀다. 짐승이 되기 쉽나니, 누구든 외로울 때는 말과 행동을 삼가라. "여자들 은 우울한 표정을 짓는 남자들에게 잘 넘어가죠. 하지만 그런 남자들은 자기 연민이 강하기 때문에 조심하는 게 좋을 거예요. 자기 연민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일종의 마약 같은 것이거든요. " "하지만 자기 연민이 없는 남자들은 여자들을 너무 쉽게 생각하죠. 센시티브하지 못하다는 거 예요. "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녀는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올 려다보았다. 불과 20㎝도 되지 않는 그녀와 나 사이의 거리, 거기에서 팽팽한 긴장감 이 조성되는 것 같이 나는 꼼짝도 할수 없었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가. 그녀는 나와의 아슬아슬한 대치 상황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오늘 새벽에 죽었다는 그 젊은이…몇살인가요?" 내 가슴에 얼굴을 묻 고, 어린 새처럼 가늘게 숨을 몰아쉬며 그녀는 물었다. "스물셋…세상을 버리기엔 너무 아까운 나이요. " "왜 죽었나요?" " 죽음의 이유야 죽은 자만이 알겠지만…아마도 사랑에 대한 좌절감 때문에 모든 걸 체념한 게 아닌가 싶소. " "사랑하던 여자가 있었나요?" "고 등학교 시절부터 만나서 같이 동거하는 여자가 있었는데…어린 시절에 시 작된 첫사랑이라서 그 진행 과정이 순탄하지 못했던 모양이요. 그 친구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종일 집에만 있고, 여자는 밤이면 룸살롱엘 나 가는데…때로는 외박을 하기도 했소. 아무렇든 사랑이라는 것도 지나치게 집중하면 생명의 균형이 깨어지는 모양이요. " 그녀를 가슴에 안은채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화분을 내려다보았다. 화려하고 강렬한 붓꽃의 자태 속에도 왠지 모르게 죽음의 기운이 깃들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조용히, 그녀가 나의 가슴을 벗어났다. 그러자 황당한 공허감, 그리고 근원을 알 수 없는 상실감 같은게 다시금 명치 끝을 저리게 했다. 다소 상기된 낯빛로 그녀는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 보았다. "죽음이 못다한 사랑을 완성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그 사람?" " 글쎄, 그런 궁금증마저도 허무하게 만드는 게 젊은 사람의 죽음이라는 생 각이 드는군요. 좋은 젊은이였는데…산자는 결국 이런 말 밖에 중얼거릴 게 없네요. 뭘 좀 마시겠소?" "술요?" 비로소 현실감을 회복한 표정으 로 그녀는 차츰 표정이 밝아졌다. "술도 안될건 없지만…커피나 홍차 같은 것도 있소?" "아, 그럼 진하 고 쓴 블랙커피를 마실래요. 근데, 커피는 제가 끓일게요, 선생님은 소파 에 앉아계세요. " 나의 양팔을 이끌어 소파에 앉게 한 뒤에 그녀는 투피 스의 상의를 벗어 의자의 등받이에다 걸었다. 그리고는 흰 블라우스 차림으로 주방으로 다가갔다. "그래도 손님인데, 이러면 외려 내가 불편해지는 거 아뇨?" "아뇨, 그 런 건 조금도 신경 쓰지 마세요. 굳이 신경이 쓰인다면 저를 안아 주셨기 때문에 선생님과 저 사이에 친밀감이 생겨난 결과라고 생각하세요. 시간 과 기회가 허락한다면 음식도 만들어 드리고 싶은 걸요. " 포트에다 물 을 부으며 그녀는 한결 밝아진 음성으로 말했다. "요리를 잘 한다는 뜻이요?" 그녀를 가슴에 안았던 감각적 기억을 더듬 으며 나는 물었다. 이예린이라는 여자를 안은게 아니라 다른 무엇,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일 상적 범주를 훨씬 뛰어넘은 인식의 실체를 잠시 가슴에 푸고 있었던 듯한 허전한 감회가 은연중에도 마음을 아리게 했다. "저, 요리 잘해요. 근데, 선생님은 식사를 어떻게 해결하세요?" 사뭇 궁금하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았다. "대중없어요. 사 먹기도 하고 라면 같은걸 끓여먹기도 하고… 아무튼 인간이 잡식성이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 있을거요. 그리고…" 그리고 띵 똥띵똥, 내가 미처 말을 끝내기도 전에 벨이 울렸다. 그러자 커피잔을 준비하던 이예린이 누가 왔나보네요, 하며 나를 돌아보 았다.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순간적으로 오기욱을 떠올렸다. 이예린에 대해 그와 나눈 대화, 그리고 그녀와의 포옹이 이상한 톱니바 퀴처럼 맞물리는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제가 문을 열어볼까요?" 자신의 위치가 출입문과 훨씬 가깝다는 표정 으로 그녀는 물었다. "아니, 됐소. 내가 열게요. " 소파에서 일어나며 나는 손을 들어 그만 두라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는 곧장 출입문 앞으로 걸어가 잠금쇠를 풀고 문을 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선뜩하게 끼쳐드는 한 여자의 모습을 보고 나는 기급 하듯 한걸음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문앞에 서있는 존재가 낯설거나 기이해서가 아니라, 찾아올 거라는 예상 을 전혀 못했던 존재가 거기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말 뜻밖이군. " 무표정하게 서있는 하영을 보고 나는 죽을 죄라도 진 사람처럼 어설프게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가 왜 주방에 서 있는 이예린의 존재를 그토록 강렬하게 의 식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안에 누가 있나 보죠?" 황망스러워하는 나의 표정을 보고 하영은 대 뜸 뭔가를 알아차린 표정을 지었다. "응, 손님이 와 계신데… 괜찮아. 들어와. " 그때 주방에 서 있던 이 예린이 출입문 앞으로 걸어왔다. 그리고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하영에게 자신을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저, 이예린이예요. " 뭔가, 나는 이예린의 입에서 다른 말이 좀더 나오길 기대했지만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나서 이예린은 다시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가령, 자신이 프로듀서라거나 방송출연문제 때문에 나를 찾아왔다는 말 같은 건 의도적으로 밝히지 않은것 같았던 것이다. 눈을 떴을 때 나는 깊은 어둠속에 누워 있었다.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 그리고 막막한 정적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 며 교차되는 공간 - 위스키를 반병쯤마시고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 다는 걸 알아차리고 나는 굼뜨게 몸을 일으켰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무거웠지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연해 나를 불러대 는 소리를 듣고 나는 천천히 출입구쪽으로 걸어가 점등 스위치를 먼저 올 렸다. 그리고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며 출입문을 열었다. "아유, 미치겠네. 그렇게 쳐다보지만 말고 빨리 나와서 나좀 도와줘. " 1503호의 출입문 앞, 늘어질대로 늘어진 은미를 부축하고 서서 정마담 이 짜증스런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거지?" 맨발로 복도로 뛰어 나가 나는 의식을 완전히 잃고 늘어진 은미의 어깨와 허리를 잡았다. "아홉시부터 혼자 우리집에 와서 지금까지 말 한마디 하지않고 술만 마 셨어. 왜그러냐고 물어도 대답도 하지않고 기갈 들린 사람처럼 술만 마셔 댔다구. 그리고는 꾸당, 의자에서 나가떨어졌는데 어떻게 해. 이렇게 늘 어진 애를 아무놈한테나 집에 데려다 주라고 맡길 수도 없고… 그러니 내 가 데려와야지 별도리 있겠어?" 송글송글 이마에 배어난 땀을 손등으로 찍어누르며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는 은미의 핸드백을 뒤져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대충 알 만해. 알았으니까 빨리 문부터 열라구. " 몸을 가누고 서질 못하는 은미를 번쩍 안아올리며 나는 다급하게 말했다. "뭐, 얘가 왜이러는지 사연이라도 안다는 거야?" 핸드백에서 열쇠를 찾아들고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은미랑 같이 동거하던 친구가 오늘 새벽에 여기서 투신자살했어. 나머 지 얘기는 안해도 짐작이 가지? 오른쪽 벽에 있는 스위치부터 올려. " 정마담이 불을 밝힌 직후, 나는 늘어진 은미를 안아들고 침대로 갔다. 그리고는 정마담의 도움을 받아 그녀를 반듯하게 눕히고 이불을 덮어주 었다. "난 그런줄도 모르고 괜히 싫은 소리만 지껄여댔네. 미안해서 어쩌지? " 안쓰러운 눈빛으로 은미를 내려다보며 정마담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 다. 그리고는 비로소 긴장이 풀리는지 어깨를 늘어뜨리고 멀뚱한 눈빛으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나는 불을 그대로 켜두라는 말을 남기고 나서 먼저 1503호를 빠져나왔다 . 영우가 머물던 공간, 그리고 죽음의 여운이 생생하게 남아 있는 것 같은 공간에 오래 머물러 있고 싶지 않아서였다. "자, 열쇠. 내가 가져갈 수 없잖아. 내일 전해줘. " 은미의 겉옷을 벗겨 주고 곧이어 복도로 나온 정마담이 출입문을 밖에서 걸고 열쇠를 내 게 건네주었다. "새벽에 혼자 눈을 떴을 때가 걱정되는군. 혹시라도 딴 생각하지 않을까 모르겠어. "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창백해 보이는 정마담의 얼굴을 보 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걱정하지 마. 삶에 대한 근성은 기본적으로 여자들이 남자들보다 강해 . " "경험인가?" "아니 상식이야. 근데, 내가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예 삿일이 아닌데 자기 집도 안 보여주고 날 그냥 돌려 보낼거야?" 말이나 되는 소리냐, 하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지금이 예의를 차릴 만한 정황이라고 생각해? 아무튼 힘들었을텐데 들 어와서 뭣 좀 마시고 가. 하다못해 시원한 물이라도 말야. " "냉장된 맥 주 있으면 줘. 어릴 때 젖먹던 힘까지 다 쓰고 났더니 갈증이 나 미치겠 어. " 나를 뒤따라 안으로 들어서며 그녀는 밭은 기침을 두어 번 뱉았다 . 그리고는 혼자 사는 남자의 공간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곧장 소 파로 걸어가 던지듯 몸을 묻었다. "누구는 들어오라고 해도 들어오질 않았는데, 누구는 들어오라고 말을 하지 않았는데도 굳이 들어오겠다고 하니 정말 어이가 없군. " 냉장고 에 들어 있던 캔맥주 두 개를 들고 소파로 가 그녀와 마주되게 앉으며 나 는 투덜거렸다. 물론 낮에 다녀간 하영을 생각하며 꺼낸 말이었다. "누구 말하는 거야. " 원 터치 캔의 마개를 열며 다소 몽롱한 눈빛으 로 정마담은 나를 건너다 보았다. "낮에 어떤 여자가 이 붓꽃 화분을 사 가지고 왔어. 그런데 그 여자가 아무런 이성적 감정을 품지 말고 자신을 한번만 안아 달라고 하더군. 그 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그렇게 했어.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때 하영이가 나 타난 거야. 문제는 포옹이 아니었는데도 결국은 그것이 심각한 문제로 비 약했어. 내가 감정을 속이지 못한 거야. 그러니 하영이가 안으로 들어오 려고 했겠어?. "이런 날도둑 같으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맥주 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정마담은 나를 보았다. "나도 놀라고 있어. 하지만 다르게 생각해 보면 아주 이상하다는 생각 이 들기도 해. 평상시라면 아무일도 아닌 것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는 문 제들이 아주 기막힌 형국으로 꼬여서 전혀 다른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거… 이런게 우연을 가장한 필연일까?" "웃기지마. 그 이전에 이미 이 본오의 마음 속에서는 자기 암시 같은 게 일어나고 있었어. 남자놈들이 도둑놈 심보를 지녔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 자기 암시의 양면성을 꼬집는 거야. 붓꽃을 사온 여자, 어젯밤에 함께 술 마시러 왔던 그 피디지?" 이 도둑놈아 그래도 오리발을 내밀래?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나를 노 려보았다. "그래 맞아. 그 여자야. " 아무 것도 숨기거나 부정하고 싶지 않다는 표정으로 나는 이예린의 존재를 선선히 시인했다. "그 젊은 여자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는 거야?" "아니 사랑의 감정 이라고 말하기 어려워. 알 수 없는 흡인력 같은 건 분명히 느껴지지만… 사랑의 감정 하고는 종류가 달라. " "엎어치나 메치나 그게 그거 아냐 ? 이본오가 여자에게 가슴을 열고 선뜻선뜻 사랑의 감정을 드러내 보일 위인은 아니잖아. 전에부터 그런 궁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가슴에 불 에 데인 상처가 있지?" 마치 내 가슴 속을 훤히 들여다보기라도 하듯 그 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건너다 보았다. "꼭 한번. " "그 사연을 말하고 싶지는 않겠지?" "붓꽃을 사 온 여자 … 나에게 원하는 게 바로 그거야. 내 첫사랑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싶다는 거지. " "해. " 짧은 주문을 외듯 그녀는 은밀하게 잘 라말했다. "뭘 해?" "그 피디가 원하는 대로 방송에 출연하라구. 그래서 그런 식 으로라도 털어버릴 건 털어버려. 상처를 신비화시키면 나중에 온몸으로 독이 퍼져 치유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어. 마음에 남은 응어리가 돌처럼 딱딱해져서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단 말야. 생각해 봐. 지나간 것과 남겨 진 것 중에 뭐가 더 중요한 거지?" "내겐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게 없 어. 다만 느낌의 강도가 다를 뿐이지.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허전한 심 정으로 허공을 올려다 보았다. "아무튼 이본오는 정말 피곤한 존재야. 별일도 아닌데 세상을 왜 그렇 게 힘들게 살려고 하는지 모르겠어. 세상이 얼마나 단순하고 명백한데, 정반대로 불투명한 음지에서만 살려고 기를 쓰는 거지? 보나마나 내 얘기 를 무시하려고 들 테니까 내가 아주 간단하고 단순하고 명백한 예를 하나 들지. 지금 여기서 내가 이본오와 섹스를 하고 싶다고 말하면 어쩔 거야 ?" "섹스?" 되묻고 나서 나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음을 터 뜨렸다. 그러자 무슨 일인가로 심하게 모욕을 당한 사람처럼 그녀는 말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불쑥, 이런 말을 입밖으로 꺼냈다. "예를 드는 게 아냐. 사실이야. " "젠장, 섹스가 무슨 퍼포먼스인 줄 알아?느닷없이, 돌발적으로… 그래, 그렇게 아무 곳에서나 하자고 하면 할 수 있는 거냐구. 난 말야, 그런 것에는 누적된 교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리고 그 누적된 교감이 우연이 아니라 필연으로 승화할 때… 그럴 때 섹스가 조건 없이 교류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구. 설마, 정마담도 요즘 젊은애들의 사고 방식을 그대로 흉내내고 싶어하는 건 아니겠지?" 말을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언성이 높아졌다. 1503호에서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 그리고 그것에 짓눌려 의식을 잃 은 가련한 영혼 때문에 나도 모르게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데 느닷없이 섹 스라니,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흠, 흥분도 아주 특이한 방식으로 하시는군. 그러면 인생이 고매해지 나 보지?" 실망과 절망, 그리고 자기 혐오의 빛이 역력하게 떠오른 얼굴 로 정마담은 중얼거렸다. "그렇게 보였다면 미안해. 아무렇든 오늘은 일진이 별로 안 좋은 날인 것 같애. 그러니까 서로 자극하지 말자구. 이런 기분 모르는 거 아니잖 아?" 담배를 피워물고 나는 모든게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흔들 었다. "기분은 나도 엉망이야. 이본오가 말한 것처럼 섹스가 그렇게 지난한 과정 끝에 치러질 수 있는 거라면 도대체 일생에 몇 번이나 그런 기회를 얻을 수 있겠어?난… 그래, 난 이본오와는 생각이 달라. 외로운 사람들 끼리 서로의 등을 쓰다듬어 주듯이, 그렇게 주고받을 수도 있는게 섹스라 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같은 종족이라면 서로의 상처를 핥아주며 밤을 지 샐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지금은 도무 지 그럴 수 없어. 간단하잖아. 최소한 상황이라도 좋아야 할 것 아냐. 난 어젯밤에도 오기욱과 아주 이상한 곳에서 밤을 지새고 왔어. 좀더 구체 적으로 말해 줄까?술에 취한 채 낯선 여자와 섹스를 했다구. 그리고 내가 그런 일에 몰두하고 있는 동안 맞은편 오피스텔에서는 한 젊은이가 투신 자살을 했어. 오후에는 예상하지 못해던 두 여자들 때문에 감정이 상하기 까지 했어. 그런데 지금, 정마담이 안고온 은미를 침대에 눕히고 돌아와 곧바로 섹스를 하자니… 그게 말이나 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 말을 하고 나서 남겨진 맥주를 단숨에 비워버렸다. 그리고는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거푸 담배를 빨아댔다. 그러는 나를 정마담은 아주 기이한 표정으로 노려보았다.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언저리가 일그러지며 평상시의 그녀와 전혀 다른 표정을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녀는 가증스럽다는 듯이 묘한 웃음을 입가에 흘리 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이거야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네. 어젯밤에 그런 곳엘 둘이 똑같이 다녀왔는데… 그런데 어째서 한 사람은 오늘밤에도 다른 여자와 자고 싶 어하고 다른 하나는 이런식으로 도도한 척하는 거지?" "그게 대체 무슨 말이지?" 반 쯤 숙였던 고개를 들어올리고 나는 아뜩 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다. "오기욱이 아직도 우리집에서 술 마시고 있다는 거 알아? 오늘밤 자기 와 자 달라고 은미를 데려다 주고 돌아와 자기와 자러 가자고 끈덕지게 죽치고 앉아 있단 말야. 알기나 해?" "……" 오기욱.이예린.정마담.이 본오 - 무슨 악연의 계보가 한꺼번에 터져나오는 것 같아 나는 몽롱한 눈빛으로 정마담을 건너다 보았다. "물론 나도 내키지 않는 관계는 전혀 맺기 싫어. 내가 이본오에게 섹스 를 할 수 있냐고 물은 게 다른 이유 때문인 줄 알아? 그런 문제라면 나에 게도 사람에 대한 기호가 있고 나름대로의 기준이 있어. 오기욱에게 돌아 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밤을 지새는게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한 거 란 말야. 차라리 그 편이 속편하겠다는 생각…… 오기욱이 이본오 모르게 나에게 얼마나 치근덕대는지 알기나 하냔 말야. " 지긋지긋하다는 표정 으로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깨를 흠칫했다. "정말 해골 복잡하게 만드는군. 그러니까 정마담 말은 뭐야, 오기욱을 피하기 위한 방패로 나를 택하고 싶다 그런 건가?" "아니 난 이본오에 게 인간적인 매력도 느끼고 있어. 그래서 이본오와 자는 건 전혀 마음에 걸리지 않아. 굳이 오기욱을 핑계삼을 필요도 없이 진솔한 내 감정 표현 이었다고 받아 들여도 좋단 말야. " 아주 은밀한 자기 감정을 고백할 때 처럼 그녀의 얼굴에는 다소 수줍어 하는 기색이 떠올라 있었다. 이혼을 세 번씩이나 한 여자, 세상의 쓴물과 단물을 모조리 맛본 듯한 여자, 그래서 남자에 관한 한 초연한 감정을 지니고 있는 줄 알았던 그녀 에게도 이런 일면이 있었단 말인가. 대답할 말을 잃은 채 나는 천천히 자 리에서 일어나 발코니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거기, 발코니와 실내를 가름하는 창틀에다 어깨를 기대고 묵연 한 눈빛으로 어둠에 뒤덮인 세상을 내려다 보았다. "본오씨, 내가 당신에게 그렇게 부담스러운 존재야?" 어느 순간인가, 정마담이 내 뒤로 다가와 등에다 조용히 얼굴을 갖다댔다. 그리고는 양손을 들어 조심스럽게 나의 어깨를 감싸안았다. 하지만 그때 이미 나의 감정은 흑요석처럼 단단한 어둠의 각질에 빈틈없 이 뒤덮여 있었다. 그래서 삶의 열정을 모조리 거세당한 인간처럼 나는 정마담에게 등을 보 인 채 이렇게 중얼거렸다. "미안해. 이제 그만 돌아가." 나는 재 자신이 아주 딱딱하게 굳어 있다고 단정했다. 그래서 정마담이 내 등뒤에서 일으키는 상상 가능한 장면마저도 전혀 괘 념치 않았다. 그녀는 이를데 없이 절망스럽고 참담한 표정으로 내 등뒤에서 머뭇거렸 겠지만, 그런 것으로 등을 돌리고 그녀를 보듬어 주기에 나의 심신은 이 미 너무 경직돼 있었다. 설령 내 등뒤에서 지구의 종말이 진행된다 해도 끝끝내 등을 돌리고 싶 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 미안해. 이제 그만 돌아갈게. " 나의 등에서 떨어지며 그녀는 낮고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나의 등 돌린 침묵을 끔찍스러워하듯 서둘러 실내를 빠져나갔 다. 출입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나의 내면에서 거대한 굉음으로 증폭되 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것 마저도 괘념치 않았다. 나는 이미 나의 현실을 무시한 존재, 그런 국외자로 악착같이 버티고 싶 어서였다. 가슴을 열고 누군가에게 다가가는 자, 반드시 심장을 잃게 된다는 부조 리 - 명심할 것. 지금, 이순간! 나도 예견하지 못한 어떤 발상이 푸른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간 직후, 나는 굳은 표정으로 천천히 실내를 향해 등을 돌렸다. 오늘 하루, 그 공간을 스쳐간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알 수 없는 대립 의 기류가 일종의 독성처럼 여적 공간을 맴돌고 있는 것 같았다. 부질없는 오기로 이 공간을 고수하려 한다면, 호흡이 곤란해지고 가슴이 답답해져서 이윽고 가슴을 부여잡고 홀로 질식하게 될지도 모르리라. 무엇을 망설이는가. 나는 서둘러 맞은편 벽쪽으로 다가가 옷장문을 열었 다. 그리고 그곳에서 여행용 가방을 꺼내 지퍼를 열어놓고 눈에 띄는 대로 몇 가지의 옷을 추려 내기 시작했다. 지상에서의 마지막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 아니면 두번 다시는 현실로 환원하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처럼 나는 마음의 갈피에다 애써 일탈의 필 연성을 부여하려고 했다. 누구인가. 그때 정적을 찢어발기듯 날카롭게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 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나는 탁자 위에 올려진 전화기를 노려보았다. 얼핏 이예린과 오기욱의 얼굴이 동시에 뇌리를 스쳐갔다. 이예린이라면 아마도 낮에 해결하지 못한 방송 출연 문제 때문에 전화를 걸었을 것이고, 오기욱이라면 정마담과의 문제 때문에 전화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렇든 나의 동작을 제지하려는 의도적인 울림처럼 연해 울려대는 벨 소리를 들으며 나는 천천히 탁자 옆의 벽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수화기가 아니라 벽에 부착된 전화 코드를 아예 뽑아버렸다. 그리고는 손에 들었던 코드를 바닥에다 집어던지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것도 기대하지마. 이제부터 나는 접선되지 않는다구. " 이예린이 촬영팀과 함께 오피스텔에 당도한 건 오전 아홉시 십분 경이었 다. 그때 나는 출발 준비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열어둔 발코니로부터 부신 아침 햇살과 신선한 대기가 밀려들어 모처럼 머리속이 맑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쇼팽의 느린 건반음을 들으며 나는 끈끈한 인연의 힘, 내가 관통 하지 않으면 안 될 미지의 공간을 머리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과거를 찾아가는 기행이 시작될 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그것이 전혀 다른 미지의 공간을 찾아가는 기행으로 받아들여지 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 지금 오피스텔 로비에 와 있어요. 설마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신 건 아니겠죠?" 아홉시 십분,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나는 이예린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이불 속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소?어쨌 거나 오분 이내에 내려갈 수 있을거요. 그런데, 내 차를 가져가도 되겠소 ?" "선생님 차?…음, 그게 더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가 동승해 드릴 테니까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준비해 두었던 감색 사파리를 입었다. 그리고 전화기의 자동 응답보턴을 누르고 나서 열어 두었던 발코니 문을 닫았다. 그런 뒤에 건성으로 그러듯 실내를 한바퀴 휘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가 몸 담고 살아온 그 공간에서 아뜩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요컨대 현실과 과거가 분리되는 마지막 경계 지점에 내가 서있는 것 같 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날씨는 정말 좋은데, 선생님 기분은 어떠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나서자 촬영팀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던 이예 린이 총총히 내쪽으로 다가오며 밝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걸 고지하듯 평상시의 단정한 차림새와 달 리 그녀는 보기좋게 물이 바랜 청바지에 푸른 줄무늬의 남방, 그리고 여 러 개의 주머니가 달린 베이지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줄이 달린 펜이 걸려 있었고 손에는 촬영 구성안인 듯한 인쇄물이 들려 있었다. "내 기분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피디만큼은 좋지 않을 거요. 내가 이 피디와의 게임에서 보기좋게 패배했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닫게 되 었으니 그 기분을 말해 뭣하겠소. 아무려나 이제 남겨진 일은 이 피디 하 기에 달렸다는 거…그 정도야 물론 알고 있겠죠?" 손에 들었던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어조로 말했다. "촬영 일정이 빠듯해서 그렇지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 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긴장감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러 니까 그냥…뭐랄까, 선생님 영혼의 고향을 찾아간다고 편안하게 생각하세 요. 우울하고 쓸쓸하게 혼자 가시는 것도 아니고, 저처럼 선생님을 잘 이 해하는 사람하고 같이 가는 데 뭐가 걱정이예요?" 밝은 표정으로 말하고 나서 이예린은 로비에 서 있던 네명의 남자를 차 례차례 나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촬영을 담당하는 카메라 감독과 보조, 그리고 연출보조와 승합차 운전사 - 카메라 감독만 삼십대 중반으로 보이고 나머지 셋은 모두 이십대로 보 였다. 그들과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고 나서 나는 잠시 승합차 운전사와 송라읍 으로 가는 노정에 대해 얘기를 나눴다. 송라읍까지 가는 소요시간을 대충 다섯시간으로 잡고, 중간지점의 은남 휴게소에서 한번 쉰다는 것, 그리고 나머지는 도로 사정에 따라 각자 편 안하게 운전하자는 것 등등. "그러니까 촬영기간 내내 이 피디 혼자 저 남자들 넷을 통솔한다는 거요?" 촬영팀과 헤어진 직후, 나는 이예린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는 차에 시동을 걸며 여자 피디로서 겪게 되는 나름대로의 고충이 있으리라,에둘러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지만 나의 예상과 달리, 그녀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명쾌한 대답을 건네왔다. "통솔하는 게 아니에요. 굵은 흐름이야 물론 제가 잡아나가야 하지만, 저 사람들과의 관계는 엄밀하게 말해 분업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촬영팀 과 연출팀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던 분업이 파업의 지름길이 될 수도 있겠 지만, 그런 경우는 아주 드물어요. 상업 방송용 프로그램을 만들면서 자 신의 예술성이나 장인 정신을 고집할 필요가 뭐가 있겠어요?정해진 기간 내에 삼빡하게 일을 마무리 짓는 것, 누구나 그런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 는 거죠. 그러니까 프로그램의 질을 좌우하는 건 이미 기획단계와 구성 단계에서 결정나는 거예요. " 지상으로 올라오자 이제 막 스펙트럼에서 빠져나온 빛처럼 날카로우면서도 다양한 색상으로 햇살이 분광되고 있었 다. 그래서 나는 그녀에게 글로브박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달라는 부탁을 했다. "음담패설 하나 할까요?" 그녀가 꺼내 준 선글라스를 착용하고 나자 문득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있었다. "선생님도 그런거 할 줄 아세요?" "나?이거야 원… 한때는 지상의 모 든 잡스러움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있는 소설가였는데, 나라고 해서 그런 걸 못하란 법이 어디 있겠소?모르긴 몰라도 그런 건 내가 웬만한 사람들 보다 훨씬 많이 알고 있을 거요. 아주 간단히 말해, 소설이란 온갖 잡스 러운 것들의 총화라고 나는 믿으니까. " "좋아요. 이른 오전이긴 하지만 기분을 워밍업하는 셈치고 듣죠 뭐. " "음, 1995년의 얘기인데… 어떤 술자리에서 나와 막역하게 지내는 동료 소설가가 나에게 불쑥 이런 질문 을 던졌소. 야, 너 차에서 해 봤어?" 거기까지 말하고 나서 나는 재빨리 그녀를 돌아보았다. 녹색 신호등이 황색 신호등으로 바뀐 뒤라서 나는 재빨리 브레이크 페달 을 밟았다. "그거… 지금 저에게 이입시키는 질문인가요?"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그녀는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보자 나도 모르게 푸하핫, 커다랗게 웃음이 터져나왔다. 그 순간, 황색 신호등이 붉은 신호등으로 바뀌었다. 연출되지 않은 해프닝, 그런 게 가져다 주는 의외의 상쾌함이 이른 아침 의 돋을 별처럼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것 같았다. 이 사랑스런 순진함이라니! "차에서 해 봤어? 그건 아직 의미가 판명되 지 않은 질문인데, 그게 어째서 이 피디에게 이입될 수 있는 질문이라고 생각하는 거요?" 웃을 만큼 웃고 나서 나는 다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함초롬하면서도 매우 조심스런 표정으로 나를 보며 그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저도 차가 있거든요. " "크흐, 이런 이런… 어쩜 그렇게 1995년의 나 와 똑같은 생각을 할 수 있는 거요. 그때 나는 그 친구의 질문을 받고 잠 시 생각한 끝에 이렇게 대답했었소. 차에서 하느니 차라리 갓길에서 하겠 다. 물론 차에서 해보지 못했다고 하면 면박을 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선 수를 쳤던 것인데… 어이없게도 그 친구는 인상을 찌푸리며 아주 능청스 런 표정으로 내게 이런 말을 되돌려 줬소. 야, 차에서 해를 봤냐는데 그 장면에서 섹스 얘기가 왜 나오냐? 해 몰라, 해? 태양말야, 선 (SUN)!" 궁형으로 휜 고가도로로 접어들며 나는 손바닥으로 탁, 소리가 나게 핸 들을 두들겼다. 선! "으이그…… 정말 못 말려요, 소설가 아저씨들. " 쓸데없는 긴장감 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듯 그녀는 앞으로 내밀고 있던 상체를 의자의 등받 이에다 붙이며 끌끌 혀를 찼다. "차에서 해 봤냐? 그때는 내가 차를 산 직후였는데, 그 친구에게서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나는 당장 운전용 선글라스를 샀소. 그리고 그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차에서 눈물나게 해볼 일이 없는 사람이 됐소. 물론 이 피디도 차에서 눈물나게 해 보는 사람은 아니겠죠?" "아뇨, 난 기회가 닿는다면 눈물나게 해 보고 싶어요. 때로는 정말 그러고 싶을 때가 있다 구요. 뚫어져라, 해를 쳐다보며 많은 눈물을 마구 흘리고 싶을 때… 음, 대학시절에 읽은 글 중에 이런 귀절이 있었어… 태양을 올곧게 바라본 자의 이름을 말해다오. 그의 이름을 묘비의 명 (銘) 으로 삼으리라. " 그 말을 끝으로 그녀와 나 사이에는 기이한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땅히 그래야 할 만한 이유, 얼핏 생각하기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 하지만 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부자연스럽고, 부자연스러운 듯하면서도 자연스런 침묵의 기류는 이상한 접착력으로 그녀와 나를 끈끈하게 연결 하고 있었다. 그래서 알 수 없는 인연의 힘에 이끌려 그녀와 나는 세상과 까마득하게 격리된 곳으로 무섭게 달려나가고 있는 것 같았다. 햇살이 가 닿는 지상의 마지막 지점,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고스란히 무 화된 시간의 오지를 향하여. 촬영팀과 내가 송라읍에 당도한 건 오후 두시경이었다. 다리를 건너 읍거리로 진입하기 직전부터 나는 언제 내가 마지막으로 이 곳을 다녀갔던가, 하는 걸 되새겨보려 했지만 이상하게도 그 부분에 관한 기억은 구체적으로 떠오르질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시절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던 곳, 그리고 대학 진학을 한 뒤로는 집이 서울로 이사를 한 탓에 자연스럽게 발길이 끊어졌던 곳 - .이십대 시절의 언제였던가, 여행을 하던 길에 잠시 머물 다 갔던 기억 말고는 더이상 떠오르는 게 없었다. 여기가 어딘가. 내 기억에 각인된 송라읍과 현실의 송라읍이 너무 다 르게 느껴져서 나는 내심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기억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라곤 오직 한 가지, 읍거리를 곧게 관 통해 나가는 도로밖에 없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낯선 이방인의 눈빛으로 나는 극장이 있던 자리와 읍사무소가 있 던 자리, 교회가 있던 자리와 서점이 있던 자리, 만화방이 있던 자리와 양장점이 있던 자리를 가늠해보았다. 하지만 비슷한 흔적으로도 그것들은 이미 지상에 남아 있지 않았다. 명치끝에 무언가가 딱딱하게 뭉쳐지는 듯한 느낌을 견디기 어려워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자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예린이 사뭇 걱정스런 어조로 이렇게 물었 다. "설마… 이미지 쇼크 같은 것 때문에 말문이 막혀 버리신 건 아니겠죠 ?" "아니요. 그런게 아니라…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날 때처럼 기분이 몽 롱할 뿐이요. 인간은 언제나 변화속에서 살지만, 이렇게 엄청난 시차를 두고 그것을 확인하니 정말 허망하군요. 어느날 갑자기 전생의 기억이 선 명하게 되살아났을 때… 그때 자신을 에워싼 현실의 풍경이 이렇게 생경 스럽고 낯설게 느껴질까?" "이 선생님, 우리는 지금 에메랄드 궁전을 찾 아가는 길이예요. 그러니까 초장부터 흔들리지 마시고 마음을 굳게 먹으 세요. 정말 중요한 것은 인간의 마음에 남는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밖 으로 눈길을 돌리지 마시고 가능하면 선생님 내면에 집중하세요. 어차피 에메랄드 궁전은 거기서 찾아야 하니까요. " 도로와 인도, 그리고 가로 수로 심어진 플라타너스와 규격화된 상가 건물을 내다보며 그녀는 감정이 억제된 목소리로 말했다. "글쎄, 그런 일이 말처럼 쉽사리 이루어질 수 있을지 모르겠소. 내면의 집중력을 유지하려면 기억의 각질이나 외피라도 견고해야 할 텐데… 막 상 이곳에 진입해 보니 무엇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 소. " 지금이라도 모든 걸 체념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머 리를 흔들었다. 그러자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서인듯,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갑자기 밝아 진 음성으로 그녀가 이렇게 입을 열었다. "그럼 우리, 추억보다 더 맛있는 걸로 점심식사를 하러 가요. 배가 고 프면 더 우울해지니까. " 깨끗하고 넓은 한식집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동안 이예린 피디는 촬영감 독과 마주앉아 있었다. 그리고 구성안을 놓고 촬영 일정과 진행에 대해 비교적 상세한 대화를 주고 받았다. 현장에 당도했기 때문인가 그녀는 지금까지 나를 대하던 태도와 달리 대 단히 단정적이면서도 명쾌한 방식으로 촬영 계획을 보완하거나 수정해나 갔다. 나레이션과 드라마타이즈로 대체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을 구분해서 촬 영 감독에게 말해주고, 그것을 통해 오늘부터 시작되는 촬영의 주안점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료하게 피력하려 했다. 식사를 끝내자마자 일행은 다시 두 대의 차에 분승해서 읍거리를 빠져나 갔다. 송라고등학교는 읍거리에서 3킬로미터정도 떨어진 한적한 외곽에 있었는 데, 그곳으로 가는 길에 예전의 다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나는 한껏 서 행을 하며 오랜 세월의 빗금이 아로새겨진 듯한 교각을 눈여겨 보았다. 그해 가을 어느날, 이미랑 선생과 단 둘이 이 다리를 건너며 아직 눈 떠 지지 않는 미래와 간파되지 않는 인생에 대해 가슴 떨리는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으리라. 기억의 저쪽, 스러져버린 시간의 이면으로 스물네살의 교사 소년생과 열여덟살의 고등학교 이학년 학생이 어설프게 걸어가는 장면이 희미한 실루엣처럼 떠오르는 것 같았다. -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도 존재한다고 믿을 수 있는 마음을 지 니고 있어야 해.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믿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런 것 너머에 훨씬 중요한 것이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거친 세상에 나가서도 감성이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는 거야. - 예를 들면 에메랄드 궁전 같 은 거요? - 그래, 그런 거야. 꿈이 있어야 감성이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고, 감성을 잘 가꾸어야만 인생이 거칠어지지 않을 수 있단 말야. 너, 이담에 어른이 된 뒤에도 내 말을 기억해 줬으면 좋겠다. 송라고등학교에 당도하자마자 이예린은 곧장 본관 건물에 있는 교무실 로 들어갔다. 나머지 촬영팀은 차에서 내려 담배를 피워물거나 촬영용 테이프에 견출 지를 붙이거나 ENG카메라 파인더로 배경이 될 만한 장소를 미리 탐찰하거 나 했다. 그들에게서 떨어져나와 나는 팬지와 고깔제비 꽃, 분홍빛 앵초 따위가 심어진 화단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았다. 어디로인가, 부드러우면서도 묵중한 어떤 기류가 발목에 휘감겨 안온하 면서도 무감각한 세계로 나를 이끌어가는 것 같았다. -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은 너무 빨리 지나간단다. 너무 빨리 지나가기 때문에 사라들 마음에는 추억이 남기도 하고 때로는 그리움이 남기도 하는 거야. 우린 날마다 이 플라타너스 길을 오고 가지 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보면 인생에 꼭 한 번 밖에 이 길을 지나가지 않은 것처럼 아프게 되새겨질지도 몰라. 그러 니까 아무리 작고 사소한 것이라도 이 세상에 중요하지 않은 건 아무것도 없는 거야. 카메라의 위치가 정해지는 동안 나는 무척 긴장된 상태로 시간을 보냈다 . 깡마른 카메라 감독은 자신의 위치를 설정하기 위해 꽤나 신경을 쓰는 눈치였다. 하지만 나는 큐 사인이 떨어진 뒤에 내가 해야 할 말,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모색하기 위해 은밀하게 조바심을 치지 않을 수 없었다. 열여덟이었던 그때, 나를 눈 멀게 하고 내 영혼에 깊은 떨림을 전해주던 그 열병을 대체 무슨 수로 설명할 수 있으랴. "준비되셨나요?" 카메라 의 위치가 이십여m 전방으로 고정되자 이예린이 손을 들어 내게 물었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준비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라고 나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준비된 상황에서가 아니라 강제된 상황에서 나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일 종의 자동 기술에다 모든 걸 떠넘기기로 작정한 것이었다. 다음 순간, 카메라 감독을 보고 나서 이예린은 위로 들어올렸던 손을 밑 으로 내리며 특정한 사람을 지적하듯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그것이 그녀 특유의 큐 사인인 모양이었다. 아무렇든 아주 천천히 두서너 걸음을 걸어나가며 나는 담담한 기분으로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것이 첫번째 사랑이었다는 것 이외에, 나는 지금도 그것에 대해 아 무 것도 구체적으로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하게 넘겨버려야 할 한 시절의 열병 같은 것이었는지 그것에 대해서도 나는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그 시절에 내 영혼에 깊이 아로새겨진 무엇인가가 마흔 셋이된 지금까지도 내 인생에 나도 모를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만은 분 명하게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내가 열여덟이었던 그때, 나는 날마다 이 길을 오가며 불투명한 미래의 불가해한 인생에 대해 은밀하게 고뇌하던 고등학교 이학년 학생이었습니 다. 그리고 어느날 오후, 나는 베이지색 바바리 차림으로 이길을 걸어들어오 던 이미랑 선생님을 처음으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첫 발령을 받아 부임지로 걸어들어오던 영어 선생님… 그 해질 무렵을 나는 지금도 운명의 천둥소리가 들리던 순간으로 생생하 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 컷. "선생님, 아주 좋아요. 혹시 다른 방식으로 말씀하고 싶지는 않 으세요?" 헤드폰으로 나의 멘트를 듣고 있던 이예린이 손을 들어 컷 사 인을 주고 나서 다소 밝은 표정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다른 식으로 말할 수도 없고, 지금 했던 말을 똑같이 되풀이할 수도 없소. 오직 한번, 나도 모르게 지껄일 수 있을 뿐이요. 굳이 다시 해야 한다면 원고를 써서 읽거나 방금 했던 내용을 채록해서 암기를 하는 수 밖에 없을 거요. " 단 한번의 멘트로 진이 빠져버린 듯한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오직 한번요?… 무슨 말씀인지 알겠어요. 준비하거나 의도된 방식으로 가기 싫다, 그런 말씀이죠? 선생님 멘트가 불충분하다고 생각하는게 아 니니까 절대 오해하진 마세요. 그리고 필요한게 있다면 나레이션과 드라 마타이즈로 보충하면 되니까 걱정할 건 아무 것도 없어요. 아무튼 이번 멘트, 아주 담백하고 좋았어요. " 이번에는 카메라가 나의 등 뒤쪽에 고 정되었다. 첫번째 멘트를 마친 내가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학교 안으로 걸어들어가 는 장면을 찍기 위해서였다. 물론 그 순간에도 나는 카메라를 전혀 의식하지 않았다. 의식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나도 모를 환기력에 강렬하게 사로잡혀 촬영팀 과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 외따로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 "이제 걸어가세요. 선생님. " 등뒤에서 들려오는 이예린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촬영을 위한 행동이 아니라 실제로 어떤 기류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듯한 기분으로 나는 푸른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 과거의 공간으로 걸어들어가 고 있었다. 하늘색 원피스와 나풀거리는 흰 블라우스 차림의 여자, 그리고 검정 교 복 차림의 내가 곧게 이어진 길을 따라 나란히 걸고 있었다. "넌 네가 다른 애들보다 정신적으로 훨씬 조숙하다는 걸 아니? 어떤 때 , 난 네가 말하는 걸 들으면서 깜짝 깜짝 놀라곤 해. 하지만 그런 게 나 쁘다는 뜻은 절대 아냐. " "선생님, 전 열여덟인 걸요. 그리고 열여덟이 면 어른과 똑같이 사고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제가 어른보다 못하다고 느끼는 건 단지 한가지 이유 때문인데… 그게 바로 경험 부족이에요. " "넌 경험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그럼 이담에 어른이 되 어서도 경험을 위해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니?" "할 수만 있다면 그 러고 싶어요. 배를 타고 오래오래 항해를 해보고 싶기도 하고, 남들이 올 라가 보지 못한 산을 등정해 보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남극과 북극, 적 도 부근의 사막이나 아프리카의 오지 같은 곳에도 가보고 싶어요.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서 몸이 몇 개쯤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때가 많 거든요. " 까르르, 이미랑 선생의 웃음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때 내 옆으로 다가온 사람은 이미랑이 아니라 이예린 피디였다 . 내가 걸어가던 길로 곧장 2학년3반 교실이 있던자리, 그러니까 본관 뒷 편의 교사로 가면 된다고 그녀는 말했다. 그리고 당시에 2학년3반이 있던 위치를 기억하겠느냐고, 자신이 교무실 에서 알아보려 했지만 허사였다고 그녀는 사뭇 궁금한 표정으로 나를 보 았다. "당시에 내 번호는 51번이었고, 나는 뒤에서 두번째 줄에 앉아 있었소 . 그리고 이미랑 선생은 나무로 만들어진 탁자 위에다 항상 녹음기를 올 려놓고 수업을 진행하곤 했었소. " "기억력이 좋으신 건가요. 아니면 특정하게 각인이 된 건가요?" 본관 건물 옆을 지나 뒤편 교사가 보이는 지점으로 접어들 때 그녀가 뒤를 돌 아보며 물었다. 나머지 촬영팀들이 승합차를 타고 한껏 느린 속도로 그녀와 나를 따라오 고 있었다. "각인이 아니라 끌로 판 것처럼 깊이 아로 새겨지는 기억들이 더러 있 어요. 이미랑 선생님이 들고 다니던 녹음기에는 물론 수업을 위한 테이프 가 들었지만, 때때로 우리는 그 녹음기에서 다른게 흘러나오는 것도 들을 수 있었소. " "다른거라뇨?"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는 나를 돌 아보았다. "팝송이나 샹송, 그런 것들이었소. " "아…그래요, 그런 것이었군요. 그럼 교실로 들어가면 하고 싶으신 말씀이 많아지겠네요?"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을 거요. 어느날, 수업시간에 이미랑 선생님이 내 자리에 앉아서 눈물을 흘리셨죠?"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그녀는 물었다. "그날은 몸이 아프다며 교실로 들어오자 마자 나에게 다가와 자습을 시 켰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그래서 난 그 선생님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앞 으로 나가 아이들에게 자습을 하라고 말하고는 자습 감독처럼 우두커니 서서 이미랑 선생님만 지켜보았죠. 정말 몸이 많이 아픈 사람처럼 그녀는 고개를 폭숙인 채 꼼짝도 하질 않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인가, 난 그녀의 어깨가 아주 가늘게 들먹이고 있다는 걸 알수 있었어요. 고개 를 숙인채 남 모르게 울고 있었던 거죠. 아무튼 그날 그 순간의 햇살과 교실 풍경과 끈끈한 기류 같은 게 나에게는 단 몇분전에 일어났던 일처럼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는거요. " "그럼 그때 이미랑 선생님이 왜 울었 는지를 이 선생님도 모르고 계시는 건가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녀는 물었다. 그래서 나도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녀를 돌아보았다. 비둘기 몇 마리가 본관 건물 지붕에서 푸드득 날아 올라 이내 자취를 감 춰버렸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내가 직접 물어보질 못했으니 알 도리가 없죠 . 아무튼 그로부터 몇달이 지난뒤에 학교에 사표를 제출했으니까, 당시의 심정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대충 짐작을 할수 있을 뿐이요. 하지만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카메라 앞에서 절대로 언급하지 않을거요. 혹시라 도 이 세상 어딘가에서 당사자가 이프로그램을 보게 될 경우…그런 것도 나로서는 무시할 수가 없는 거요. 어쩌면 볼거라는 기대감과 보았으면 좋겠다는 바램이 있는지도 모르겠지만…아무튼 그런 걸 말하고 싶지는 않 소.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먼저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잠시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여전히 걸음을 옮겨 놓지 않았다. 그러자 뒤따라온 승합차에서 빵빵, 경적이 울렸다. 돌아보니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한 표정으로 그녀가 승합차를 향 해 손을 한번 들어보이고는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디귿자형으로 지어진 뒤편 건물의 위치는 예전 그대로였다. 하지만 위치만 똑같을 뿐 함석지붕과 콘크리트 담벽으로 삼십년 이상을 버티고 있던 당시의 단층 건물은 아니었다. 예전 건물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다 새로운 이층 건물을 올렸다는 걸 단 박 알아차릴 수 있었던 것이다. 기억을 더듬을 필요도 없이 나는 왼쪽 현관으로 들어가 곧장 오른쪽 복 도로 꺾어졌다. 그리고 두번째 교실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출입문 위쪽의 유리를 통해 안쪽을 들여다 보았다. 교실에는 물론 당시의 흔적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교실 뒷부분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늦은 하오의 햇살, 거기서 아 련한 기억의 세계가 아지랑이처럼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열쇠 꾸러미를 손에 든 당직 여교사가 나타나 교실 출입문을 열어주었다. 감색 투피스차림의 여교사가 문을 열어주고 돌아가자마자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 촬영 준비를 시작했다. 이예린이 구성안을 들여다보며 뭔가를 메모하는 동안 나는 이곳저곳을 살피며 천천히 교실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교실 뒤편의 창문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건물과 건물사이에 조성된 아담한 화단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열여덟이었던 그때, 나를 사로잡고 있던 뜨거운 열기는 살아나지 않고 덧없는 세월의 허물만 느껴져 기분이 이를 데 없이 막막해졌다. - 비가 오는 날, 멜라니 사프카를 듣고 있으면 저절로 눈물이 나 젊다 는 게 축복이 아니라 고통으로 받아들어질 때, 그래서 내 가슴의 에메랄 드 궁전에서 광채가 스러질 때… 그럴 때가 나는 가장 견디기 힘들어, 타 인을 사랑하는 게 형벌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내가 열여덟이었던 그 해 가을, 이미랑 선생은 지금 내가 선 이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비 내리 는 세상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겪고 있는 사랑의 고통에 대해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 으로 내게 힘겹게 말했었다. 그 깊은 혼돈의 시간, 나는 그녀가 타인을 사랑한다는 사실 때문에 끔찍 스런 형벌의 고통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동료 교사와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무성한 소문에 시달리며 날 마다 생기를 잃어가던 그녀로 인해 그때 내가 겪어야 했던 형벌의 고통을 그녀는 끝끝내 눈치채지 못했으리라.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 내가 멜라 니 사프카를 듣지 못하는 정서적 불구로 살아왔다는 걸 그녀는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선생님, 그렇게 서 계시니까 뒷모습이 너무 허전해 보 여요. 저 좀 돌아보세요. " 창밖으로 향했던 시선을 거두고 뒤를 돌아보 자 이예린이 다소 안쓰럽다는 눈빛으로 물끄러미 나를 올려다보았다. "준비가 끝난거요?" 어두운 기억의 여파를 털어내지 못한채 나는 무표 정한 얼굴로 그녀에게 물었다. "준비는 끝났는데…… 괜찮으시겠어요?" "괜찮소. 설령 괜찮지 않다고 해도 이젠 어쩔 수 없는 상황 아뇨?" 이미 엎질러진 물이니 서둘러 끝 내기나 했으면 좋겠다는 표정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좋아요. 그럼 예전에 선생님이 앉으셨던 자리에서 시작해서 지금 여기 , 이 창가로 다가와 얘기를 끝내는 걸로해요. 물론 멘트는 선생님이 알아 서 하시겠지만… 가능하면 에메랄드 궁전에 초점을 맞춰 주셨으면 좋겠어 요. "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나는 천천히 오른쪽 두번째 줄, 뒤에서 두 번째 자리를 찾아 걸어갔다. 그리고는 의자 옆에 서서 이예린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구도를 재는 듯한 눈빛으로 고래를 갸웃거리다가 자리에 앉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손을 밑으로 내리는 시늉을 했다. 곧이어 카메라의 위치가 정해지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큐 사인 을 내게 주었다. "열여덟이었던 그때,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한 여선생님에게 정 신을 빼앗기고 있었습니다. 일생에 오직 한번 밖에 일어날 수 없는 일을 겪을 때처럼, 그리고 깊은 열병을 치를 때처럼 저의 영혼은 끝없이 비상하고 때로는 추락을 경험하 곤 했습니다. 그 선생님은 교단에서 아주자주 '오즈의 마법사' 에 나오는 에메랄드 궁 전에 대해 말하곤 했습니다. 자신의 꿈을 성취하기 위해 찾아가는 첫번째 에메랄드 궁전, 그리고 고 난을 극복한 뒤에 다시 찾아가게 되는 두번째 에메랄드 궁전…… 그것은 꿈과 현실을 상징하는 서로 다른 궁전이었습니다. 하지만 열여덟이었던 저는 꿈과 현실의 간극에 뼈저린 인생의 고뇌가 깃 들어 있다는 걸 전혀 알아차릴 수 없었습니다. 오직 한 가지, 현실에 의해 꿈이 무산되는 에메랄드 궁전이 아니라, 꿈 에 의해 꿈이 유지되는 아름다운 에메랄드 궁전만을 내 마음에 세워두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나에게 에메랄드 궁전의 서로 다른 의미를 가르쳐 준 사람, 그녀를 내 꿈의 궁전에서 평생 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나의 멘트를 듣고 있던 이예린은 거기서 재빨리 컷 사인을 주었다. 그리고 장소 이동, 나는 창문 옆으로 다가가 교실에서의 마지막 멘트를 준비했다. 카메라를 옮기는 동안 나는 교실 바닥에 보자기 크기만하게 깔린 잔광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러자 그 빛살이 슬그머니 가슴으로 스며들어 온몸을 나른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이예린의 큐사인을 받고 나서 나는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이렇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마흔셋이 된 지금, 저는 열여덟이었던 당시의 제 무지와 열정과 고뇌 를 조금도 부꾸러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도 제 가슴에 꿈의 궁전이 온전하게 보존되 고 있다는 사실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꿈의 궁전을 내 가슴이 아로새겨 준 사람이 싸늘한 현실 의 궁전으로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이 지금도 여전히 아프게 되새겨질 뿐입 니다. " 이예린이 컷 사인을 주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거기서 말을 중단했 다. 그리고는 더이상 할 말이 없다는 표정으로 카메라 뒤쪽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직분을 까마득히 망각한 사람처럼 그녀는 미동도 않고 서 있었다 . 카메라 감독이 허리를 펴고 그녀를 돌아보자 그제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한 표정으로 그녀는 어깨를 움찔했다. "아, 미안해요. 교실 신은 여기서 끝내요. 학교 주변 스케치를 하고 나 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죠. " 짧게 한 마디를 던지고 나서 그녀는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그러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카메라 감독이 보조 연출자를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하지만 밖으로 나온 촬영팀이 학교 주변을 카메라에 담는 동안에도 그녀 는 그 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외따로 떨어져 행동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인 듯 학교 교무실엘 한번 들어갔다 나온 직후부터 줄곧 고독한 산책자와 같은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혼자 배회한 것이었다. 어느덧 해질 무렵, 검붉은 화염처럼 그녀의 등 뒤에서 노을이 타오르고 있었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요?" 차를 몰고 학교를 빠져나가며 나는 조심 스럽게 그녀에게 물었다. "아뇨 아니에요. 신경쓰지 마세요. 그리고…나머지 촬영이 진행되는 동 안에는 더이상 멘트를 하지 않으셔도 돼요. " "이미랑 선생이 머물던 자 취집 말이오?" "네. 그 부분은 그냥 이선생님이 어둠 속에 서서 물끄러 미 집을 바라보는 장면으로 촬영하고 끝낼 거예요. 다른 식으로 적절하게 처리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 절대 오해는 하지 마세요. " 말은 그렇 게 했지만 뭔가, 그녀는 깊은 감정적 난조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앞서 촬영한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러는 거냐고 묻고 싶 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입을 열지 않았다. 애초부터 일이 수월하게 풀릴 거라는 기대감 같은 걸 지녀본 적은 없지 만, 설령 일이 꼬였다 해도 내가 나서야 할 계제가 결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말없이 나는 핸들을 좌측으로 꺾어 이미랑 선생이 일년동안 자취 를 하던 집 혹은 집이 있던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학교 교문을 빠져나와 십분쯤 도로를 따라 걷고, 거기서 우측 골목으로 접어들어 다시 십분쯤 들어가면 나타나곤 하던 집 - 아직도 그 집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을까? - 본오야, 내가 열쇠 줄 테니까 집에 가서 테 이블 위에 올려진 영어 테이프 좀 가져다 줄래?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한달쯤 지난뒤, 어느날 점심시간에 이미랑 선생 은 내게 뜻하지 않은 심부름을 시켰다. 그래서 별다른 생각없이 나는 그녀의 집으로 가 방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영어테이프를 손에 들고 잠시, 아주 잠시 이상한 감흥에 사로잡혀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다가 테이블 앞에 놓인 작은 책꽂이 위에 올려진 노란 사진 봉투를 발견할 수 있었다. 아마 사진관에서 찾아온 지 얼마되지 않은듯 봉투에는 구김도 별로 없었 다. 그래서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그 봉투를 손에 들고 안에 들어 있 는 사진을 꺼내보았다. 하지만 이삼십 장은 족히 될 듯한 사진의 첫장을 보는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아. 다리가 심하게 후들거리는 걸 느끼면서도 나는 한장 한장의 사진 에 화려한 컬러로 인화된 소문의 실체를 두 눈으로 똑똑하게 확인 할 수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져 있던 이상한 소문이 거짓이 아니란 걸 분 명하게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다. 그녀와 같은 시기에 서울에서 첫발령을 받아온 과학선생이 어째서 그 사 진속에서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사진을 찍어야 했는지, 그리고 그들이 무슨 이유로 송라읍이 아닌 타지로 함께 등산을 가게 되었는지, 그런 걸 나는 조금도 궁금해 하지 않았다. 궁금한 건 그들이 아니라 바로 나, 끔찍스런 증오의 화염에 휩싸여 있는 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날 이후, 그래서 나는 피가 마르는 기분으로 어둠을 지키고 서서 그 녀의 불켜진 방과 불꺼진 방을 오래오래 지켜보다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 한두번인가, 과학선생이 그녀의 방으로 바람처럼 잦아 들어가거나 그녀 의 방에서 그림자처럼 빠져나오는 걸 목격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어둠을 지키고 서 있노라면 어둠과 내가 분리되어 있는게 아니라 내가 바로 어둠의 일부가 되어 있는것 같다는 섬뜩한 생각이 들기도 했 다. 어쩌면 어둠의 일부가 아니라 어둠 그 자체. "예상을 못했던 건 아니 지만… 최악의 상황이로군. " 놀랍게도 그녀가 자취를 하던 집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그 일대에는 조용한 단독 주택단지가 형성돼 있었다. 그래서 골목이 시작되는 입구에서 차를 세우고 나는 화염에 휩싸인듯 붉 은 석양빛을 받고 있는 주택 단지를 올려다 보았다. 이쯤이던가 저쯤이던가, 그녀의 집으로 들어가는 협소한 골목이 있던 자 리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이십오년 전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어요. 그러니까 이쪽 입구쯤에서 주택단지와 석양을 마주보는 자세로 그냥 서 계시기만 하세요. "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그녀는 이제 마악 승합차에서 장비를 내리고 있는 뒤쪽의 촬영팀을 향해 갔다. 그리고는 출연자의 뒷모습과 예전의 집이 있던 자리와 노을이 일직선을 형성하게 해 달라, 하는 말을 카메라 감독에게 전했다. - 너는 내가 왜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니? 이예린이 시키는 대로 타오르는 노을과 집이 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나는 기억의 공간에 갇혀 있던 뼈저린 말들을 되살려냈다. 가을 내내 절망과 고통에 젖은 표정으로 힘없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있던 그녀, 이예린 선생이 나를 상담실로 부른건 겨울방학이 얼마 남겨지지 않았을 때였다. 아무런 사전 설명없이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는 말을 건네고 나서, 그 걸 이해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그녀의 두 눈에는 생기가 전혀 없어보였다 . -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전 선생님을 이해할 수 있어요. 하지만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마세요. 이미랑 선생과 과학 선생에 대해 학생들 사이에 전염병처럼 퍼져 있던 온갖 소문을 떠올리며 나는 그렇게 대답했다. 둘이 결혼할 거라던 처음의 소문은 어느새 어미랑 선생이 과학 선생에게 배신을 당했다느니, 과학 선생에게는 이미 서울에 약혼자가 있다느니 하 는 소문으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소문에 대해 나는 이미랑 선생에게 아무것도 묻고 싶지 않 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설령 사실이라고 해도, 그녀를 위해 축성한 내 마음의 에매랄드 궁전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감이 있었기 때문이었 다. 하지만 열여덟이었던 그때, 나는 그녀가 얼마나 끔찍스런 고통의 터널 을 빠져나가고 있었는지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희디흰 치아를 드러내고 생기발랄하게 웃던 봄과 여름, 그녀가 열여덟의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싶어한 에메랄드 궁전에서 그녀는 이미 벗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청춘의 상징과 같은 에메랄드 궁전, 그것을 스스로 허 물고 절망과 고통으로 축성된 머나먼 유폐의 궁전으로 떠나는 그녀를 위 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달리 아무 것도 없었다. 열여덟이었던 그때, 열여덟인 내 자신을 한없이 저주할 수밖에 없었던 그때. "선생님 이제 됐습니다. " 타오르던 노을이 사위어가는 걸 망연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 등 뒤에 서 이예린이 아니라 카메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다. 길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나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카메라 보조와 연출 보조는 이것저것 촬영 장비를 챙겨 차로 옮겨싣고 있었고, 카메라 감독은 느긋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워물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일인가, 이예린은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 순간에만 그런게 아니라 촬영이 시작된 직후부터 시종 그런 자세로 서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가 사뭇 못마땅하게 여겨지는지 담배를 피워문 카메라 감독이 그녀를 지나쳐가며 묘한 여운을 남기는 말을 던졌다. "이거야 원, 누가 출연자이고 누가 연출자인지를 모르겠네. " 밤 여덟시경, 나는 이예린의 방으로 전화를 걸었다. 오후부터 시작된 그녀의 감정적 난조가 다소 걱정스럽기도 하고, 숙소로 정해진 여관방에 죽치고 앉아 있자니 왠지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이 기도 했다. 숙소를 정하고 난 직후, 인근의 식당에서 일행이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에도 그녀는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었다. 연출 보조에게 일행의 식사를 부탁하고 자신은 식사를 하지 않은 것이었 다. 연출 보조는 사뭇 멋쩍은 표정으로 그녀가 속이 안 좋다고 하더라는 말 을 전했지만, 왠지 나는 그 말이 곧이 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식사를 끝낸 일행이 읍거리를 구경하겠다고 떠난 뒤에 나는 곧바 로 숙소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덟시가 될 때까지, 나도 모를 어떤 힘이 지극히 사소한 감정의 흐름까지 제어하는 것 같아 나는 벽에 등을 기대고 애꿎은 담배만 피워 댔다. 그리고 여덟시가 되었을 때, 나도 모르게 마음이 다급해져서 황망스럽게 수화기를 집어들고 그녀의 방 번호를 누른 것이었다. "내가 이예린씨 기분을 모르고 전화를 했다면 용서해요. 오후부터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던데…… 어디가 많이 불편한 거요?" "……아뇨, 괜찮아요. 그 정도는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냥 가끔씩 찾아오는 우울증 같은 거라고 생각하세요. " 애써 밝은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지만 , 그녀의 감정적 난조는 이미 심연에 닿아 있는 것 같았다. "우울증 같은 거라면…… 혹시 내가 도움이 될 순 없겠소? 사실은 나도 기분이 울적해서 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 정말 몸이 아픈게 아니고 감정적인 문제라면 우리 기분 전환을 위해 같이 외출이나 합시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읍거리로 나갔는데 청승맞게 여관방에 틀어박혀서 남는 게 뭐가 있겠소?" 권유인가 회유인가, 나도 모르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되는 대로 마구 지껄여댔다. 하지만 그녀는 선뜻 반응하지 않았고,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전혀 엉뚱 한 질문을 건냄으로써 나를 몹시 당황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이 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리고 술 을 마신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 "미안해요. 외출하고 싶으시면 혼자 다녀오세요. 설령 선생님이 제 기분 을 바꿔 줄 수 있다고 해도…… 왠지 지금은 그런 도움을 받고 싶지 않네 요. " 서늘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나서 철컥, 그녀는 수화기를 내려 놓 았다. 더이상 듣고 싶은 말도 없고, 더이상 하고 싶은 말도 없다는데 대한 단 호한 의사 표현인 것 같아서 그 단절음은 나를 몹시도 당혹스럽게 만들었 다. 뿐만 아니라 그녀의 감정적 난조가 어쩌면 나에게서 기인된 것인지도 모 르겠다는 생각이 섬뜩하게 뇌리를 스쳐갔다.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사파리를 걸쳐 입고 나는 서둘러 방을 빠져 나왔다 . 그리고는 조급한 마음으로 이예린이 머물고 있는 201호실 앞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하지만 무슨 이유 때문인가. 막상 방문 앞에 서고 보니 기분이 이를 데 없이 난감해졌다. 인위적인 노력으로는 도무지 넘어설 수 없는 벽, 혹은 영원히 동화될 수 없는 낯선 차원의 경계 지점에 내가 서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뇌 리를 스쳐간 때문이었다. 노크를 해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그녀의 방문 앞에 서서 잠시 망설이 다가 나는 씁쓸한 기분으로 혼자 여관을 빠져나왔다. 훈훈한 밤공기와 주변의 불빛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기분이 쾌연하 질 않았다. 이예린에 대해 내가 아는 게 무엇인가. 마음의 갈피에서 들려오는 자탄 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길 위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술이 아니라 독이라도 마시고 싶은 밤, 나도 모르는 사이 송라읍의 불빛 은 내 등뒤로 아련하게 밀려 나가고 있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어둠 속에서 익숙함이 느껴지는 공간으로 접어들어 나는 비로소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알 수 없는 신비와 모호함으로 가득찼던 그 세계, 기억의 중심부로 걸어 들어와 조용히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 오후에 촬영을 마치고 간 송라고등학교 운동장까지 걸어오 는 동안 나는 내내 이예린에 관한 생각에만 사로 잡혀 있었다. 이미랑 선생이 아니라 이예린, 다시 말해 과거가 아니라 현재의 문제를 생각하며 거기까지 이르게 된 것이었다. "…신기하군. " 어둠이 빼곡 들어찬 운동장 한가운데 서서 나는 놀라 운 영적 체험을 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토록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던 기억의 본향으로 돌아와 비로소 과 거가 아니라 현실과 접속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미랑 선생이 아니라 이예린이라는 인물을 통해 그런 계기를 얻게 되었다는게 나에게는 매우 특이한 경험으로 받아들여진 것이었다. 이예린에 대한 현실적 감정, 그것이 과거에 대한 나의 집착을 잠시나마 망각하게 한 때문일까. 아주 문득, 내 등뒤에 누군가 서 있는 것 같다 는 생각이 들어 나는 슬그머니 뒤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견고한 어둠 이외, 내 등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과거의 뿌리처럼 여겨졌던 이미랑 선생도 없었고, 영원히 꿈이 유지될 것처럼 여겨지던 에메랄드 궁전도 없었다. 오직 흐무러진 환영이 남아 어둠과 정적의 세계를 미묘하게 자극하는 것 같았을 뿐이었다. 무수한 날들을 거슬러 올라가 간신히 아문 상채기를 다시 뜯어내고, 그 꽃잎처럼 붉은 속살을 가슴 아리게 되새겨 보아야 한다는 곤혹감 - 그 래, 인생이 다큐멘터리 같은 건 아닐 거라는 생각을 하며 나는 천천히 오 던 길을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내 영혼의 집,에메랄드 궁전은 어디로 갔는가. 꿈을 꾸다가 불현듯 눈을 떴을때, 머리맡에서 요란스럽게 전화벨이 울려 대고 있었다. 푸른 줄무늬의 커튼이 드리워진 창을 올려다보니 어느덧 날이 밝아 있었 다. 알몸으로 벌판을 달려가던 두명의 여자와 엄청난 폭우, 그리고 온몸에 소름이 돋게 하던 푸른 물뱀의 기억이 꿈에서 현실로 연장된 것 같아 나 는 상체를 일으키며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그리고 나서 수화기를 집어들자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낭랑하게 귓 문으로 밀려들었다. "이선생님, 저 연출보조 김인규입니다. 편히 주무셨나요?" "잘잤소. 그런데 지금 몇시나 됐소?" 지난밤, 송 라고등학교에서 여관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온 캔맥주 세개를 혼자 마시고 잠자리에 든 게 몇시였던가, 하는걸 되새기며 나는 물었다. 한시나 두시, 어쩌면 세시? 그것도 기억에 정확하게 남아 있질 않았다. "지금 여덟시 반입니다. 지난밤에 늦게 주무셨나보죠?" 지금까지 자고 있었다는 걸 분명하게 알 아차린 듯한 어조로 그는 물었다. "캔맥주를 몇개 마시고 좀 늦게 자긴했는데…그럼 나만 빼고 나머지 사 람들은 벌써 출발준비를 다 끝낸거요?"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며 아차, 하는 표정으로 나는 물었다. "아뇨 저희는 아침 일곱시부터 송라읍거리 촬영을 마치고 방금 돌아왔 습니다. 삼십분 뒤에 아침식사를 하고 곧장 은명시로 출발할거니까 늦지않게 준 비하세요. 여기서 은명시까지는 대충다섯시간쯤 걸릴테니까, 출발이 늦어 지면 곤란하거든요. " "알겠소. 그런데 이예린 피디는 아직도 몸이 안 좋은거요?" 어째서 이예린이 직접 전화를 걸지 않았는가, 하는게 나로서 는 궁금할 수밖에 없었다. "아, 아녜요. 아침 촬영도 같이 나갔다 왔는걸요. 저더러 선생님께 전 화 드리라는 말을 이피디가 하긴 했지만, 그런 말을 하지 않더라도 이런 일은 원래 제가 알아서 하는 겁니다. 진행에 필요한 온갖 자질구레하고 잡다한 일이 바로 연출보조의 몫이거 든요. " "아무튼 알겠소. 샤워 끝내고 내려가죠. " 수화기를 내려놓고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현실적인 일과 비현실적인 일이 한데 뒤엉겨 정신이 몹시 산만한 것 같 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어째서 이예린이 내게 직접 전화를 걸지 않았을까, 하는게 현실적인 문 제의 핵처럼 마음에 딱딱한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세찬 폭우를 맞으며 알몸으로 벌판을 가로질러가던 두명의 여자…그녀들을 바라보던 꿈속에서의 절박한 안타까움도 생생하게 가슴 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신없이 여자들을 따라가다가 느닷없이 마주치게된 푸른 물뱀의 기억, 그것마저 이제 막 벗겨진 허물처럼 미끈미끈하게 뇌리에 남아 있 는 것 같았다. 허물. 그래, 아주 오래된 허물을 벗겨내는 기분으로 나는 샤워를 했다 . 의도적으로 그런 기분을 조성하려 한게 아니라 샤워를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그런 기분이 생성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기분이 전적으로 이예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걸 내가 알게 된 건 샤워를 끝내고 욕실 밖으로 나온 뒤였다. 창을 넘어온 부신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온몸에 여린 새살이 돋는 듯한 기 분 - .이예린이라는 새로운 존재에 의해 이미랑이라는 오래된 존재의 허 물이 벗겨졌다는 걸 그제서야 비로소 알아차리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준비를 끝내고 1층으로 내려가자마자 그때까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이예린에 대한 감정적 집중력은 또다른 허물이 되어 나를 낭패스럽 게 만들었다. 일행과 함께 무슨 얘기인가를 주고 받던 그녀, 무슨 이유에선지 나를 보 자마자 의도적인 것처럼 슬그머니 고개를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뿐만 아 니라 내가 촬영감독을 위시한 나머지 사람들과 가벼운 아침 인사를 주고 받고 있을 때, 그녀는 이미 이삼미터쯤 앞에서 혼자 식당을 향해 걸어가 고 있었다. 출연자를 길들이기? 인근의 식당에서 한정식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 그래, 어쩌면 그런 것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이예린 이 내게 나타내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나름대로 헤아려 보려고 했다. 인생을 살아오며 알게 된 몇몇 방송연출자들에게서 그런 말을 들었던 기 억이 은연중에 되살아난 때문이었다. 지나치게 잘난체하는 인간이거나 지나치게 내숭을 떠는 인간이 출연자로 결정됐을 경우, 다시 말해 프로그램 제작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되는 기 질이니 성향이 엿보일 경우에는 과감한 길들이기를 통해 애초에 의도한 제작방향으로 이끌고 가야한다는것 - 그것이 그들 나름대로의 연출지론이 었던 것이다. 아무렇든 아침식사를 하는 동안 이예린은 시종 말을 하지 않았다. 나와 가장 멀리 떨어진 자리에 그녀는 촬영감독과 마주앉아 있었는데, 의도적으로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않게 하기 위해서인 듯 시간내내 그녀는 고개를 반쯤 숙이고 있었다. 피디인 그녀와 출연자인 내가 시종 꿀먹은 벙어리를 방불케 했으니 나머 지 사람들이야 말해 뭣하랴. 일행의 식사 분위기가 전체적으로 썰렁해진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일 터였다. 식사를 끝내고 출발 준비가 완료되었을 때도 마찬가지, 그녀는 뭔가 석 연찮은 행동으로 계속 나를 낭패스럽게 만들었다. 내가 먼저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나머지 일행이 승합차에 오른뒤, 다시 말해 은명시로 떠날 일만 남았는데도 뭔가를 망설이는 듯한 표정으로 그 녀는 선뜻 내 차를 타려고 하지 않은 것이었다. 내 차와 승합차 사이에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서 있는 그녀가 사뭇 짜증 스럽게 여겨진 모양. 승합차 조수석에 앉아있던 촬영 감독이 차창밖으로 고개를 내밀며 냅다 소리를 질러됐다. "이피디, 지금 아침 명상하는 시간이요?" 촬영감독의 고함을 듣고 나서야 비로소 이예린은 현실 감각을 회복한 표 정으로 내 차에 올랐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승합차가 먼저 출발했다. 하지만 나는 그녀와 나 사이에서 느껴지는 감정적 장애감을 제거하고 출 발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주차 브레이크 레버를 풀지 않았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알겠소?" 아침 햇살에 반쯤 점령당한 도로를 묵연한 표정으로 내다보다가 이윽고 나는 입을 열었다. 그것이 합당하고 필요한 질문이라서가 아니라, 그렇게 해서라도 말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에서 문득 던진 질문이었다. "…모르겠어요. " 굳은 듯한 자세로 앞을 내다보며 그녀는 대답했다. "그럼 자신의 기분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겠소?" 고개를 돌리고 대답 을 강요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그녀를 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내면으로 한껏 깊이 침잠한 사람처럼 일말의 동요 도 보이지 않았다. "말하고 싶지 않아요. " 그녀의 대답을 듣고 나서 나는 거친 동작으로 주차 브레이크 레버를 풀었다. 그리고는 선바이저에 꽂아 두었던 선글래스를 쓰고 나서 자동변속 선택 레버를 옮겨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명치 끝에서 부터 뜨겁게 치밀어오르는 열기가 나도 모르게 엑셀러레이 터를 밟은 발에 힘을 주게 만들어 도로로 진입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거리 를 찰나처럼 달려나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일단정지를 해야 하는 지점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될대 로 돼라, 하는 심정으로 좌우를 살피지도 않고 곧장 반대편 차선으로 넘 어가 버렸다. 하지만 내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도박을 하는 순간에도 그녀는 전혀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이예린씨 당신의 정체는 도대체 뭐요?" 차선을 제대로 잡고 비로소 안정된 주행상태를 유지하며 나는 물었다. "그건 제가 묻고 싶은 말이에요. 선생님의 정체는 도대체 뭐죠?" 차에 오른 이후 처음으로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건성으로 되받아치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하는 걸 강조하기 위한 행동 인 것 같았다. 하지만 짧은 순간 뒤에 시선을 거두고 그녀는 다시 앞을 내다보기 시작 했다. "이예린씨. " "네. 말씀하세요. " "얘기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우리 불필요한 감정 소모전은 그만둡시다. 이예린씨가 내게 그런 태도를 보이는 이유, 그리고 이예린씨의 감정 횡 포에 내가 이런 식으로 시달려야 하는 이유… 그 어느 쪽도 나는 온당하 다고 생각하지 않소. 간단히 말해 어이가 없다는 거요. " "어이가 없어도 어쩔 수 없어요. 저로서도 어쩔 수가 없는 걸요. " 뭔 가에 대해 단호하게 마음을 굳힌 듯한 목소리로 그녀는 잘라 말했다. "좋소, 그럼 한 가지만 더 물어봅시다. 이예린씨의 그런 태도가 공적인 데서 비롯된 거요, 아니면 사적인 데서 비롯된 거요.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 촬영에 관계된 일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 아니면 나에 대한 사적인 감정 때문에 그렇게 된 건가, 그게 궁금 하다는 거요. " "그런 문제에 대해 선생님은 언제나 경계가 분명하신가 요?" 내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날카로운 어조로 그녀는 물었다. "자기 감정의 경계를 스스로 자각할 수 없다면 무책임한 행동이라도 하 지 말아야 할 것 아뇨!" 그순간, 드디어 나는 내 자신이 폭발했다고 생 각했다. 찰나처럼 일어난 심신의 부조화로 인해 가슴은 섬뜩해지고 머리속은 뜨 끈해지고 눈앞은 아뜩해졌다. 그러나 그때까지 아슬아슬하게 유지되던 이성의 피막이 갈가리 찢겨지고 곧이어 나른한 해체감이 온몸을 엄습해왔다. 몇년에 한번 찾아올까 말까한 결정적인 함몰의 순간, 요컨대 격한 분노 가 몰고오는 일종의 정신적 공황상태로 돌입한 것이었다. 아. 햇살이 눈앞에서 무수한 난반사를 일으키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 며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핸들을 꺾었다. 송라읍을 벗어나는 마지막 지점, 그러니까 우회도로와 만나는 지점에서 갑작스럽게 우측의 잡목림 쪽으로 차를 몰아 도로를 벗어나버린 것이었 다. 급브레이크, 그리고 강력한 반동과 제동으로 인해 그녀와 나는 스프링이 부착된 인형처럼 위태롭게 앞으로 쏠렸다가 이내 되튕겨졌다. 잠시, 핸들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나는 거친 동작으로 도어를 열고 밖 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성난 들짐승처럼 정신없이 걸음을 옮겨 무성한 잡목림 사이로 들어갔다. 걸음을 멈추고 허공을 올려다보자 무성한 입새와 잔가지 사이로 날카로 운 빛살이 밀려들고 있었다. 그중의 한가닥, 농밀한 대기를 뚫고 빗금처럼 밀려든 빛줄기가 아리게 눈을 찔러왔다. 한치도 비켜서지 않고 선글래스를 벗자 이내 눈살이 찌푸려지면서 눈두 덩이 욱신거렸다. 그렇게 잠시, 눈이 멀어버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서 있다가 나는 돌 연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좀전보다 더욱 노기 어린 눈빛으로 차량이 세워진 곳을 노려보 았다. 하지만 햇살에 노출되었던 안구가 초점을 회복하지 못한 듯 내 시선이 가 닿은 곳에서는 희끄무레한 실루엣이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고 있을 뿐 이었다. 차량으로 여겨지는 정지된 물체 옆에서 작은 물체가 굼시덕 거리는 것 같았지만, 배경을 이루는 공간에 붉은 기운이 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 에 나는 선뜻 걸음을 옮겨 놓을 수 없었다. 그래도 결단이 필요하다면, 그것이야말로, 불타는 대기속으로 걸어 들어 가는 일과 조금도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으리라. 무엇인가. 이윽고 사물의 외관과 배경에서 붉은 기운이 스러지고 난 직 후, 나는 시야로 밀려든 이예린의 모습을 보고 벙그렇게 입을 벌리고 말 았다. 차량옆에서 굼지럭거리던 것의 실체, 그것이 바로 이예린이었다는 걸 섬 뜩하게 알아차린 때문이었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무릎위에다 양팔을 얹고, 그 위에다 얼굴을 빈틈없 이 파묻고 있었기 때문에 멀리서 얼핏 보기에 그녀는 목이 없는 기이한 구체 (球體) 처럼 보였다. 우는 건가? 어쩌면 그녀가 울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그때까 지 나를 사로잡고 있던 노기 대신 막연한 불안감이 나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다. 햇살이 희번득이는 햇살아래, 온몸을 오비어 파는 듯한 자세로 앉아서 그녀는 대관절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까닭모를 조바심을 느끼며 그녀 에게 다가갔지만, 내가 지척에 이른 뒤에도 스스로를 포박한 듯한 그녀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도리없이 그녀 곁에 서서 나는 그녀의 머리카락과 어깨와 등판 위에서 맑게 증류된 시심 (詩心) 처럼 스멀거리는 눈부신 오월의 햇살을 지켜보 았다. 그러다가 그녀 곁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한껏 웅크려진 그녀의 어깨위에 다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아까는 내가 미안했소. " 그녀의 어깨에서 아주 미세한 떨림이 감 지돼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그녀가 그렇게 기이한 자세로 쪼그려 앉아 내내 울고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갑자기 견딜 수 없는 연민이 치밀어 내 손끝마저 떨리는 것 같았다 . 하지만 그 순간의 적멸 같은 고적함, 그리고 그 순간의 숨막히는 정밀 속에서 나는 그녀와 나를 에워싸는 광대무변한 사랑의 기운을 느낄 수 있 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 지상에 오직 그녀와 나밖에 남지 않았다는 마지막 계 시처럼 나를 절박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감내하기 어려워 나는 기어이 그 녀의 어깨를 감싸안고 말았다. "나는 당신이 무엇을 슬퍼하는지 알 수가 없소.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 지 몰라도… 지금 이순간 나는 당신을 사랑해야 할 알 수 없는 의무감에 사로잡혀 있소. 이런 행동이 설령 무례라 해도, 이럴 수밖에 없는 내 심 정을 조금도 숨기고 싶지 않은 거요. 자, 그러니 이제 얼굴을 들어봐요. " 나직한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안은 팔에 더 욱 힘을 주었다. 그러자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그녀가 천천히 얼굴을 들어 올리기 시작했 다. 눈물이 범벅된 얼굴을 반쯤 들어 올리고 그녀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었다 . 그러다가 이윽고 무엇인가를 결심한듯 고개를 완전히 들고 아련한 눈빛 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 눈빛에서 깊고 저린 익숙함과 친근함이 느껴져서 나는 올곧게 그녀의 눈빛을 맞받아 주었다. "숨을 쉬고 있는데도 가슴이 너무 답답해요. 햇살이 따가워서 온몸에 통 증이 느껴지고…. 머리속은 온통 뒤죽박죽이라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어 요. 이럴 때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는 거죠?" 다시금 눈물이 그렁그렁해 진 눈으로 그녀는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잠시 그녀의 눈을 들여다보다가 나는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가슴 에 품어주었다. 그녀가 붓꽃을 들고 오던 날과는 전혀 다른 심정, 다시말해 내 스스로 그녀에게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뜨거운 열정에 나도 모르게 사로잡혀버 린 것이었다. "이럴 땐 아무말도 하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요. 노력해도 알 수 없 는 일들은 그냥 흘러가게 내버려두고, 자신도 또한 그 흐름에 몸과 마음 을 맡겨두면 되는 거요. 우리는 지금 아주 오래된 과거의 언저리에 머물 고 있지만, 이것도 또한 현실로 가는 과정의 일부라고 생각하면 그만인 거요. 그런 걸 누가 명쾌하게 안다고 말할 수 있겠소? 내가 세상을 살아 오면서 가장 확실하게 배운 것 한가지는 자연스런 인간의 감정…. 그것이 인위적인 힘이나 욕망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이었소. 시간이 지나면 어차 피 모든 것들이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것…. 간단히 말해 부정할 수 없는 걸 인간들은 부정하기 싫어하는 것 뿐이요. " 말을 하고 나서 나는 그 녀의 어깨를 잡고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러자 미간을 찡그리며 그녀는 서너번 연해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런 뒤에 자신이 무엇을 부정하고 싶어하는지를 분명하게 설명하고 싶 어하는 표정으로 그녀는 이렇게 입을 열었다. "아뇨. 그런게 아니예요. 난 그냥, 부정하고 싶은 것을 부정할 수 없어 서 괴로워하는 것 뿐이예요. 그게 고통스러운 거지 다른 건 아무것도 없 다구요. " 말을 하고 나서 그녀는 주저없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는 다시 차에 올라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내다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는 부정하고 싶은 것과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 지를 알 수 없어서 나는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그러자 나의 눈길을 무시하기 위해서인 듯 그녀는 냉랭한 표정으로 다시 금 선글래스를 꺼내 착용했다. 은명시로 가는 길. 그래, 은명시로 가는 동안 나는 내내 은명시로 가 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송라읍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의 뇌리에 아프게 각인된 도시 , 그곳에서의 촬영에 대해 나는 도무지 자신감을 가질 수 없었다. 촬영 때문에 갑작스럽게 생겨난 두려움이 아니라, 애초부터 그곳은 비켜 가고 싶은 기억의 터전으로 나의 뇌리에 각인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순하게 비켜가고 싶은 게 아니라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나도 모르게 기억의 혼선이 일어나는 걸 경험하곤 한 것이었다. 혼선이 아니라면 의도적인 검열이거나 편집 같은 것. 이예린과 내가 은명시에 당도한 건 오후3시40분경이었다. 송라읍을 벗어나는 지점에서 부터 시간을 지체하고, 도중에는 그녀가 속 이 불편하다고 해서 삼십분이상 도로휴게소에서 머물렀기 때문에 이래저 래 시간이 지체된 것이었다. 그녀와 나보다 훨씬 먼저 은명시에 당도한 것으로 보이는 촬영팀은 도시 로 집입하는 다리 옆의 공지에다 차를 세워 두고 뒤쪽의 분수대 앞에 나 란히 늘어앉아 담배를 피우거나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가 이예린과 내가 차에서 내려 그들에게 다가가자 오직 한 사람, 연출보조인 김인규를 제외하고 나머지 셋은 노골적으로 불쾌한 표정을 드러냈다. "왜 이렇게 늦은 거죠?" 일행이 있는 곳까지 당도하기전에 김인규가 먼저 이예린에게 다가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는 그래도 이예린과 함께 일을 진행하는 보조 연출자였으니 촬영팀이 나 운전기사와는 어쨌거나 입장이 다를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요컨대 마음의 준비를 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라, 하는 말을 전하기 위해 이예린에게 먼저 다가온 눈치였던 것이다. "속이 안 좋아서 휴게소에서 좀 쉬다 왔어요. 촬영감독이 뭐라고 하던 가요?" 선글래스를 벗으며 사뭇 경직된 표정으로 이예린은 되물었다. "여기 도착한 게 벌써 한 시간 사십분 전입니다. 그 정도면 상황이 어떤지 짐작할 만하죠?이게 첫번째 출장이라서 이피디 님은 잘 모르겠지만, 저 촬영감독 한번 뒤틀리기 시작하면 정말 골치 아 파요. 기분이 내킬 때는 시키지 않아도 자기가 스스로 일을 알아서 하지 만, 피디에게 한번 감정을 품기 시작하면 시종일관 속을 썩히는 사람으로 아주 유명하다구요. 그거 모르셨나요?"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는 겨죠 ?" 사뭇 짜증스럽다는 표정으로 이예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라는게 아니라, 사정이 그러니까 알아서 하라는 거죠. 별다른 뜻 은 없어요. " 그때 분수대 앞에 앉아 있던 촬영감독이 피우던 담배를 발 로 비벼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한껏 독이 오른 표정으로 이예린과 연출보조, 그리고 내가 서 있는 곳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왔다. 자신의 감정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다는걸 노골적으로 드려내려는 듯 그는 사뭇 불량스렁워 보이는 표정으로 턱을 치켜들고 이 예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것보쇼, 이예린씨. 지금 어른들 데리고 장난하자는 거요 뭐요?" " 연출자가 현장에 늦게 도착했다는 걸로 지금 시비를 걸자는 건가요?아니 면 내가 스탭들보다 나이가 적다는 걸 빌미삼아 기를 죽이다는 건가요?" 안색은 창백했지만 그녀의 두 눈에는 결연한 응전의 기운이 응축돼 있 었다. "오호라, 그러니까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하든 스태프는 그저 꿀먹은 벙 어리처럼 따라 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말이요, 이예린씨?" 이예린이라는 이름을 꼬박꼬박 사용함으로써 촬영감독은 그녀를 피디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분명하게 드러내려는 것 같았다. 다시말해 자신의 경력이 초보 피디에게 속박될 정도로 별볼일 없는게 아 니다, 하는 걸 역으로 드러내려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예린씨, 라구요? 나도 조창익씨라고 부르기 전에 내 직함부터 분명 하게 부르세요. 어디서 어떤 피디와 어떻게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로그램진행상의 총체적인 권한과 책임은 분명히 저에게 있어요. 경력이 그 정도나 되셨다는 분이 그렇게 기본적인 상식도 없이 어떻게 방송 일 에 종사하고 있는 거죠?" 마치 대본을 암송하듯 그녀는 거침없이 촬영감 독을 몰아붙였다. "그러니까 뭐야, 그따위 계급의식으로 스탭들을 가지고 놀겠다는 거요 ?" "유치하게 비약하지 마세요. 내가 말하는 건 그런게 아녜요. 그리고 이순간 이후부터 나의 연출진행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사사 건건 경력을 앞세우고 나설 생각이라면 지금 당장 카메라 들고 본사로 돌 아가세요. 나도 사유만 분명하게 밝히면 촬영감독은 중도에도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으니까요. " 급소만 골라 비수를 찔러대는 듯한 그녀의 야 무진 공격성 발언을 듣고 나는 슬그머니 등을 돌렸다. 상황이 악화되면 나라도 나서서 한마디 중재의 말을 건네고 싶다는 생각 을 하고 있었지만, 촬영감독이 아무리 경력을 앞세운다고 해도 대세는 이 미 그녀 쪽으로 기울어진 뒤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서 묵연한 눈빛으로 다리 건너 호수변에 즐비하게 늘어선 음식점과 카페 건물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퍼뜩 뇌리를 스쳐가는 기억이 있어 나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말았다. 레스토랑 이카루스! 거리가 멀어서 레스토랑의 이름을 확인할 수는 없 었지만, 예전의 그 자리를 고스란히 지키고 있는 호수변의 건물 하나에서 돌연 강렬한 빛이 튀어오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저것이 과연 그것인가, 하는 듯한 눈빛으로 나는 차원의 문과 같 은 사각형 건물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다리가 끝나는 지점의 좌측, 벽면이 흰 빛으로 도장된 호수변의 첫번째 건물이 갑작스럽게 현실의 외관을 벗어던지고 내 과거의 기억에 뜨거운 불꽃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었다. 2월의 매운 바람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던 뜨거운 커피잔, 그리고 넓은 머플러를 목에 드르고 깊이 가라앉은 눈빛으로 오래오래 침묵하며 호수를 내려다보던 한 여자… 그래, 이를데 없이 막막한 심정으로 이미랑 선생과 마주앉아 있던 그때, 내 나이 어느덧 갓 스물이 아니었던가. "저기 건너다보이는 저 레스토랑… 아니, 어쩌면 지금은 레스토랑이 아 닐지도 몰라요. 어쨌거나 난 저곳에 가 있겠소. " 다소 고조된 감정을 애써 억누르며 나는 연출 보조에게 다리 건너편의 첫번째 좌측 건물을 일 러 주었다. 그리고는 이예린과 촬영 감독이 언쟁을 계속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총히 다리를 건너가기 시작했다. 그들이 주고받는 언쟁이 전혀 다른 세상의 일처럼 요원하게 느껴지는 반 면, 다리 건너편의 건물에서 물리치기 어려운 흡인력 같은게 느껴진 때문 이었다. 그 건물, 아직도 '레스토랑 이카루스' 로 남아 있을까? - 힘들게 찾아 온 너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게 돼서 마음이 아프지만… 이제 일주일이 지 나면 난 이곳에서도 다시 떠나야해. 대학입시를 끝내고 이미랑 선생을 찾아갔을 때, 어이없게도 그녀는 또다른 이주를 준비하고 있었다. 학교를 그만두고 송라읍을 떠난뒤, 내가 대입 수험생으로 일년을 보내는 사이에 그녀는 은명시의 사립학교 교사가 되어 있었다. 내가 삼학년으로 진급을 하고 두달쯤 지난 4월말경, 은명시의 여자중학 교에 자리를 얻었다는 그녀의 편지를 처음 받아들었을 때의 기쁨을 어떻 게 말로 형용할 수 있을까. 4월 이후, 대학입시가 끝날때까지 나는 정기 적으로 이미랑 선생과 편지를 주고받았다. 내가 일주일에 두서너통의 편지를 보내면, 그것에 대한 답장으로 꼬박꼬 박 그녀가 한두통의 편지를 보내오곤 한 것이었다. 당시에도 나는 그녀가 나와의 서신 왕래에 놀라울 정도로 몰두하고 있다 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편지에서 매번 깊은 정성이 느껴지 곤 한 때문이었다. 그녀는 언제나 항공우편 봉투를 사용해 편지를 보내오곤 했는데, 편지 겉봉에 인쇄된 'VIA AIR MAIL' 이라는 글씨 위에는 매번 두개의 푸른 줄 이 그어져 있었다. 항공우편이 아니라는 표시로 그녀가 만년필을 사용해 남겨놓은 두개의 짧은줄 - 그것에서도 얼마나 깊은 정겨움이 느껴지곤 했던지. 아무렇든 내가 은명시를 처음 방문하게 된 건 고3여름방학때였다. 한번 다니러 가면 안되겠냐는 나의 편지를 받고, 원한다면 언제든 다녀 가도 좋다는 답장을 이미랑 선생이 내게 보내온 것이었다. 하지만 송라읍에서의 갑작스런 이별 이후, 반년이 더 지난 뒤에 재회하 게 된 그녀에게서 나는 어떤 식으로도 내색할 수 없는 깊은 상처를 입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편지를 통해 나에게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 그것이 여 전히 과학선생과의 원만치 못한 관계 때문이라는 걸 그때 분명하게 알아 차리게 된 것이었다. 내가 그녀에게 써 보냈던 무수한 편지, 그것의 저변에 사랑의 감정이 기 초하고 있다는 걸 그녀도 모르지 않았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 는 은명시로 자신을 만나러 간 열아홉의 나에게 가혹한 형벌의 언어를 선 사한 것이었다. 과학 선생과 함께 찍은 수다한 사진들을 내게 보여주던 그녀의 자취방, 그녀가 나의 영혼에 아로새긴 깊고 저린 상처의 언어를 나는 끝끝내 잊 을 수 없으리라. - 본오야, 난 그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해. 내가 송라고등학교를 그만두 고 이곳으로 오게된 건 그사람과의 사랑을 포기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 을 지속시키고 싶었기 때문이야. 어쩌면 그 학교 사람들은 내가 그 사람 에게 배신을 당했기 때문에 학교를 그만둔 거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 만 그곳을 떠난 뒤에도 그 사람과 나는 한달에 한두번 정도씩 계속 서울 에서 만나고 있어. 하지만 사랑이 내 뜻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건 아냐 . 아주 여러가지 일들, 그러니까 세상을 사는 동안 나에게는 결코 일어나 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는 거야. 그래서 은명시에 서 보낸 하루하루가 내게는 너무 힘들게 느껴져. 하지만 너와 편지를 주 고받는게 그나마 위안이 되는 것 같아 항상 너에게 고마워 하고 있어. 그때 이미랑 선생이 담담한 표정으로 내게 말한 것을 나는 진실이라고 믿 지 않았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과학선생과의 사랑이 여전히 지속 되고 있다는 걸 애써 내게 강조한 이유를 전혀 다른 식으로 받아들인 것 이었다. 과학선생과의 사랑을 자연스럽게 밝히기 위해 꺼낸 말이 아니라, 그녀에 대한 나의 열정과 몰두를 온몸으로 감지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꺼낸 말 이라고 단정해 버렸던 것이다. 그날, 그녀의 자취방에 머무는 동안 나는 과학선생에 대해서는 단 한마 디도 입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미랑 선생이 송라읍을 떠난 뒤, 과학선생을 만나기 위해 몇번이나 서 울에서 여자가 내려왔었다는 얘기라거나 그녀가 바로 과학선생의 약혼자 라는 학생들 사이의 소문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질 않은 것이었다. 그만큼 나의 눈에는 이미랑 선생이 지쳐 보였고 또한 안쓰럽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일들과 아무런 상관도 없이 나는 오직 한가지, 이미랑 선생을 위해 내가 축성한 에메랄드 궁전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그녀말고 이 지상의 어느 누가 내 마음의 에메랄드 궁전으로 입성할 수 있으랴. 레스토랑 이카루스. 놀랍게도 건물 입구의 간판에는 예전의 이름이 그대로 나붙어 있었다. 당시에는 일층만 레스토랑으로 사용했었는데, 이제는 이층과 삼층을 포 함한 건물 전체가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래서 잠시 감회어린 눈빛으로 건물외관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일층의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바로크 풍의 의자와 탁자가 놓인 실내를 둘러보고 나서 예전의 그자리, 이미랑 선생과 마주앉았던 창옆의 자리에 앉아 커피 대신 병맥 주 한병을 주문했다.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그자리, 적잖은 세월이 흘렀지만 수면에서 반짝이 는 햇살이 그해 여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았다. 과거의 결정 (結晶) 이 현실이 되는 거라고, 현실의 이면에는 언제나 과 거가 응결돼 있는 거라고, 잔물결에 반사되는 햇살이 연해 속살거리는 것 같았던 것이다. "이 선생님, 이제 가시죠. " 시간의 흐름을 까마득히 잊은채 호수면을 내려다보고 있을 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허공에서 떨어졌다. 고개를 돌려보니 연출보조인 김인규가 다소 초조한 낯빛으로 서 있었다 . "그래, 이예린 피디와 촬영 감독은 어떻게 됐소?" "어떻게 되고 말고 할 게 뭐 있나요. 촬영을 하러 다니다 보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생 기는 걸요. 맡은 일의 특성이 서로 다르고, 각자의 개성이 다르니 그저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는 거죠. 그래도 프로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웬만해서는 파국을 초래하지 않습니다. 감정은 감정, 방송은 방송… 그런 식이죠 뭐. " "커피 한잔 하겠소?" 머쓱하게 서 있는 그의 표정이 다소 코믹하다는 생각을 하며 나는 물었 다. "아뇨. 지금 바로 촬영 장소로 이동해야 합니다. 일행이 다리를 건너와 기다리고 있거든요. 그리고 선생님 차는 제가 몰 고 왔습니다. " 맥주가 반 이상 남아 있었지만 그의 말을 듣고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레스토랑을 빠져나와 도로변으로 나가자 길 건너편에 내 차와 승합차가 나란히 정차돼 있었다. 하지만 내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 차에서 내린 사람은 아무 도 없었다. 내 차 운전석 옆에 이예린이 앉아 있는 걸 보고 묘한 안도감을 느끼며 나는 보조 연출자를 따라 재빨리 무단횡단을 했다. "맥주를 반 병쯤 마셨소. 혹시 방송 출연자에게도 음주 단속을 하는건 아니겠죠?" 운전석에 앉자마자 선글래스를 착용하고 사뭇 무표정한 얼 굴로 앉아 있는 이예린에게 나는 다소 농스런 어조로 물었다. "한 병을 다 드시고 오셨다고 해도 상관 없어요. 곧장 이미랑 선생이 자취하던 집으로 가시면 돼요. " "이런 기분으로 일을 진행해도 괜찮은 거요?" 백미러를 보고 나서 차를 출발시키며 나는 물었다. "추한 모습 보여서 미안해요. 하지만 이런 건 촬영과 아무런 상관도 없 어요. " "당사자들은 상관 없을지 몰라도 출연자에게는 상관 있을 수도 있죠. 일을 너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거 아닌가요?" "왜요, 납치라도 당한 기분이세요?" 어디 할 말 있으면 해봐라 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녀 는 고개를 돌리고 나를 보았다. "글쎄, 납치당한 게 아니라면 수모를 당하는 걸까? 아무튼 이런 얘기는 더이상 하고 싶지 않소. 내가 도깨비에 홀린게 아니라면 침묵으로 버티 는 게 차라리 나을 테니까. " "침묵하는 것보다 솔직해지는 게 더 낫지 않을까요? 마치 그 말을 하기 위해 지금까지 자신을 억제하고 있었던 듯 그녀는 히스테릭한 목소리로 갑작스럽게 언성을 높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말인가, 단박 따지고 싶었지만 나는 이를 악물 고 응대를 하지 않았다. 세상은 넓고 인간은 모두 다르다, 하는 생각만 해묵은 화두처럼 내심 되 씹고 곱씹었을 뿐이었다. 이 여자, 정말 알다가도 모를 여자 아닌가. 시내 중심가를 곧게 빠져나 가자 사방의 중심이 되는 지점에 수백개의 팬지 화분을 피라미드 형으로 장식한 십자로 (十字路)가 나타났다. 직진 도로와 우측 도로 중간 지점의 사잇길을 눈여겨보며 나는 차를 멈 추고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렸다. 저 대각선 방향의 사잇길로 접어들면 극장이 나타나고 거기서 다시 좌측 으로 접어들면 테니스 코트가 있는 연수원 건물이 나타나리라. 오래 전의 기억을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되살리며 나는 은밀하게 호흡을 가다듬 었다. 그리고 팬지 화분 위로 옥양목처럼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햇살을 내다 보며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도 기억은 재현될 수 있는게 아니요. 그 것은 이미 그것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누구의 간섭 이나 강요로도 바뀔수가 없는 거요. " 자신의 생각에 깊이 침잠한 듯, 나의 말에 이예린은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다. 신호가 바뀐 뒤에 나는 재빨리 직진 도로와 우측 도로 사이로 접어들었 다. 하지만 극장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지점에 대형 쇼핑 센터가 들어서 있는 걸 보고 나는 아연 입을 벌리고 말았다. 하지만 내가 놀랄만한 일은 거기서 끝난 게 아니었다. 연수원 건물이 있던 곳에는 스포츠센터 건물이 들어서 있었고, 이미랑 선생의 자취집이 있던 맞은편에는 아담한 공원이 조성돼 있었기 때문이었 다. 오랜 세월의 흐름을 무시하고, '레스토랑 이카루스' 의 건재에 지나치게 마음을 열어놓고 있었던 것일까. "오, 이런… 아무것도 없네. 아무것도 없어. " 작은 분수대 주변으로 몇 개의 녹색 벤치가 설치된 공원을 내 다보며 나는 탄식하듯 중얼거렸다.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그러니까 이미랑 선생이 자취하던 집이 저 공 원 부지 안에 있었다는 거죠?" 상황을 짐작할 만하다, 하는 어조로 그녀 는 물었다. 물에 잠긴 듯 한껏 초점이 흐려진 눈빛으로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 다. 그해 겨울, 대학입시를 끝내자 마자 부랴부랴 찾아왔던 한적하던 동네의 풍경이 묵연하면서도 아리게 눈앞을 스쳐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런 동네는 애초부터 이 지상에 존재하지도 않았었는지도 모른 다, 하는 기이한 착각까지 생겨나는 것 같았다. 도끼 자루가 썩은 뒤에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오게 된 동화속의 나뭇군처 럼, 그래서 나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믿어지지 않는 현실의 풍경을 넋을 잃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예전의 집이 그대로 남아 있을 거라는 기대는 처음부터 하지 않 았어요. 중요한 건 과거의 풍경이 아니라,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풍경 앞에서 선생님이 과거를 어떻게 기억해 내느냐 하는 거 예요. 이곳에서의 진술이 전체적인 흐름을 좌우하게 된다는거…그 정도는 물론 알고 계시겠죠? 선글래스를 벗고, 다짐을 하듯 그녀는 나를 보았다 . 하지만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시동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는 담배를 피워물고 우울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 보았다. 그해 겨울, 대학 입시를 끝내고 찾아왔을 때의 혹독하던 추위와 골목에 나뒹굴던 연탄재와 바람에 밀려가던 비닐봉지 같은 것들이 스산하게 뇌 리를 스쳐갔다. 그리고 뒤를 이어 따뜻하던 방, 절망으로 시들어가는 한 여자의 창백하 던 낯빛, 붉은 포도주, 멜라닌 사프카의 애절하던 노래 따위가 연해 기억 의 암층에서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승합차에서 내린 촬영팀과 이예린이 미팅을 하는 동안 나는 천천히 공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리고는 작은 분수대가 있는 뒤쪽으로 돌아가 쇼핑센터와 스포츠 센터 사이의 거리와 내 기억속에 남아 있는 과거의 거리, 다시말해 극장과 연 수원 건물과 자취집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과거와 현실 사이의 거리. 육간으로 건물과 건물사이의 실제 거리를 가늠하는 동안, 나의 뇌리에서는 과거와 현실 사이의 거리가 복잡하게 꼬이고 뒤츨리면서 호흡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 이따위 형식적인 회상이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단 말인가. 현실의 토대 위에서 과거를 이끌어내려는 노력이 너무나도 무망하고 허망하게 느껴져서 나는 점점 더 호흡이 불편해졌다. 그래도 카메라 앞에서 무엇인가를 말해야 한다면, 어느 누구든 나의 과 거를 건드리지 말라고 미친듯이 고함을 내지르고 싶을 뿐이었다. 이제 난 모든 걸 포기했어. 내가 지금까지 세상을 살아오면서 키워왔던 모든 꿈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알량한 희망 같은 것들…그런 것도 이젠 다 사라져 버렸어. 나도 모르게 너에게 심어준 꿈이 있었다면…그런 것 까지도 마냥 죄스럽게 느껴져. 이제 난 뭘 믿고 살아야 하는 거지. ? 그 날밤, 이미랑 선생은 자신의 자취방에서 붉은 포도주를 마시고 힘없이 무 너져내렸다.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자신의 꿈과 사랑과 청춘을 송두리째 부정하는 듯한 말을 입에 올리고,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면 체념한듯 다시 술잔을 기울이곤 한 것이었다. 이제 일주일이 지나면 다시 은명시를 떠날 거라는 말, 아무도 없는 곳으 로 영영 사라져버릴 거라는 말, 그리고 이제 모든게 끝나버렸다는 말…갓 스물이 된 내가 대학 입시를 끝내자마자 자신을 찾아간 이유를 아는지 모르는지, 삶에 대한 일말의 애착도 남아 있지 않은 사람처럼 그녀는 피 폐해진 모습으로 내 가슴에 아주 여러번 아픈 못질을 해댔던 것이다. "이미랑선생의 자취집이 있던 자리가 어디쯤인지 대충 짐작할수 있겠어 요?" 내가 깊은 혼돈에 사로잡힌 표정으로 분수대 뒤쪽에 꼼짝 않고 서 있을 때, 손에 구성안을 든 이예린이 빠른 걸음으로 내게 다가와 물었다 . 촬영팀이 공원 안으로 촬영 장비를 옮기자 주변을 오가던 몇몇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일행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이 있던 자리… 바로 여기요. " 턱으로 분수대를 가리키며 나는 낮 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지금 이 분수대가 있는 자리에 그 집이 있었다구요?" 언어로 재현될 수 없는 기억의 세계, 그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대신하듯 분수대에 서는 갈래갈래 갈라진 물줄기가 끊임없이 뿜어올려지고 있었다. 나의 말을 듣고 나서 이예린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표정으로 서 있다 가 다시 카메라가 있는 곳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리고는 카메라 감독에게 분수대를 가리키며 뭐라고인가 제스처를 섞어 가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나는 도무지 기억을 정리할 수 없어 난감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때 카메라 감독과 얘기를 끝낸듯 이예린이 다시 내게로 걸어왔다. "그 해 겨울, 이미랑 선생을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두사람 사이에서 있었던 일이 여기에서는 가장 중요해요. 갓스물에 이곳으로 찾아와 그녀 를 만났지만, 선생님 인생에서는 그게 마지막 만남이었잖아요. 그런데도 마흔셋이 된 지금까지 그녀를 잊지 못한다는 거…그런 걸 말하기 위해서 는 그런 걸 뒷받침해 줄 만한 뭔가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결정적인 무엇 인가. " 말을 하고나서 그녀는 말끄러미 내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강조에도 불구하고 나는 도무지 과거와 현실 사이의 거리 를 조절할 수 없어 모든 걸 체념한 듯한 기분으로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 그러자 도리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는 준비하라는 말을 남기고 다시 카메 라가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뒤, 연출 보조가 나에게 다가와 몸에다 와이어리스 마이크 를 달아 주었다. 곧이어 카메라의 위치가 고정되고 이예린이 구성안을 든 손을 들어올렸 다. 큐! 이예린의 손이 밑으로 떨어졌지만 나는 입을 열 수 없었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 사이에서 불꽃을 튀기는 아픈 기억 의 편린들이 말문을 막고, 그것이 현실의 모든 행위를 부질없는 것으로 여겨지게 한 때문이었다. 기억은 말이 아니라 연계성이 없는 순간순간의 장면으로만 나의 눈앞을 스쳐갔다. 갓스물의 나로서는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던 순간들, 그런걸 어떻게 입 밖으로 꺼내 말로 재현할 수 있단 말인가. "여기까지 왔는데, 도대체 뭘 망설이시는 거죠?" 나의 멘트를 듣기 위 해 카메라 옆에 이어폰을 꽂고 서 있던 이예린이 이어폰을 벗어던지고 뛰 듯이 나에게 다가와 싸늘한 표정으로 물었다. "망설이는 게 아니라… 이건 아무래도 할 수 없는 것 같소. 아무리 생 각해 봐도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는 거요. " 절망스런 표정으로 나는 머 리를 흔들었다. 그 순간, 그날 밤의 이미랑 선생, 그녀가 엄청나게 구토를 해대던 장면 이 문득 눈앞을 스쳐갔다. 토하고 또 토하고, 그날밤 자정무렵까지 정신없이 구토를 해대던 그녀, 가까스로 자리에 눕혔을 때 납빛처럼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며 했던 말이 무엇이었던가. - 본오야, 나를 용서해 줘… 난 너에게 아무 런 의미도 될 수가 없어, 너에게는 너에게 걸맞는 꿈이 있고, 그건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어, 하지만 너, 이본오가 나에게 주었던 진실하고 따뜻 했던 사랑의 기억은 영원히 잊지 않을 거야. 이제 나의 에메랄드 궁전은 사라졌지만… 네 가슴에 남아 있는 에메랄드 궁전을 나는 오래 오래 잊 지 않을 거야. 내가 이미랑 선생을 찾아갔던 그때는 과학 선생이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식을 올린 직후였었다. 그러므로 이미랑 선생의 절망이 어디에서 기인된 것인지를 나는 분명하 게 감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랑 선생을 향한 갓스물의 내 열정은 그런 걸 전혀 문제시하 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랑 선생의 절망까지 내가 껴안고 싶다는 무한한 애정, 그런 것으로 한없이 어른스러워지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붉은 포도주에 취해 끝없이 구토를 해대고 끝내 탈진해버린 그녀 를 밤새도록 옆에서 지키며 나는 내 자신에게 다짐했었다. 나, 그녀 이외의 어느 누구도 평생 사랑하지 않으리라. "미안하오. 이 제 더이상은 도저히 당신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하겠소.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날 내버려 두시오. " 그녀의 시선을 비켜 분수대를 바라보며 나는 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러자 그녀가 너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양손을 펼쳤다가 이어 머리 를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우우, 하고 속으로 분을 삭히는 듯 기괴한 소리를 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나는 어떤 일이 속수무책의 파국으로 몰려갈 때와 같은 이율배반적인 안정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쥐고 있던 그녀가 갑작스럽게 양손을 흔들 어대며 발작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문제의 핵심이 전 혀 다른 데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섬뜩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 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솔직해지지 못하는 거죠?그날밤, 이미랑 선 생과 이선생님 사이에서 일어났던 일에 대해 왜 그렇게 무책임하게 발뺌 만 하려 하느냐구요!그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네?" 돌아가야 한다. 그래, 다른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처음의 그 자리로 되돌아가야 한다 고 생각하며 나는 숙소로 정해진 모텔의 창가에 서서 묵묵히 도심의 야경 을 내려다 보았다. 연출 보조의 중재로 촬영이 하루 연기되긴 했지만, 내일이라고 해서 달 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 터였다.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날수록 감정적 난조가 더욱 심해지는 이예린의 태 도에 대해서도 나로서는 더이상 감내할 자신이 없었다. 감내할 자신이 아니라 이예린, 그녀가 나의 소중한 기억을 고의적으로 파괴하기 위해 이런 일을 기획한 것 같다는 섬뜩한 의구심으로부터 도무 지 자유로와질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무엇 때문에 근원을 알 수 없는 존재에게 이런 방식으로 집요하게 시달려야 한단 말인가. 10시 40분. 시내로 나가 술이나 한잔 해야겠다 고 생각하며 나는 옷걸이에 걸어두었던 사파리를 걷어 내 몸에 걸쳤다. 그리고는 풀어놓았던 손목시계를 차고 내일 아침 일찍 이곳을 떠나리라 , 다짐을 하듯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그때 조심스럽게 두 번, 방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가 들렸다. 누군가 나의 외출 준비를 지켜보고 있었던 듯한 당혹감에 잠시 동작을 멈추고 있다가 나는 천천히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는 이 시간에 누가 날 찾아온 것일까,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방문 을 열었다. 아. 거기, 붉은 카페트가 깔린 복도 한가운데 이예린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눈빛이 한껏 긴장된 것으로 보아 낮보다 상태가 훨씬 나빠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이내 그녀의 시선을 피해 오른손에 들린 두어 권 의 스크랩북을 내려다 보았다. 그러자 날 찾아온 용건을 말하기 위해서인 듯 그녀는 다소 떨리는 목소 리로 입을 열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어요. 잠깐 안으로 들어가면 안될까요?" "지 금 말이요?" 방안에서 밀려나간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두 눈이 한동안 울고 난 사람의 그것처럼 다소 충혈돼 있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 나는 물 었다. "네, 지금요. " 꼿꼿하게 머리를 들고 그녀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응, 지금 밖으로 술을 한잔 하러 나가려던 참인데… 같이 나가서 얘기 하면 안되겠소? 꼭 방안에서 해야 할 얘기가 아니라면 말이요. " 다소 난감하다는 표정으로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러자 잠시도 사이를 주지 않고 사뭇 결연한 표정으로 그녀는 단박 이 렇게 입을 열었다. "안돼요, 절대. 이건 밖에서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니예요. " 도리 없다는 표정으로 나는 방안으로 물러섰고 그녀는 방안으로 들어왔 다. 눈부시게 환한 방안의 형광 불빛에 드러난 그녀의 얼굴을 마주 대하자마 자 나도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팽팽하게 조여드는 것 같았다. 피부가 놀라울 정도로 투명하고 선연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분명 울고 난 얼굴이라는 확신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울었다는 걸 고의적으로 감추려는 듯 냉랭한 표정 으로 나의 어설픈 동작을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내가 원형 탁자 우측의 의자에 앉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스크 랩 북을 탁, 소리가 나게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보아라, 그런 뜻인 것 같았다. 뭔가. 자리에 앉을 생각을 하지 않고 꼿꼿하게 버티고 선 그녀를 한번 올려다보고 나서 나는 다소 긴장된 기분으로 첫번째 스크랩 북의 표지를 열었다. 그러자 이게 뭔가, 나의 사진이 함께 게재된 아주 오래된 인터뷰 기사가 첫번째 페이지에 붙어 있었다. 이상하다는 기분이 들어 반사적으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나서 나는 다시 한장의 스크랩 북을 넘겼다. 그러자 거기에도 역시 마찬가지, 나의 장편소설 출간과 관계된 꽤 오래 된 신문기사가 부착돼 있었다. "이게… 대체 뭐요?" 스크랩 북에 부착된 내용물이 전부 나와 연관된 것인가를 확인하기 위해 페이지를 넘기며 나는 중얼거렸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았고,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러서야 나는 한권 분량의 스크랩 북에 부착된 내용물이 모두 나와 연관된 각종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이라는 걸 알아차릴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한권을 마저 펼치자 거기에는 '에머랄드 궁전의 추 억' , 다시 말해 내가 신문에 연재하다 중단된 연재소설이 1회부터 중단 된 부분까지 빠짐없이 스크랩 되어 있었다. "그것들이 뭔지 아시겠어요?" 머리를 들어 허공을 한번 올려다보고,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고 나서 그녀는 물었다. "이거… 전부 이예린 피디가 스크랩 한거요?" 지금까지 그녀가 내게 보여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저변, 그것을 비로소 감지한 듯한 표정으 로 나는 그녀를 올려다 보았다. 방송 출연을 섭외하기 위해 나에게 접근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 어쩌면 자연스런 일은 아무것도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 를 스쳐간 것이었다. 자연스런 일이 아니라 계획적인 일에 내가 말려든 것인지도 모른다는 섬 뜩한 위기감. "아뇨. 그건 제가 스크랩 한게 아니예요. 그건… 이미랑 선생의 유품에서 발견된 것들이예요. " "엄마의 유품에서 스크랩 북을 발견한 뒤부터 저는 한동안 도서관을 들 락거리며 선생님과 관계된 모든 자료를 다 찾아봤어요. 그리고 제 나이와 선생님 나이, 그리고 연재하다 중단한 소설의 시간적 배경을 확인하여 제 탄생의 근원을 찾아나갔어요. 하지만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도 결국 은 선생님이 갓 스물에 은명시를 찾아오는 부분에서 중단됐어요. 은명시 에서 다시 만난 이미랑 선생과 선생님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 걸 알 수가 없었다구요. 그해 겨울, 두사람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 … 그래서 예상 못한 생명이 잉태됐다면… 그럼 지금의 저와 똑같은 나이 가 된다는 걸 혹시 아시나요?" 자신의 탄생을 스스로 모멸스러워하는 듯 한 표정으로 그녀는 말을 하고 나서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댔다. 울컥 그녀의 말을 듣자 나도 모르게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울렁거리는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크게 심호흡을 하고 나서 나는 그해 겨울, 그해 겨울, 하고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그해 겨울, 이미랑 선생과 나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그럼 이예린씨는 내가…. " 그 순간, 명치 끝에서 울컥 치밀어 오른 무엇인가가 기도를 막아 더이상 말을 이어나갈 수 없었다. "왜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시는 거죠? 붓꽃을 들고 선생님 댁을 방 문했던 날… 아무런 이성적 감정을 지니지 말고 그냥 한번만 절 안아달라 고 했을때의 선생님 표정을 보며 제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세요? 이렇 게라도 한번… 그래요, 이렇게라도 한번 내가 모르던 은밀한 비밀의 감촉 을 접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온몸을 떨었어요. 그리고 반쪽의 정서만 으로 세상을 살아온 듯한 느낌이 그 순간 온전하게 하나가 되는 것 같아 서 집으로 돌아와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하지만… 그런 나보다 엄마는 더 지독했어요. " 말을 하고나서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런 그녀를 보자 다시 한번 헛구역질이 치밀어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도리질을 하듯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그녀는 연해 어깨를 들먹이고 있었 다. "이예린씨가 태어난 이후… 그럼 이미랑 선생은 내내 혼자 살았던 거요 ?" "아뇨… 혼자 살지 않았어요. 아주 지독스럽게… 그래요, 혼자 산 게 아니라 자신의 추억을 반추하며 살았어요. 나에게 고통의 뿌리가 자라는 지 모르는지… 그런 것도 모른 채 언제나 추억을 되새김질하는 표정으로 한세상을 살다간 거예요. 그래서 엄마의 유품에서 선생님의 소설과 스크 랩북, 편지 따위들이 발견됐을 때… 나는 직감적으로 선생님이 내 아버지 라고 단정했어요. 그러니까 엄마는 오직 한 사람, 선생님만을 생각하다가 세상을 떠난 거예요. 그리고 세상을 떠난 뒤에 내가 그걸 발견하길 바랐 기 때문에… 그래서 그걸 없애지 않았을 거예요.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런 건 자식에게 너무 가혹한 일 아닌가 요?" 이예린. 다시 한대의 담배를 피워물며 나는 스물넷이 될때까지 자신이 누구의 딸인지도 모르고 세상을 살아온 한 여자와 그녀의 절규를 생각했 다. 그리고 캄캄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다른 한 여자, 자신의 딸에게 끝 끝내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지 않고 세상을 떠난 이미랑선생을 생각했다. 그 해 겨울, 내가 그녀를 찾아갔을 때 그녀는 이미 이예린을 잉태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 생명을 잉태하게 만든 사람은 이미 다른 여자와 결혼을 했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임신 사실을 숨길 수 밖에 없었으리라. 그것이 갓 스물이었던 그 해 겨울에 내가 몰랐던 진실 , 그리고 그로부터 23년이 지난 뒤에 내려진 나의 결론이었다. 다시말해 이예린은 이미랑선생의 에메랄드 궁전이 깨어지면서 잉태된 생명이었고, 그것에 대한 이미랑선생의 끈덕진 그리움을 양분으로 받으며 키워진 생명이었던 것이다. 끝과 끈. 호수 건너편에서 망사처럼 부드러운 밤바람이 불어올 때, 아 주 문득 이상한 생각이 뇌리를 스쳐갔다. 어쩌면 이것은 나와 이미랑선생과의 인연이 끝났음을 의미하는 게 아니 라 새로운 시작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 다시말해 전혀 예상 못한 끈이 새로운 의미로 이미랑선생과 나와 이예린을 동시에 묶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뇌리를 스쳐간 것이었다. 작고 사소한 것들의 미세한 움직임 속에서 인생의 아주 커다란 부분들이 변해 가듯,에메랄드 궁전의 환상 속에서 아주 오랫동안 나를 사로잡고 있던 거대한 혼돈의 실체가 벗겨진 것이었다. 사랑을 사랑하는 인간의 어리석음. 갓 스물 이후, 나는 사랑이 나에게 남긴 것을 사랑한 게 아니라 사랑 그 자체를 사랑한다고 믿으며 세상을 살아왔었다. 그것이 나의 의식에 딱딱한 각질을 형성하고, 그것으로 인해 나는 사랑 의 원초적인 자연스러움을 상실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서기 2000년, 어느 누가 마흔셋씩이나 된 나의 가슴에 아직도 첫사랑의 궁전이 건재할 거라고 믿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미랑선생이 홀로 키워 낸 이예린과 내가 집요하게 고수하고 싶어했던 에메랄드 궁전은 사랑을 사랑한 사람들이 만들어낸 지극히 관념적인 사랑의 산물인지도 모를 일이 었다. 피우던 담배를 어둠 속으로 튕겨버리고 나서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그러자 긴 세월, 내 마음에 얼룩진 사랑에 대한 편견과 이기와 부자연스 러움이 거대한 몰각의 공간으로 부드럽게 빨려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사랑이 나에게 남긴 것을 사랑하지 않고 사랑을 사랑했던 어리석 음을 되새기며 나는 허탈한 심정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이제와서 이런 결론을 내린다는 거…너무 허망한 일인가요?" 마음의 행로를 정하기 위해 나는 어둠 속에 서서 멀리, 밝은 불빛이 신 기루처럼 떠 있는 도심의 상공을 내다보았다. 얼핏 환상처럼 보이지만 그곳이 바로 내가 걸어가야 할 현실, 더이상 외 면할 수 없는 삶의 터전이었다. 오랫동안 스스로 물러나고 비켜서고자 했던 혼돈의 중심부 - 그곳에서 누군가 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을 떠올리자 나도 모르게 마음 이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 선생님의 첫사랑이 저를 잉태하게 했나요? 스물넷이 될 때까지 자신 의 뿌리를 모르고 살아왔던 한 여자, 그녀에게 다가가 나는 밤바람이 전 하는 깊고 내밀한 진실의 언어를 들려줘야 할 터였다. 내가 오랫동안 마음에 품고 살아온 대상은 이미랑 선생이 아니라 첫사랑 , 첫사랑이 아니라 에메랄드 궁전으로 상징되는 순수에 대한 동경이었는 지도 모른다는 말. 갓 스물에 증발해 버린 순수에 대한 동경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에 오랜 세월 동안 나는 현실을 아파하거나 안타까워했을지 도 모른다는 말. 그리고 그런 것이 손상당할까 두려워 스물넷의 절규 같 은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침묵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는 말… 사랑이 나에게 남긴 것을 비로소 사랑하게 된 자의 뒤늦은 깨달음으 로 나는 그런 말을 그녀에게 담담하게 들려줘야 할 터였다. 뿌리가 아니라 끈. 폐부 깊숙히 밤바람을 흡입하며 나는 이미랑 선생 이 마지막으로 나에게 남긴 기이한 인연의 끈을 되새겨보았다. 이예린의 출생에 관해서는 단 한마디의 말도 남기질 않고, 오히려 나와 관련된 것들을 유품으로 남기고 간 이면에 어쩌면 언어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신이 키운 이예린과 내가 키워온 에메랄드 궁전, 그것의 조우를 통해 그녀가 우리에게 일깨우고자 한 게 과연 무엇이었을까. "아… 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어둠속에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처음부터 자신의 뿌리를 확인하기 위해 다큐멘터리를 계획했다던 이예린 의 고백에도 불구하고, 모든 일의 결말은 놀랍게도 이미랑 선생이 예견했 거나 주도한 결자해지의 몫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퍼뜩 뇌리를 스 쳐간 때문이었다. 프로그램 작업 과정을 통해 이예린이 절로 알게 될 에메랄드 궁전의 진 실, 그리고 이예린의 정체를 통해 내가 깨닫게 될 에메랄드 궁전의 환상 과 실체…그것은 실로 놀라운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환상과 현실이 만나는 지점, 다시말해 에메랄드 궁전의 경계 지점에서 이예린과 나는 비로소 진실의 언어를 교환할 수 있도록 결말 처리가 되어 진 것이었다. 그래서 아득하지만 뚜렷한 현실의 불빛, 그것을 향해 나는 총총히 걸음 을 옮겨놓기 시작했다. 사랑이 나에게 남긴 것을 사랑하지 못하고, 사랑을 사랑하고자 했던 어 리석음의 공간 - 에메랄드 궁전이여, 이제는 안녕! 푸른 빛이 열리는 곳 ,에메랄드 궁전의 출구를 항하여.